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78화 (78/90)

< 괴물 배터리 -079- >

079.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설마설마 하는 분들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기어이 이 순간이 찾아오고 마네요. 엘리펀츠 팬이라면 당연히 모두가 기대했겠지만, 진짜로 여기까지 오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9회 초가 무득점으로 마무리되고, 재규어즈의 마지막 공격이자 엘리펀츠의 마지막 수비 이닝이 찾아왔습니다. 대타 없이 타석에 섰을 때부터 모두가 짐작하셨다시피 마운드에 오르는 건 최태웅 선수. 데뷔 직후부터 현재까지 16과 3분의 1이닝 노히트.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다 이닝 노히트 경신까지 세 타자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17이닝 연속 노히트 기록을 보유한 투수가 바로 재규어즈의 진호권 선수죠. 어쩌면 재규어즈 선수들이 파격적인 작전을 연달아 냈던 것도 프랜차이즈 스타의 기록을 사수해보려던 게 아닌가 싶은데요.

그라운드에는 명백하게 위압적인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분명히 쩌렁쩌렁한 함성이 울리는데도, 한편으로는 연극이 시작하기 전의 소극장처럼 지독한 정적이 느껴졌다.

적잖은 관중이 투수의 집중력을 배려해서 숨죽이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크게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아예 인지조차 못했다면 모를까. 기록을 의식한 시점에서 주위 소음과 관계없이 모든 투수는 긴장하기 때문이다.

단지, 긴장한 채로도 변함없는 공을 던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다를 뿐─

퍼억!

“스트라이크!”

─이라고 생각했으나.

저놈은 혹시 진짜로 아무렇지도 않은 거 아닌가?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에 꽂히는 74km/h의 체인지업을 보고, 야수들은 떨칠 수 없는 의심에 사로잡혔다.

“저 새끼는 미쳤어……. 그냥 미쳤다고…….”

“제발 나한테는 오지 마라…….”

“그냥 삼진이나 잡을 것이지, 왜 맞혀 잡으려고 지랄이야…….”

솔직히 야수로서는 투수의 대기록 따위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타석에서의 활약이 묻히는 건 둘째 문제. 어지간한 호수비도 본전인데, 실책이라도 저지르면 두고두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번 기록은 오늘 하루에 끝나는 종류도 아니었다.

만에 하나 오늘 기록 경신에 성공한다면?

앞으로도 최태웅이 등판할 때마다 이 살얼음 수비를 계속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퍼억!

“스트라이크!”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석에서 저따위 공을 흘려보낸 이도환만큼 환장할 사람도 없었다.

‘미친……. 도저히 못 휘두르겠어…….’

물리적으로만 보면 떠먹여준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목구멍에 깔대기를 꽂아서 억지로 쑤셔 넣어주는 수준의 찬스볼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저 공은 1, 2군을 통틀어 수십 명이나 되는 타자의 타이밍을 씹어먹었다. 이 통계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이미 오컬트의 영역이다.

더군다나 아웃 카운트 하나하나에 기록이 달라질 상황.

웬만하면 스트라이크라는 걸 알면서도 섣부르게 초구나 2구를 건드릴 엄두가 안 났다.

빠각!

“파울!”

“……!”

제 3구.

투 스트라이크가 되자마자 훅 들어오는 149km/h짜리 강속구에 방망이가 세로로 쩌적 갈라졌다. 흔히 표현하듯, 투포환처럼 묵직한 공이었다. 두꺼운 배팅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손끝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차라리 이게 낫다.’

포수답게 수 싸움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지만, 최태웅은 기본적으로 체인지업 이외의 변화구를 가지지 않았다. 밋밋한 공을 10km/h 단위로 몇 단계씩 휙휙 다르게 던질 뿐이다.

이렇게 정신 나간 완급에 대처하는 것보다는 150km/h짜리 돌직구와 힘겨루기를 하는 편이 수월했다.

단지, 패왕똥볼이라는 별명까지 생긴 놈이 자기 스타일을 버리고 그래줄 리가 없을…….

