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75화 (75/90)

< 괴물 배터리 -076- >

076.

‘저놈, 오늘따라 왜 이래?’

포수 장기석이 느낀 것은 아주 약간의 위화감과 짜증이었다. 오늘따라 서기찬이 사인에 고개 젓는 횟수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직접 볼 배합을 하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물론, 불만이라고 할 것까지야 없었다.

결국에는 타자의 약점을 적절하게 찌르는 배합이 나왔으니까. 고개를 젓는 건 엄연한 투수의 권리이기도 하고.

장기석이 느낀 위화감은 단순한 낯섦이었다.

서기찬이 내성적이라서 이런 적이 거의 없었다는 건 둘째 문제. 파이어볼러인 탓에 수 싸움을 하는 타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 변화의 핵심을 가장 먼저 파악한 것은 오히려 재규어즈 쪽이었다.

7회 말. 아웃 코스에 헛스윙을 한 정승철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벤치에 돌아오며 말했다.

“야, 내 타격 분석표 좀 가져와 봐.”

“……투구 분석이 아니라요?”

“그것도 일단 주는데, 타격 분석표부터. 아니, 내 것만 말고 우리 선발 타자들 것까지 전부.”

앉은 자리에서 분석표를 휙휙 훑어본 정승철은 눈썹이 곤두섰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타석에서 느낀 노골적인 낌새가 조금도 빗나가질 않았던 것이다.

“뭐여, 시벌? 미친 새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쿨존에다가만 꼬라박고 있잖아.”

“예? 뭔 소리예요?”

“뭔 소리는 뭐가 뭔 소리야. 앞에 세 명 봐봐. 타율 제일 낮은 코스에만 그냥 꽂고 있잖아.”

“…….”

재규어즈 타자들은 ‘그러고 보니’ 하면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투수가 타자의 약점을 노리는 건 당연하다. 약점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는데 과거 통계를 참고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이건 뭐 정도가 있지.

전과(全科)를 고스란히 베껴서 숙제하는 초딩도 아니고. 하나부터 열까지 타자가 제일 약한 코스와 구종‘만’ 던지는 경우가 어디에 있나.

“이거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냐? 뭐 낚시하는 거 아니야?”

“낚시면 뭐 어쩔 거야? 실제로 그렇게만 날아오고 있는데.”

“장기석 선배 스타일이 아닌데……. 저기 투수가 볼 배합하고 있는 건가?”

“고삐리도 이렇게 유치하게는 안 하는데…….”

흔히 공을 ‘보고 때린다’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프로 수준의 공을 인간의 반사신경으로 ‘보고 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떻게 현실적으로 타격이 이루어지느냐 하면, 무식한 표현으로 반복 학습의 결과다.

‘여기다!’ 하는 순간에 반사작용만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공의 궤적이나 타이밍 등등을 몸으로 외워버린 것이다.

자신의 약점을 알아도 쉽게 메울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스윙 동작을 몸으로 외우는 과정에서 고정된 버릇이라, 섣불리 건드렸다간 전체적인 밸런스가 흔들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투수는 단순히 통계에 나오는 ‘쿨존’만 찌르면 되는 게 아닌가 싶지만…….

따악!

“와아아아아아아!”

강렬한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가 펜스를 때린다.

펜스 플레이는 둘째 치고, 너무 잘 맞은 타구라서 오히려 1루까지밖에 뛰지 못할 정도였다.

‘와, 진짜 딱 쿨존에만 오네. 요새는 초딩도 이렇게까지 단순하게는 안 하겠다.’

직접 때리고 나서도 어이가 없었는지, 이종석은 1루에서 그저 실실 웃고 말았다.

쿨존이라는 것도 수많은 코스와 수많은 구종에 대응하려다 보니 생기는 맹점일 뿐. 처음부터 예측하고 타격 영점을 옮기면 못 칠 공도 없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요소가 뒤엉키니까 야구란 스포츠는 성립하는 것이다.

따악!

“……!”

다음 타자에게 던진 초구까지 멀찍이 날아가자, 장기석이 흠칫해서 마스크를 벗고 일어섰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파울존에 떨어졌으나, 타격할 때의 느낌이 확 달라졌다. 마운드 위의 서기찬도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볼!” “볼!” “볼!”

“베이스 온 볼스!”

어째서 나쁜 예감은 어긋나는 적이 없을까.

장기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미묘하게 스트라이크존에서 빠지기 시작한 건 둘째 치고, 평소처럼 공에 체중이 실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저놈의 두부 멘탈하고는……. 그거 하나 맞았다고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가나…….’

