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77화 (77/90)

< 괴물 배터리 -078- >

078.

야구에는 암묵적인 룰이 여럿 있다.

홈런 친 뒤에 과도한 세리머니를 하지 않는다거나, 점수 차이가 클 때는 도루를 자제한다거나, 기록을 훼방 놓으려고 일부러 볼넷이나 번트를 하지 않는다는 것 등등이다.

물론,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규정 상의 제재를 받지는 않는다. 야구라는 스포츠의 정서에 따라 보복사구가 날아올 뿐. 때로는 보복사구를 안 하면 팬들에게 욕먹는 상황마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초구가 타자의 등에 꽂혀도 재규어즈 벤치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성강호의 번트를 생각하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놀란 것은 오히려 엘리펀츠 벤치였다.

이 공은 완전히 최태웅의 독단이었기 때문이다.

“워워워. 됐어. 이걸로 퉁이다.”

“…….”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실제로 재규어즈 선수 몇몇의 얼굴이 벌게졌으나, 그라운드로 달려오는 일은 없었다. 공에 맞은 당사자가 시큰둥하게 1루로 천천히 걸어나갔기 때문이다.

‘오케이. 이걸로 됐다.”

4번 타자인 서성일은 보호구를 벗으면서 내심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야구를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닌데, 기록 중인 투수한테 번트 대면 욕먹을 걸 몰랐겠나. 기록을 못 깨면 완전히 망신이고, 깨면 깨는 대로 스포츠 여론이 한바탕 뒤집어질 터였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엘리펀츠 쪽에서 사구를 지시해주길 바라기까지 했다.

벤치 클리어링까지 간다면 핵폭발이 일어나겠지만, 참고 넘어가면 양측의 관계는 리셋이 된다. 엘리펀츠의 보복을 묵묵하게 받아낸 셈이 되니까.

“아씨. 이거 왠지 기분 나쁜데. 표정이 하나도 안 아파보이잖아!”

전광판에 찍힌 122km/h의 숫자를 보면서 최태웅이 투덜거렸다. 이거 참, 공 느린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투 스트라이크 만들어놓고 몸에 맞힐걸.

“저 새끼를 배려해준 내가 병신이지.”

유승혁 감독은 살짝 어이가 없어서 투덜거렸다.

무사 2루. 1루가 빈 상황에서 타석에는 4번 타자.

마치 데드볼을 던지라고, 야구의 신이 안배라도 해준 듯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유승혁 감독이 보복사구를 지시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성강호의 출루는 실책으로 인한 것인지라, 아직도 노히트는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빈볼을 던져도 노히트는 깨지지 않지만……. 막말로 타자가 피해서 폭투가 되면 주자를 3루까지 보내게 된다. 맞혀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면 투구 밸런스가 깨질지 모른다고도 생각했고.

따악!

“……아웃!”

이어지는 5번 최민석의 타석에서는 조금 파격적이게도 보내기 번트가 나왔다.

클린업 트리오라는 걸 생각하면 뜻밖이지만, 아주 이상한 오더도 아니었다. 최민석은 최근 2경기 연속 무안타. 거기에 재작년까지는 2번 타순에서 테이블 세터를 하고 있었으니까.

‘저놈 멘탈은 은근히 거물이란 말이야…….’

보내기 번트를 반긴다는 듯이 차분하게 맞혀주는 투구에 장기석이 허를 내둘렀다.

생각해보면 지금 상황 자체도 상당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노린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클린업 트리오와의 정면 승부를 모조리 흘려보낸 셈이 아닌가.

지금까지 최태웅이 맞았던 위험한 타구를 생각해보면 죄다 피지컬로 윽박지르는 스윙에서 나왔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가장 큰 위기는 이미 넘어갔다고도 볼 수 있는 일…….

“어? 또 거른다고?”

6번 타자를 놓고 나온 사인에 장기석의 표정이 살짝 애매하게 변했다.

무사 1, 2루에서 보내기 번트를 맞혀주었으니 1사 2, 3루 상황. 1루가 비었으니 마저 채워 넣고 하위 타선을 상대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최태웅은 특히 땅볼 유도가 많은 투수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괜찮으려나? 만루는 그 자체로 투수한테 주는 압박이 있는…… 아니, 나 참. 지금 누구 멘탈을 신경 쓰는 건지.

“베이스 온 볼스!”

기어이 만루를 채운 뒤. 야수들은 주자가 이동하는 사이에 조금씩 몸을 긴장시켰다. 자기 실수로 기록이 박살났다는 소리를 듣는 건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장기석의 볼살이 별안간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가법게 몸을 움직이다가, 다음 타자인 박용진과 코치가 속닥거리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스퀴즈?’

