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76화 (76/90)

< 괴물 배터리 -077- >

077.

징크스인지, 심리적인 문체인지, 투구수 절약을 위한 노하우인지. 이유야 몰라도, 최태웅이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만 전력투구한다는 점은 통계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유를 알면 당연히 좋겠으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결과만이라도 써먹으면 그만.

김대석은 이를 악물고 다음 공에 대비했으나…….

부우웅!

“스트라이크 아웃.”

“와아아아아!”

전광판에 연달아 찍힌 150km/h의 표시에 관중석이 환호에 휩싸였다.

염두에 두고 있던 공이지만, 역시 150은 만만한 스피드가 아니었다. 견제사의 충격 때문에 아주 조금 집중력이 흐트러졌을 뿐인데도 정면승부에 눌리고 말았던 것이다.

-감독님의 선견지명 ㅋㅋㅋㅋ 이걸 위해서 주자가 있을 때 등판시킨 것이다!!!!

-견제사 ㅋㅋㅋㅋ 아웃 하나 날로 먹음 ㅋㅋㅋㅋ

-그나저나 150km/h를 두 개나 던지다니… 태웅이 형한테 실망임… 벌써 초심 잃은 듯.

-ㅉㅉㅉㅉ 데뷔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서 금방 유명해진 놈들은 안 돼… 허파에 바람 들어간 거 봐라…

-수 싸움하기 귀찮아진 고야? 힘으로 찍어누르게?

-미친 놈들앜ㅋㅋㅋㅋㅋ 열심히 던진 애한테 왜 괜히 지랄이야ㅋㅋㅋㅋㅋㅋ

-시발ㅋㅋㅋㅋㅋ 대충 던진다고 욕할 때는 언제고 쎄게 던져도 지랄이야ㅋㅋㅋㅋㅋ

좋다고 낄낄거리는 엘리펀츠 팬들과 반대로. 재규어즈 팬들은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걸로 15와 1/3이닝 노히트.

8회와 9회가 남았으니, 노히트 기록 갱신이 오늘 안에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대형사고 터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노히트가 뉘집 개 이름이냐? 그냥 톡 치고 한 번만 나가면 되는 거잖아, 톡 치고!”

“최태웅이 저 새끼도 내가 볼 때는 초조해 지금. 150 연속으로 뻥뻥 찍히는 거 봐봐. 기록이 코앞에 있으니까 대충 못 던지는 거지.”

“초구랑 2구는 평소랑 똑같던데……. 피치아웃도 차분하게 잘 하고…….”

하지만 정작 그 기록과 직접 맞붙어야 하는 재규어즈 벤치의 분위기는 달랐다.

견제사로 한 방 먹어서 얼떨떨한 것도 잠시.

공수가 교대하는 사이에, 잠시 가라앉았던 공기에는 서늘한 냉기가 덧씌워졌다.

“기록이라는 게 다 그렇지. 깨질 수 있어. 아니, 한 번씩 깨져줘야 야구 보는 맛이 나는 거고.”

“…….”

“그런데 인간적으로…… 우리 팀 차례에서 깨지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우리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아니잖아? 호권 선배 가시는 길에 카펫은 못 깔아드려도 흙탕물은 튀기지 말아야지.”

“맞습니다!”

대기록의 희생자가 되어 두고두고 자료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굴욕이다.

하지만 재규어즈의 경우에는 이것이 단순한 굴욕에서 그치지 않는다. 17이닝 노히트는 재규어즈의 암흑기를 지탱한 프랜차이즈 진호권의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구, 참 내. 뒤에서는 틈만 나면 나 씹는 거 다 아는데 가식들 떨고 앉아 있네…….”

옆에서 듣고 있던 진호권이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머쓱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자기 이름이 파이팅의 명분으로 이용되는 것이 영 민망했던 것이다.

“헛소리들 하지 말고. 기록 깨지면 폭동 일어날까 봐 무서워서 그런다고 해. 나야 올해 은퇴해버리면 그만이여.”

“……형님. 기껏 파이팅 넣고 있는데 그렇게 초를 치셔야겠습니까?”

“아니, 왜? 어금니 꽉 물고 뛰기에는 이러는 게 훨씬 자극적이지 않어?”

“…….”