한두 번 있었던 패턴도 아닌지라. 마운드에 올라가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타임이 걸렸다. 그라운드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유승혁 감독의 뒤를 최태웅이 뒤따르고 있었다.

“어? 어어?”

“최태웅? 최태웅이지?”

“지금 나오는 거야? 이 타이밍에?”

“이야아아아아아아!”

최태웅이 그라운드에 들어서자마자, 관중석에서는 쩌렁쩌렁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후발투수’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한 번 등판할 때마다 여러 이닝을 먹어온 최태웅이다. 웬만한 팬은 토네이도즈에서 데려온 목적 자체가 불펜의 페이스 메이커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기찬이 7회 말에 올라오는 걸 보고 오늘은 글렀구나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중간 투입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간식이 훨씬 달콤한 법이라, 경기장 전체의 공기가 아이돌 콘서트장처럼 찌르르르 울려댔다.

“으이구. 소갈머리 없는 놈. 네 구위면 한복판에 던져도 반은 먹고 들어갈 건데……. 왜 그렇게 자신감을 못 가지냐?”

“죄, 죄송합니다.”

“7회는 완전히 잊어버려. 네가 지향해야 되는 공은 6회에 던진 거야. 그 감각이 어땠는지 계속 되새기라고. 알간?”

“예…….”

주위의 환호성이 자신에 대한 야유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서기찬은 완전히 주눅이 들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

그와 교차하듯 마운드로 오르는 찰나. 공을 만지작거리던 최태웅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기분 탓인지 서기찬이 자신을 힐끗 원망스럽게 쳐다본 것 같아서였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리고 태웅이.”

유승혁 감독이 이번에는 최태웅을 보며 말했다.

“부담스러운 상황에 대뜸 올려서 미안하다만. 그냥 평소처럼…….”

“네? 무슨 부담이요?”

원 포인트 레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과분하고. 집중력이나 잡아줄 요량으로 한 마디 꺼냈던 유승혁 감독이 최태웅의 어리둥절한 눈빛에 멈칫했다.

“주자 두고서 올라온 적은 없었잖냐. 기록 보니까 2군에 있을 때부터 쭉…….”

“에이, 저거 들어가 봤자 어차피 제 자책점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뭔 상관이에요. 역전되는 것도 아니고.”

“……그, 그렇긴 하지.”

“거기다가 지금 오히려 상황 좋지 않아요? 가뜩이나 기록 중인데. 땅볼로 병살 잡으면 오히려 아웃 카운트 하나 날로 먹잖아요.”

“…….”

틀린 말은 아니다. 위기관리능력이라는 것도 있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못 잡을 거라면 타자한테만 집중하는 편이 당연히 나으니까.

어차피 부담 덜어주는 차원에서 ‘주자 들어와도 되니까 자기 공을 던져라’라고 해둘 생각이었지만.

자기 입으로 먼저 저런 소리하는 걸 들으니까 왜 이렇게 얄밉지?

-아……. 경기장이 들썩이고 있는데요. 최태웅 선수가 연습투구를 시작했습니다. 3경기 출장에 14.2이닝을 소화했고요. 1승 2세이브. 평균자책점 0, 볼넷 0, 피안타 0. 모두가 아시다시피 연속 이닝 노히트를 이어나가는 화제의 신인이죠?

-개인적으로는 조금 뜻밖의 타이밍이네요. 저는 아무래도 유승혁 감독이 기록 진행에 대한 배려를 해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건 점수 차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점수도 점수지만, 기록을 보면 최태웅 선수가 처음부터 주자를 업고 던진 적이 없습니다. 다만, 최태웅 선수의 땅볼 생산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맡겨볼 만한 상황이라고는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유승혁 감독은 최태웅 선수가 기록 진행 중인 걸 연연하지 않고 평범하게 선수 기용했다는 건가요?

-예, 사실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기록이라는 게 까다롭기도 합니다. 투수가 7회까지 100개를 던졌으면 보통은 교체 타이밍인데. 노히트나 퍼펙트 중이라면 그럴 수만도 없거든요.

-그렇죠. 관중석에서 완전히 폭동 나겠죠.

-뜻밖이라고 말씀드렸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이렇게 뚝심 있는 기용을 지지합니다. 선수의 모든 기록은 결국 팀에 승리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거거든요. 기록을 배려하느라 선수기용이 흐트러진다면 본말전도가 아니겠습니까?