따악! 퍼억!

“파울!” “볼!”

따악! 따악! 빠각!

“파울!” “파울!” “파울!”

-8구째! 이번에도 150km/h의 빠른 공! 몸쪽에 꽂히는 절묘한 공을 이도환 선수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방망이를 또다시 교체하는 것 같은데요……. 3개째인가요?

-임팩트 순간에 배트가 밀리는 모습만 봐도 대강 상상은 갑니다만 그만큼 최태웅 선수의 구위가 엄청나다는 거죠. 한 타석에 방망이가 두세 개 부러지는 경우가 전혀 없는 건 아닌데, 커터도 아니고 포심 패스트볼에 이러는 경우는 정말 드물거든요.

-그나저나 참 색다릅니다. 최태웅 선수가 이렇게 강속구만 연달아 던지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이건 기록을 의식하고 있어서 나오는 볼 배합이라고 봐야 할까요?

-중요한 기록을 앞두고 있어서 느린 공을 던지기 어렵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좀 의아하네요. 이도환 선수의 스윙을 보면 빠른 공에 타이밍이 맞춰져 있어서 오히려 위험해 보이거든요. 프로 선수에게 익숙지 않은 스피드를 구사한다는 것이 강점인 최태웅 선수가 왜 어중간한 힘 싸움을 길게 가져가는지 모르겠어요.

148km/h 이상의 포심 패스트볼이 날아온 것만 벌써 6개째.

한 마디로 최태웅 ‘답지 않은’ 패턴에 양 벤치도 술렁이고 있었다.

살다살다 투수가 저런 괴물 같은 구위의 강속구를 뻥뻥 던지는데도 오히려 초조해지는 날이 올 줄이야. 유승혁 감독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도통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부웅!

“스트라이크 아웃!”

9구째에 이르러, 이도환의 배트가 마침내 맹렬하게 바람을 갈랐다.

포크볼이 연상될 정도로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

사실 폼을 보는 순간에 알아차리기야 했으나, 6구 연속으로 150km/h에 맞췄던 기어를 갑자기 내리는데 실패한 것이다.

‘이제 하나……!’

재규어즈 선수들의 표정이 거무죽죽해졌다.

지금까지 없던 집요한 승부가 이어지기에 혹시나 했는데……. 결국 마지노선에까지 발을 들이고만 것이다.

“조심해. 건드려보면 장난 아니게 묵직해. 그리고 딱히 초조한 기미도 없어.”

“그래?”

9번 타순. 투수와 교대해서 타석에 들어가려던 장태주에게 이도환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와중에도 제구되는 거 봤잖아? 적어도 기록 때문에 초조해서 에라 모르겠다 찍어누르려는 느낌은 아니야.”

“…….”

장태주는 이도환의 조언을 곱씹으면서 천천히 타석에 들어갔다. 타격 자세를 잡을 때쯤 돼서는 어느 정도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그렇다고 아무 이유도 없이 스타일이 바뀌었을 리는 없고……. 강약을 바꾼 거 아닐까? 느린 공 뒤에 빠른 공이 아니라 빠른 공 뒤에 느린 공. 사실은 그게 완급 조절하는 정석이기도 하고.”

어찌 됐건 카운트가 몰렸을 때 골치 아픈 투수인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노리는 건 차라리 초구나 2구.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당장 초구부터 빠른 공이 올 수도 있었다. 설마 이 타이밍에 ‘사실은 슬라이더나 커브도 던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는 않을 테니까.

‘진짜다! 빠른 공!’

부드러운 와인드업과 날카로운 팔의 스윙.

투구폼을 본 시점에서 장태주가 곧바로 방망이를 냈다.

상대는 오로지 완급으로만 범타를 유도하는 투수.

중간 레벨의 스피드는 워낙 종류가 다양해서 혼란스럽지만, 처음부터 150km/h 근처라는 걸 알면 타이밍 맞추는 것쯤은…….

따악!