이러니저러니 간에. 재규어즈는 최태웅이 데뷔한 이래 가장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온 ‘팀’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번 3연전 안에 최태웅이 한 번도 등판하지 않을 가능성은 낮았다.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교류전이라, 투수가 기록을 세우기 조금이라도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걸 떠나서도 지금까지 보여준 최태웅의 피칭은 팀 승리에 기여를 하고 있었다.

명단에서 잉크도 안 마른 신인을 일일이 현미경 분석하지는 않으나, 그것도 다 인지도 나름. 아무리 루키라도 이렇게까지 날뛰고 있으면 분석팀이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결과만 보자, 결과만. 최고 구속이 몇이건 간에, 투 스트라이크 이전에는 130km/h 이하다.’

별다른 사건 없이, 다시 공수가 교대되면서 찾아온 8회 말의 재규어즈 공격.

타석에 들어간 성강호가 몇 번이고 신중하게 배트 그립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최태웅의 초구.

대다수가 예상했다시피, 이제는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대담무쌍하게 존을 파고드는 저속 체인지업.

“─어어?”

“……!”

한순간.

목젖이라도 찔린 것처럼, 그라운드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엘리펀츠 내야진은 프로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감전된 것처럼 굳어서 한 박자 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성강호! 기습 번트! 뜁니다! 뜁니다!

-최태웅 선수가 직접! 이거 아슬아슬한데요? 그냥 보나요? 보나요?

-아, 판단이 좋았네요. 그대로 파울 라인을 벗어납니다. 완전히 엘리펀츠 내야진의 허를 찌른 기습 번트였으나 무산되고 맙니다.

반쯤 엉거주춤하게 선 야수진의 표정에 기막힘이 떠올랐다. 명색이 클린업 트리오인 3번 성강호가 대뜸 이런 짓거리를 해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야이 씨발 새끼야! 똑바로 안 해?”

“미쳤냐? 야구 그따위로 할래?”

“똑바로 치라고 새꺄! 개수작부리지 말고!”

당연하게도 엘리펀츠 응원석에는 완전히 폭탄이 떨어졌다. 여차하면 그라운드로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얼굴 시뻘게진 팬 몇몇이 난간을 붙들고 으르렁거릴 지경이었다.

주자를 다음 루로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자 본인이 살아남기 위한 세이프티 번트.

1루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 타구’를 만들어낸다기보다, 내야수가 미처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한 틈에 출루를 노리는 기술.

야구 규칙이 허용한다고 해서 이걸 당하고도 불쾌해하지 않는 선수나 팬은 없다. 이게 꼼수냐 기술이냐를 떠나서, 정면승부를 피했다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이거는…… 홈구장이기에 그나마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봐야겠지요?

-그렇죠. 엘리펀츠의 홈구장에서 이런 플레이를 시도했다면…… 어우. 물병 날아오고 뭐하고 해서 경기가 중단됐을지도 모르는 정도의 일이거든요.

-그렇다고 성강호 선수가 뭘 잘못한 건 아닙니다. 세이프티 번트도 엄연히 야구의 기술이거든요. 다만 타이밍이 너무나도 민감하죠.

-예. 아무래도 최태웅 선수가 대기록을 진행 중인 상황이니까요. 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하는 플레이를 지탄할 수는 없지만, 자칫 기록을 방해하려고 번트 시도했다는 오해도 받을 수가 있는 상황이거든요.

다행히도 그라운드에 물병이 날아온다거나 하는 사고는 없었으나. 분위기가 지나치게 어수선해진지라 자연스럽게 경기가 조금 지연되었다.

‘내가 아니라 야수를 흔들겠다?’

마운드의 흙을 발로 꾹꾹 밟으면서, 최태웅은 감탄한 눈으로 타자와 내야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떤 투수를 상대할 때에도 통할 법한 일이지만, 자신에게는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어찌어찌 삼진도 많이 잡는 투수가 됐지만, 대부분의 아웃 카운트는 결국 그라운드볼이었기 때문이다.

“야, 성강호. 작작 좀 해라?”

장기석이 문득 짜증스럽게 으르렁거렸다. 타석에 돌아온 성강호가 느닷없이 번트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처음부터 번트 자세로 세이프티를 하는 경우는 없다. 내야진이 미리 대비하는 상태에서 번트로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시비밖에 안 된다는 건데…….

“어따 대고 감 놔라 배 놔라야? 니 똥구멍이나 잘 닦아, 새꺄.”

“뭐얌마? 이 새끼가 미쳤…….”

“사담 금지. 더 떠들면 경고다.”

