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75- >
075.
당연한 얘기지만, 홈런 하나에 박승호가 강판당하는 일은 없었다.
베테랑에 대한 예우니 뭐니 하는 건 둘째 문제. 타선이 악착같이 물고 늘어져서 애먹었다 뿐이지, 이만하면 딱히 무너진 것 자체도 아니었으니까.
따악!
“아웃!
결국은 그대로 5회를 마무리해서 5이닝 2실점.
그럭저럭 호투한 축에는 들겠지만, 투구수만 헤아려도 딱 거기까지였다.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북부 리그와의 교류전. 하필 6회 선두타자가 투수인지라, 계속 던질 것처럼 위장하는 의미도 없었다.
“야야, 이러면 최태웅 올라오려나?”
“에이, 점수 차이가 꼴랑 2개인데.”
“저번에도 1점 차에 한 번 올라왔잖아. 4이닝이나 남았는데 가능성은 있지 않아?”
“나는 좀 넉넉하게 올라왔으면 좋겠는데. 기록 중이잖아. 부담 없는 게 당연히 좋지.”
재규어즈의 홈구장은 불펜이 실내에 있어서 누가 몸을 푸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아이스팩 감고 나타난 박승호를 보면 교체 자체는 기정사실. 나름대로 기대되는 바가 있는지라 6회 초 내내 관중석이 술렁였는데…….
“서기찬?”
“아이 씨. 뭐냐? 왜 저 새끼야?”
“유승혁! 미친 거 아니야?”
예상 밖의 투수가 올라오자, 원정 관중들이 불만스럽게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차라리 무명의 신인이기라도 하면 낫지.
서기찬은 150km 후반대의 강속구를 구사하는 걸로 어중간한 인지도가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정치인 스캔들보다는 톱스타 열애설이 더욱 이슈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똑같이 시합을 말아먹어도 다른 투수보다 나쁜 쪽으로 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마는 것이다.
무엇보다, 통계적으로 봐도 팬들의 인상이 썩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서기찬은 데뷔 이래로 1군에서 무실점으로 내려간 적이 한 번밖에 없을 정도니까.
엘리펀츠 불펜은 최태웅의 합류 이후로 제법 숨통이 트인 상황. 얼마든지 추격의 가능성이 남은 2점 차 중반에 꺼낼 만한 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벼르는 놈을 꺼내다 줄 수도 없잖아.’
머리 위의 아우성이 거슬렸지만, 유승혁 감독은 꿋꿋하게 한 귀로 흘렸다.
기록이란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러너스 하이 같은 상승효과를 낼 때도 있지만, 대개는 긴장감으로 팔다리가 얼어붙는다. 깨지는 순간에, 열에 아홉은 밸런스가 와르르 무너진다는 문제도 있다.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흙탕물 못 튀길 기록이 어디 있겠는가. 작정한 놈들 앞에 최태웅을 내세웠다가 철푸덕 넘어지면 후유증이 얼마나 갈지 몰랐다. 급하게 달린 놈은 넘어질 때도 크게 다치는 법이니까.
그리고 유망주가 최태웅 하나뿐인 것도 아니었다.
투수 하나로 야구할 거 아니라면 다른 선수도 키워야지.
물귀신 작전으로 나오는 타선에 구위로 윽박지르는 투수를 내는 건 전혀 이상한 대응이 아니다. 유망주 딱지를 붙이고 있는 서기찬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쟤 오늘은 구위 괜찮을라나 모르겠네.”
타자가 타석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불쑥 중얼거린 것은 최태웅이었다.
자기가 나갈 줄 알았다가 무산돼서 투덜대는 걸로 알았는지. 방금까지 연습투구를 받아줬던 채영선이 픽 웃었다.
“야. 인간적으로 니가 남한테다가 구위니 나발이니 주둥이 털면 안 되지. 양심도 없냐.”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너무 정곡이다 보니까 말문이 턱 막힌다.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몰라서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으려니 채영선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묵직하니 괜찮았어. 내가 볼 때는 올해 중에 거의 제일 좋아. 볼끝만 좀 지저분하면 저놈 당장에라도 포텐 터질 텐데…….”
“…….”
패스트볼이 최고 157km/h까지 나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올해 들어 가장 좋다고 했으니 못해도 155쯤은 나온다는 얘기려나.
최태웅은 일단 마음을 조금 놓았다.
불펜에서 그래놓고, 마운드에서 대뜸 이상한 공을 던지지는 않겠지.
설마 누가 자신의 피칭을 따라 할 줄은 몰랐던 지라,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유명한 메이저리그의 린스컴도 유소년들에게 제발 자기 폼을 흉내 내지 말라고까지 했다지. 이건 자신에게 최적화된 특유의 폼이라, 남이 던진다면 오히려 부상 위험이 클 거라면서.