“……?!”

묵직한 손맛을 느끼는 순간.

장태주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히 빠르기야 한데. 평소에 봐오던 빠른 공들과는 너무 타이밍이…….

“아웃!”

“……!”

1루수 정면으로 굴러가는 빠른 타구에 장태주는 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리고 전광판에는 실로 어중간하게도 130km/h라는 구속이 찍혀 있었다.

***

‘오케이, 걸렸다.’

망연함을 감추지 못하는 타자의 표정에 최태웅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이 쳐놓은 덫이 정확하게 발동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세상에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만 150km/h를 던질 수 있는 투수가 어디에 있나.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그런 경우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징크스나 체력 안배 같은 이유로 결정구로만 쓰는 거라 생각하는 정도지.

하지만 통계는 통계일 뿐.

방금처럼 연달아 6개나 강속구를 던지면 ‘기록 때문에 전력투구하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음 타자는 초구나 2구에도 150km/h가 날아올 가능성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7~80km/h대의 느린 공이라면 일찌감치 알아볼 수도 있지만, 130km/h는 아무래도 애매하다. 인간의 속도감은 상당히 애매한 것이라, 미리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빠른 공’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물론, 초구에 한한 이야기지만.

150km/h를 예측하고 휘두른 스윙에 130km/h가 갖다 박았으니 제대로 된 타구가 나올 리 없다. 타자 입장에서는 어중간하게 스윙을 늦춰서 억지로 컨택하느니, 시원하게 헛스윙하는 편이 나았을 터다.

‘조금 몰렸지만…… 제구가 많이 붙었어. 앞으로도 가끔은 써먹을 수 있겠다.’

최태웅에게 있어서 130km/h는 원래 제구를 도외시해야만 나오는 스피드다.

그러나 ‘닥터 K’의 잔여감각은 제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실전에서밖에 연습할 기회가 없어 진전은 느리지만. 벽에 막힌 것 같던 오른손 제구력도 돌파구가 생긴 것이다.

‘이제 마지막 하나.’

최태웅은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는 타자를 냉담하게 노려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벌레 씹은 표정이 따로 없었다. 고려해야 하는 패턴이 하나 늘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다.

사실, 평범하게 투수를 해나갈 거라면 이런 잔머리는 필요 없었다. 멍 때리고 ‘매의 눈’의 리드대로 던지기만 해도 웬만한 타자들은 정신을 못 차릴 테니까.

퍼억!

“스트라이크!”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잘해 봤자 무실점을 이어나가는 정도겠지. 노히트를 지키려면 초능력에 의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한팔 보태야 한다. 자신의 초능력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과는 도저히 상담할 수 없는 일이다.

따악!

“파울!”

이걸로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완전히 벼랑 끝에 몰린 타자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마지막 공을 던지기에 앞서, 최태웅이 벤치를 힐끗 보았다.

눈이 마주친 유승혁 감독이 갸웃거렸다.

‘역대 기록까지 경신하면, 앞으로 투구 방식이 좀 이상하다고 태클 걸지는 않겠지.’

최태웅의 오른발이 느릿하게 투수판을 밟았다.

150? 130? 110? 80?

그것도 아니면 뚝 떨어지는 포크성 체인지업?

거의 숨 돌릴 틈도 없는 템포에 타자의 눈이 팽팽 도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페이스 메이커 타령도 이제 슬슬 그만 할 때가 됐고.’

확실히 체력 떨어지는 베테랑과 1인분도 못하는 유망주들이 반반씩 섞여 있는 팀이니까. 이닝소화 잘하는 전천후 투수가 하나쯤 필요하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깨작깨작 나와서 3이닝 정도씩 먹어주는 것보다야.

5일에 한 번씩 완투하는 선발투수가 훨씬 도움되지 않겠나?

‘그러니까 이만큼 어필했으면 이제 쫌! 불펜은 지겹다고!’

불펜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잘 던지는 투수는 선발로.

이것이야말로 고금의 공식이었다.

***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경기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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