당연히 배팅 서클에서 여기까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릴 리는 없었다. 입모양을 흘깃 보는 순간에 자연스럽게 그 단어가 떠올랐을 뿐이다.

‘에이,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아웃 카운트를 바쳐가면서 3루 주자가 득점할 수 있도록 굴리는 것이 스퀴즈 번트다. 아웃 카운트가 늘어난 시점에서 진루타에 불과하므로 안타로는 기록되지 않는다. 노히트는 유지된 채로 실점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평범한 상황이라도 스퀴즈는 비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물론, 자기 팀이 성공시켰을 경우는 예외겠지만.

대기록이 걸린 상황에서 스퀴즈로 똥물을 뿌린다면 폭동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시발. 그런 걸 생각할 놈들 같았으면 애초에 아까 번트도 없었지.’

마른침을 꿀꺽 삼킨 장기석이 재빨리 내야진에 사인을 보냈다. 내야수들도 스퀴즈 번트는 생각을 안 했는지 순간적으로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무리수 둬봤자 자기들만 손해지……. 대준다니까 일단 먹고 가자. 하나만 빼라.’

지금은 조금 특수한 상황인지라. 이례적으로 장기석이 코스에 대한 지시를 했다.

스퀴즈라고 해봐야 사실, 미리 대비만 한다면 위험할 것도 없었다. 제대로 성공시키려면 번트결과를 확인하기도 전에 3루 주자가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타이밍만 정확히 읽어서 공을 뺀다면 스퀴즈는 거의 무조건 실패한다. 포수가 공을 받은 시점에서 3루 주자는 절반 넘게 달려왔을 텐데, 무슨 수로…….

‘어?’

장기석은 순간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스퀴즈가 우려되니까 공 하나 빼보자는 사인에 최태웅이 고개를 가로저어서였다.

정말로 기막힌 것은 그 다음 행동.

다시 사인을 교환할 새도 없이, 최태웅이 투수판을 밟았던 것이다.

‘미친? 한복판!’

따악!

귀싸대기를 후려갈기는 상황에 경악하는 찰나.

장기석의 예측과는 다르게, 박용진의 방망이가 벼락같이 뻗어나왔다.

흙이 패일 정도로 맹렬하게 처박힌 땅볼이 총알처럼 쏘아져 나간다.

3루수가 곧바로 몸을 날렸으나, 스퀴즈에 대비해서 전진해 있던 것이 발목을 잡았다. 가까운 만큼 반응이 늦어진 탓에 글러브 끝으로 막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너!”

“홈은 빠듯해! 2루! 병살 된다!”

“……!”

비명이 터져나오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 최태웅이 유격수보다도 빠르게 떨어진 공을 주웠다. 다른 내야수들과 달리, 스퀴즈 따위는 털끝만치도 생각하지 않은 듯한 기민한 반응이었다.

“아웃!”

“아웃!”

“……!”

“이야아아아!”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명색이 프로. 허겁지겁 던진 공을 떨어트리는 실책 따위가 연달아 일어나지는 않았다.

병살타로 이닝이 종료되자, 쩌렁쩌렁한 환호성이 경기장을 뒤덮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봤어? 봤어? 공 몇 개나 던졌는지 봤냐고.”

“왜, 또 번트 대고 앵겨보지! 병신아, 우리 태웅이 형이 이런 사람이야!”

노히트 이닝이 연장되었다는 희열은 별개.

살다살다 뭐 이런 판이 다 있나 싶을 만큼 이색적인 이닝에 엘리펀츠 팬들은 신나서 앉아 있질 못했다.

성강호야 실책을 등에 업은 기습 번트 두 개로 출루했고, 서성일은 몸에 맞는 공. 6번 권영철은 고의사구. 최민석의 타석에서는 보내기 번트를 하도록 일부러 맞혀주었으니…….

3아웃을 잡을 동안, 실제로 승부에 쓴 공은 하나밖에 안 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너 뭐야? 스퀴즈 안 할 거 어떻게 알았어?”

벤치로 돌아온 장기석이 아연한 얼굴로 다그치듯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대뜸 공부터 던진 짓거리에 잔소리를 퍼부어야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 떠나서 어떤 판단으로 그런 플레이를 했는지 자체가 순수하게 궁금했다.

“그냥 뭐. 지금 이 타이밍에 그런 짓거리 했다가는 욕먹는 정도로 안 끝날 거 아녜요. 그래서 그랬죠.”

“야, 그렇다고 안 하리라는 법도 없잖아? 대단한 거 해보자는 것도 아니고, 공 하나 빼보라고 한 것뿐인데…….”