자신의 심정도 딱 그러했다.
인터넷에서 패왕똥볼이라고 부르는 게 통하는 이유는 초능력의 서포트일 뿐. 엄한 사람이 따라한답시고 깝죽거리면 패왕은 어디로 가고 똥볼만 남게 된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놈이 그러고 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겠나. 나이를 생각하면 조만간 마(魔)의 100마일(160.9344km)을 돌파해도 이상하지 않을 놈이.
퍼억!
“볼!”
6회 말의 초구.
타자가 찔끔하리만큼 몸쪽에 붙은 공을 보자마자 최태웅은 전광판부터 돌아보았다.
“151이라…….”
저번에 오프 스피드로 체력 조절한다고 깝죽거렸을 때에는 150이 하나도 없다고 했던가? 그럼 지금 공 하나만 봐도 서기찬이 자기 말을 한 귀로 흘려듣지는 않은 듯했다. 비로소 조금 안도한 최태웅이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느긋하게 구경하기 시작했다.
퍼억! 퍼억! 퍼억!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150km대의 직구 하나에 날카로운 슬라이더 하나.
그리고 또다시 154km/h의 묵직한 직구.
전광판에 표시되는 숫자만 따지자면 명백하게 리그 톱 클래스의 위력이다. 타자도 쉭쉭거리는 파공성에 긴장했는지 몇 번이나 방망이를 고쳐잡았다.
‘오케이. 확실히 효과 있다.’
일부러인지 무의식적인 건지. 박승호 때보다 반 발짝 물러난 타자를 보고 장기석이 안도했다.
서기찬이 소심한 성격이라서 불안했으나……. 흐름을 찾아오려면 헤드샷이 나오더라도 압박해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요구한 몸쪽 공이었다. 그런데 운까지 좋아서 카운트도 가뿐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제깟 것들이 깡다구가 있어 봤자지. 150 중반까지 나오는 돌덩이가 콧잔등 앞을 휙휙 지나가는데, 뒤지고 싶지 않은 다음에야 안 물러나고 배기나.
‘여기서 오프 스피드. 바깥쪽 커브. 조금쯤은 몰려도 되니까, 존 안에만 들어오면……. 응?’
가랑이 사이로 열심히 사인을 보낸 장기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서기찬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있었기 때문이다.
‘웬일이래? 저놈이 고개를 다 젓고?’
워낙에 기가 약해서, 그라운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뭔가 거절하는 적이 없던 서기찬이다. 상대가 선배라면 더더욱.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장기석은 대수롭지 않게 두 번째 사인을 냈다.
‘그러면 몸쪽만 계속 압박했으니까, 바깥쪽에 슬라이더. 존으로 들어오다가 조금 빠지게.’
몸쪽으로 압박한 뒤에 먼 공을 던지면 같은 코스라도 훨씬 멀게 느껴지는 법.
교과서 첫 페이지에 나올 만큼 전형적인 배합이라서 오히려 꺼린 거였지만…….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면 사실 던질 수 있는 공 따위는 없다.
이번에는 서기찬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
뭔가 비윤리적인 짓을 저지른 게 아닌 한.
팬이 자기 팀 선수를 까는 이유는 하나다.
야구를 못해서. 팀이 지게 하니까.
역설적으로 말해서 환호받는 방법도 간단하다.
야구를 잘하면 된다.
“이야아아. 웬일이래? 오늘은 끗발 좀 서는데?”
“드디어 포텐 좀 터지는 건가.”
“시발, 내가 뭐랬어! 공 빠른 놈들은 언젠가 통한다니까? 기술은 익히면 되지만, 어깨는 타고나야 되는 거거든!”
고작해야 1이닝.
삼자 범퇴쯤이야 전국에서 하루에도 십수 번씩 나오는 기록이건만. 원정 관중석은 언제 처음에 야유했느냐는 듯이 조용히 들썩이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투수의 꽃은 강속구와 탈삼진.
리그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강속구로 타자를 몰아세우고 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다 시원해졌던 것이다.
“그래, 이 짜식이. 진작에 깡으로 밀어붙이라니까. 강속구 투수는 그것만으로도 축복이야. 골이 비었어도 어깨빵하듯이 지나가면 알아서 쫄아가지고 슬슬 비키거든. 머리까지 쓰면 금상첨화고.”
“가, 감사합니다.”
“15개면 1이닝 정도 더 먹을 수 있지? 감 좋을 때 적립해놔야지? 지금 기분도 뼈에 새기고.”
“예, 무, 물론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더, 던지겠습니다.”
“돌아가는 상황 봐서 언제든지 중간에라도 바꿔줄 테니까. 쫄지 말고.”