목소리에서 날카로운 감정을 느꼈는지 심판이 곧바로 중재했다.

도발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상대할 수는 없었던지라, 장기석이 혀를 차면서 내야진에 신호했다.

‘통상 수비. 번트 신경 쓰지 말라고. 아니 뭐, 그게 당연한 얘기이기는 한데…….’

투수판을 밟으면서, 최태웅은 약간 난처한 기분에 빠졌다. ‘매의 눈’에 보이는 스트라이크존은 분명히 타자가 번트를 해올 거라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기적적으로 번트가 먹히면 좋고. 파울이 되어도 상관없고. 최악의 경우에는 개죽음 당해도 내야진을 혼란시키는 버림패로 만족하는 모양인데…….

상식적으로 이런 괴랄한 작전을 진행하고 있다고, 내야진에게 무슨 수로 납득시키나. 그런 얘기를 꺼냈다가는 진심으로 ‘독심술 하는 거 아니냐?’라고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

따악!

“……!”

“이런 미친!”

제2구. 변함없는 슬로우볼에 성강호가 진짜 번트를 대자, 3루수가 흠칫하면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라인을 따라 절묘하게 굴러가는 공을 주워드는 맨손이 있었다.

그가 놀랄 새도 없이, 최태웅이 침착한 몸짓으로 1루에 공을 뿌렸다. 그러나…….

터억!

“큭!”

사이코틱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플레이에 어지간히 당황했던 걸까. 송구의 방향은 정확했으나, 공이 1루수의 미트 끝을 맞고 굴절되었다.

“……!”

찰나의 순간.

성강호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1루수의 시선이 공에서 떨어져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잃어버렸구나!’

그렇게 긴 펌블이 아닌지라 순간적으로 갈등했지만, 머리보다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정상적인 플레이였다면 어차피 1루에서 죽었을 몸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세이프!”

“……!”

1루수가 뒤늦게 공을 찾아서 송구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성강호의 손이 베이스를 찍었다.

찌르르르…… 그라운드의 공기가 한순간 경련을 일으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야이, 미친 새끼야!”

“죽여버린다!”

“인생 그따위로 살고 싶냐?”

“씨발! 야, 성강호! 방길 조심해라!”

엘리펀츠 원정 팬이라고 해봐야 4분의 1 정도밖에 안 되거늘. 구장에 쩌적쩌적 금이 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흉포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방금 출루가 실책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면 진짜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살기등등한 기세였다.

물론 그 야유에도 오금이 저렸으나……. 성강호는 다른 의미에서 또한 심장이 벌렁거렸다. 공을 놓자마자 수비하기 위해 대쉬해오는 최태웅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미친 놈 아니야? 어떻게 거기서 기다렸다는 듯이 번트 수비를 해?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경험이 없어서 멋모르고 대쉬했는데, 소 뒷걸음에 쥐 잡은 건가? 아니지. 2군에서도 번트 수비가 좋았다고는 들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3번 타자인 자신이 번트를 함으로써 내야 수비를 패닉에 빠트리려는 계산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땅볼 아웃이 돼서 그렇지, 통계에 따르면 최태웅을 상대로 만들어낸 타구는 대개 질이 좋았다. 그러므로 내야가 흔들리면 대량 안타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묘수(妙手) 아닌 괴수(怪手) 였다.

“태웅아. 진짜 미안하다. 방금 거 진짜로 완전히 아웃 타이밍이었는데…….”

잠시 타임이 걸린 사이. 1루수인 이태주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당황했다고는 하지만, 야구를 하면서 당황할 만한 상황이 어디 한둘인가. 공을 못 잡은 것까지야 그렇다고 쳐도, 공을 잃어버려서 2루까지 내보낸 것은 용납될 만한 플레이가 아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프로로서 수준 미달이었다.

“그렇긴 하죠. 그럼 저 주자 들어오면 선배 책임인 거네요.”

“그래도 나 아니었으면…… 어?”

이태주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선배가 먼저 사과하면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노히트 깨진 것도 아닌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흐름 아닌가?

“정말로 미안하시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셨으면 하는데요.”

“……부탁?”

“예. 제가 아무래도 곱게 자라서 맷집이 좀 약해가지고요. 누구한테 맞아본 적이 거의 없거든요.”

“……?”

뜬구름 잡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태주는 다음 타석에 바로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퍼억!

“히트 바이 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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