-아, 확실히 그것도 그러네요.

***

퍼억!

“스트라이크!”

여느 때처럼 대담무쌍하게 80km/h짜리 공을 꽂아넣고 난 뒤. 최태웅은 묘한 기분으로 아랫입술을 할짝거렸다. 타자의 분위기가 시작부터 상당히 날이 선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히 지금까지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보통은 ‘순 똥볼 아니야?’라면서 우습게보다가 이닝이 흘러갈수록 ‘어어어?’하면서 조금씩 심각해졌다. 처음부터 긴장하고 나온 타자도 막상 타석에서 공을 보면 ‘뽀록 아니야?’라며 오히려 맥 풀려 하곤 했다.

광역 어그로를 끌어서인지, 기록 때문인지.

첫 타자부터 박진효처럼 바짝 긴장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데뷔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놈이 이런 표현을 하긴 쑥스럽지만……. 격세지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음? 견제?’

2구를 던지기 전.

오랜만에 사인이 나와서 힐끗 봤더니, 주자들이 무식하리만큼 리드를 길게 잡고 있었다.

퍼억!

“세이프!”

리드는 무식하게 긴데 중심이 1루에 치우쳐져 있어서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나. 더블 스틸 따위보다는 시비를 거는 게 목적이라고 봐야 했다.

‘확실히 분석 깨나 하기는 했네.’

최태웅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딱히 유일한 출루자인 박진효가 도루에 성공한 것을 참고할 필요까지도 없다. 투수의 공이 느리면 도루 성공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상식이니까.

저들의 입장에서는 물론 실제로 도루를 할 필요까지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무기는 ‘다채로운 구속’, 그 자체다.

요컨대, 너무 느린 공을 던질 수 없게 하는 것만 해도 무기 일부를 봉인한 셈이 된다만…….

……퍼억!

“스트라이크!”

전광판에 69km/h의 스피드가 찍힌다.

설마 더블 스틸 시늉으로 압박까지 한 상황에서 ‘더’ 느린 공을 던질 줄은 몰랐는지. 타자도 주자도 멀뚱히 선 채로 눈만 끔뻑거리고 말았다.

“와……. 진짜, 애새끼가 어쩜 저렇게 획기적으로 싸가지가 없을 수 있을까…….”

“예?”

“자기 자책점 아니니까 주자 들어와도 상관없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나벼…….”

“…….”

유승혁 감독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명치 부근을 쓰다듬었다. 프로야구 감독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기 마련인 스트레스성 위경련이 갑자기 도질 것 같아서였다.

‘이번에는…… 건드려보시겠다?’

쿨존과 핫존의 색깔이 균등해지는 걸 보고, 최태웅은 또다시 피식 웃었다.

이미 원 아웃인 상황에서 보내기 번트를 댈 리는 없으니까. 무슨 수작을 부릴지는 뻔한 일이었다.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자신이 그 작전을 간파했다는 것과, 지금이 ‘투 스트라이크’라는 것이다.

가볍게 사인을 보낸 직후, 최태웅이 투수판을 밟았다.

-어? 뜁니다? 더블 스틸? 아니, 런 앤 히트인가요?

-배터리도 읽었어요! 뺍니다! 뺍니다!

퍼억!

타자의 방망이가 닿지 않는 바깥쪽.

포수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송구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아주는 절묘한 피치아웃.

최태웅이 독심술이라도 하는 듯 하다는 생각은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다만. 장기석은 새삼스럽게 가슴이 다 덜컥했다.

퍼억!

“아웃!”

“와아아아아!”

만만찮은 리드에 도루급의 스타트였으나, 주자로서는 기껏해야 B+급 정도나 될 놈들이다.

기막힐 정도로 딱 맞물린 타이밍만 믿고 뿌린 송구가 3루수 미트로 빨려 들어가 2루 주자를 자동 태그했다.

아랫도리가 다 서늘할 정도로 간발의 차이.

이 순간. 루심의 역동적인 제스처를 보는 것은 포수로서 가장 짜릿한 일 중 하나였으나…….

‘진짜, 귀신 같은 새끼…….’

피치아웃 탓에 아무것도 못한 타자가 아연한 얼굴을 했으나. 사실은 장기석이야말로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로 전광판에 찍힌 숫자 하나 때문이었다.

-150km/h.

“간 떨어져서 죽겠네. 미친, 똥볼만 던지던 새끼가 뭔 150짜리 피치아웃을 하고 지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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