유승혁 감독이 머리카락까지 헤집으면서 북돋아주자, 서기찬은 상기된 얼굴로 끄덕였다.
유승혁이 칭찬에 인색한 감독은 아니었으나, 없는 말을 갖다 붙이는 사람도 아니었다. 1이닝 퍼펙트. 흔하디 흔한 결과였으나 과정에서 가능성을 보았으니 이런 말도 던지는 것이다.
‘새끼가, 숫기가 없어가지고…….’
새가슴 투수라는 게, 안타 맞을까 봐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 경우만이 아니다. 노린 곳에 공은 그럭저럭 꽂고 스피드도 나오는데, 자신감이 없어서 힘이 잔뜩 들어가는 케이스도 있다.
이렇게 던진 공은 스냅이 굳어서 체중 전달이 잘 안 된다. 빠르고 스핀도 있는데, 맞으면 쭉쭉 날아가는 탱탱볼이 보통 이런 것이다.
교정한다고 될 성 싶으면 누가 고생을 하나. 그게 쉽게 될 일이면 불펜에서는 날아다니면서 마운드에서 볼질하는 투수 따위는 아무도 없지.
따악!
“오라이, 오라이 !”
“뛰어라! 뛰어, 뛰어! 공 빠졌다!”
최태웅은 야구가 흐름과 기세의 스포츠라는 걸 새삼스럽게 다시 실감했다.
7회 초. 재규어즈 수비진의 집중력이 끊어지자마자 타선이 대폭발을 일으켰던 것이다.
타선이 한 바퀴를 돌면서 대거 5득점.
원정 경기라는 사실이 안 믿어질 정도로 엘리펀츠 응원가가 쩌렁쩌렁하게 그라운드를 덮쳤다.
“이야, 우리 팀 쎄네. 이래 잘하면서 왜 그렇게 가을야구는 못하고 그랬대.”
다들 재규어즈의 집요한 플레이에 스트레스라도 받고 있었던 걸까. 중반 역전이야 그렇게 드물 것도 없는 상황인데, 뭔가 불끈불끈한 희열이 벤치를 싸르르 훑고 갔다.
신인이라서 그런지, 이적생이라서 그런지. 자기가 안 나가는 경기에는 몰입을 못하는 편인 최태웅조차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재규어즈가 팽팽하던 고무줄이 끊어진 느낌이라면, 엘리펀츠는 꾹꾹 눌렀던 용수철이 튀어 오르는 분위기였다.
‘8회쯤 되면 나갈 수 있으려나? 기찬이가 지키고, 점수 한두 개 벌어지면 내 차례일 것 같은데…….’
토네이도즈 때와 비슷한 보직이다 보니, 최태웅은 요새 들어 경기 흐름에 조금 익숙해진 기분이 들었다. 물론 자신의 등판 타이밍에 관해서일 뿐이지만.
등판이 무산될 수도 있으니 연습피칭까지는 어깨 낭비인 것 같고. 워밍업쯤은 괜찮을 듯도 싶어서 불펜으로 들어간 최태웅이 살짝 눈썹 사이를 좁혔다. 이제 곧 공수 교대인데, 서기찬이 캐치볼은커녕 무슨 서류 다발이나 휘릭휘릭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서기찬이! 뭐하냐? 빨리 안 나오고.”
“어, 아, 예! 가, 가겠습니다!”
뭐라고 말을 붙여볼 새도 없이. 서기찬이 화들짝 놀라면서 엉거주춤 그라운드로 뛰어나갔다. 그 와중에도 허겁지겁 서류를 뒤적거리는 것이, 시험 10초 전까지 요점정리를 들여다보는 벼락치기처럼 보였다.
“뭐래, 이건 또? 타격 분석이네?”
뭔가 싶어서 내팽개치고 간 걸 훑어본 최태웅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자기 피칭 따라 하는 걸 말릴 때 ‘나는 데이터 야구를 한다’고 둘러댔던 게 생각난 것이다.
“와, 이건 진짜 무슨 스토커도 아니고. 팀에 100승 투수도 있고 3관왕 했던 코치도 있는데, 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나한테 꽂혀서 이래?”
박진효가 그랬던 것은 이해 안 가는 바도 아니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효과’를 몸으로 체험했으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전과 달리 서기찬이 자신의 조언을 따른다는 사실에 부담이 없었다. 데이터 분석은 어떤 선수든 열심히 하면 다 좋은 게 아닌가. 6회 말에 던지는 걸 보면 나름대로 효과 본 것 같기도…….
-와아아아아아!
갑자기 실내 불펜 천장이 찌르르 울린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상황인가 내다보려는 찰나에 투수코치가 입구 쪽에서 스윽 들어왔다.
“어, 태웅이 마침 있었구나. 잘 됐다. 그대로 스탠바이 해라. 바로 나갈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