으르렁거리는 장기석의 태도에 최태웅은 살짝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아슬아슬한 상황이라서 막무가내로 밀어 붙였을 뿐.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나 빼봤을 터였다. ‘어떻게 알았느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도저히 납득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로에 올라온 뒤부터 이런 상황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언제까지나 순간순간만 모면할 수도 없는지라, 최태웅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둘러댔다.

“사실은요. 진짜 스퀴즈였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스퀴즈 당한다고 무조건 실점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뭐?”

“안 그래도 야수들 속으로 우왕좌왕했잖아요. 저쪽 개수작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스퀴즈인지 타격인지 고민하게 만들면 손발만 꼬여요. 그럴 바에는 아예 확률 반반에 걸고 후딱 끝내버리는 게 낫지 싶었어요. 9회도 남았으니까요.”

“…….”

잠자코 듣던 장기석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꾸역꾸역 둘러대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말의 아귀가 들어맞았던 것이다.

보통 신인은 자기 앞가림하기도 버거워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무슨 얼어죽을, 상대 팀 페이크에 야수들이 우왕좌왕할 것까지 배려한 거라고? 그게 말이 돼?

“오케이. 저는 그럼 이만.”

“응? 갑자기 어딜?”

“공수 교대잖아요. 이번에 9번 선두예요.”

보통 같으면 대타를 내보낼 상황.

그러나 최태웅은 제대로 된 투구는 아직 10개도 하지 않았다. 불펜이 미어터지는 것도 아니고, 이러한 상황에서 투수 한 명을 더 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놈 타석에 그냥 들어오네.”

“당연하지! 세 명만 더 잡으면 신기록인데.”

“카운트 다운 해야 하나? 그러면 막 부담스러울까?”

“괜찮지 않을까? 퍼펙트게임 같은 거 할 때도 후반에는 다 기립해서 박수치고 그러잖아.”

최태웅이 터벅터벅 타석에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양측 관중이 상반된 의미로 술렁거렸다.

재규어즈는 기록 경신을 막아야 한다는 초조감으로. 엘리펀츠는 오늘 안에 새로운 역사를 목격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열과 기대감으로.

단일 리그였던 10여 년 전이라면 모를까. 2개 리그로 갈라진 시점에서 투수가 타석에 서는 모습을 보는 일은 드물지도 않았다.

요컨대, 최태웅의 타격에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은 몇 없다는 것이었다.

‘본인도 별로 칠 마음은 없어 보이고.’

포수인 이도환은 자신이 선두타자로 나설 9회를 생각하며 착잡해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타자의 자세를 살폈다.

위치는 홈 플레이트에서 가장 먼 타석의 끝.

무릎은 쫙 편 채로 방망이도 어깨에 얹은 것이, 타격 의지 자체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기야. 초등학교 때 야구를 그만뒀다가 성인된 후에 시작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타격까지 두 우물을 팔 여유는 없었을 터. 어차피 이기고 있으니 쓸데없이 휘둘러서 손끝 감각에 영향을 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퍼억! 퍼억!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처음에는 140km/h의 한복판 직구. 진짜로 칠 마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는 같은 코스에 130km/h.

‘이닝이 바뀌었으니까 저쪽 야수들도 머리가 좀 식었을 텐데. 그러면 평범하게 정면승부 해야 하나? 느린 공이 그렇게 타이밍 잡기 어렵다면 차라리 투 스트라이크를 주고? 하지만 그게 노림수라면…….’

투수의 타석을 날로 먹는 것쯤이야 흔히 있는 일.

그런지라 이도환이나 투수의 머릿속은 다음 타자나 9회 말에 대한 구상으로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최태웅이 홈 플레이트 쪽으로 한 발짝 다가온 것조차 못 알아차린 것은 빼도박도 못할 실책이었다.

‘……이 새끼! 설마?’

3구. 투수조차 완전히 넋 놓고 팔을 휘두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구부러지는 최태웅의 무릎과 팔꿈치를 보고서, 이도환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고 보니.

가끔 있다.

첫 타석이라는 걸 이용해서.

타격 못하는 시늉으로 허술한 공을 유도하는, 지랄 같은 꼼수를 부리는 놈이─

***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

풀이 죽어서 벤치로 돌아온 최태웅에게 장기석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뭐한 거냐?”

“……음. 만화에서 보니까, 투수가 이러면 ‘칠 생각 없구나’ 하고 쉬운 공 주고 그러길래요. 역시 현실은 다르네.”

“쉬운 공 왔잖아. 저거 안 보여? 131km/h?”

“131이면 강속구죠……. 7~80짜리에도 프로 타자들이 노히트로 휙휙 나가떨어지는 판국에…….”

“…….”

장기석은 왠지 울컥했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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