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70화 (70/90)

< 괴물 배터리 -071- >

071.

[누구도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야말로 한국 사회에 만연한 권위적 야근 문화에 도전장을 던진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우리 때는 이랬다느니 저랬다느니 노예의 사슬 자랑을 반복할 것인가? 우리는 떳떳한 칼퇴근 문화 정착을 위해 앞장선 팔콘즈 타선에 찬사를 보낼 필요가 있다. 씨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 처음에 뭔 소린가 했네.

└4구 3아웃 잼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칼퇴근 본능!

└마지막 두 글자에 하고 싶은 말이 모두 담겨 있다!

└하지만 칼퇴근 안 될 거야. 팔콘즈 불펜은 야근을 사랑하거든.

└Aㅏ…….

└이 땅에서 열정페이는 하루빨리 사라져야만 한다.

[나 오늘은 화장실 가서 손도 안 씻고 후딱 나왔는데 왜 또 6회 말임? 6회 초 어디로 감?]

[이거 은근히 중독된다. 보다 보면 삼진 많이 잡는 것보다 꿀잼ㅋㅋㅋㅋㅋ]

[신인 노히트 최다 이닝이 12이닝이라고 안 했냐?]

└ㅇㅇ 타자 하나 잡으면 타이. 둘 잡으면 갱신.

└ㄷㄷㄷ 선발로 나왔으면 진작에 노히트 노런인데.

└지랄 옆차기한다. 솔까 박진효는 안타지. 기록원 병신년. 눈깔 삔 듯. 그걸 어떻게 에러로 세냐.

***

그야 당연히 과장 보탠 표현이기야 하지만. 몇몇 선수들의 체감으로는 정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이닝이 잡아먹혔다. 목 좀 축이고 앉으려고 했더니 다시 나오라는 상황이라, 공격 차례가 아니었던 야수들은 어안이 다 벙벙할 정도였다.

“무슨 인터벌이 저 따위야? 공 받자마자 숨도 안 돌리고 던지네?”

“사인 교환 안 하나? 그냥 투수가 꼴리는 대로 던지는 거야?”

“아니, 딱히 변화구도 없으니까 그냥 보고 받아도 되기야 하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아. 입맛도 좀 보고 그래야지. 어떻게 공 4개에 세 명이 나가 뒤지냐?”

가벼운 타박에 5, 6, 7번 타자는 풀이 죽어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물론, 잔소리 들을 법한 결과였다는 건 인정한다. 교체된 직후를 공략하는 데 실패했다면 공이라도 몇 개 봐두는 편이 도움됐겠지.

하지만 분석 자료에 따르면 초구를 건드린 경우가 가장 타구 질이 좋다고 했다. 그 어떤 투수도 초구부터 타자의 속도감을 흐트러뜨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실제로 100km/h도 안 되는 똥볼이 날아온다고 해봐라.

무슨 인내심으로 그걸 안 휘두르고 흘려보낼 수 있겠나.

따악! 따악! 퍼억!

“아웃!” “세이프!” “세이프!”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어차피 말린 판이라서 그런지, 팔콘즈 야수진은 수비에서 의외의 견고함을 선보였다. 노히트 격파라는 목표로 집중력은 남은 상태에서, 10점이나 되는 점수 차이 때문에 수비 부담은 줄어든 덕이었다.

7회 초.

선두타자로 나온 8번 함성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아웃당하면 신인 최고기록과 타이다. 다른 사람들이야 ‘팔콘즈 타선’이라는 이름으로 싸잡혀 불리겠지만……. 자신은 대기록의 희생양으로서 두고두고 자료화면에 소환될 터였다.

‘일단은 버텨라도 보자. 빡세게 승부하는 척하면 모양은 덜 빠지겠지.’

많이 볼수록 속도감이 흐트러진다고 해도. 데이터로만 아는 공과 눈으로 직접 지켜본 공이 같을 리 없다. 설령 자신이 당하더라도 후속 타자들에게 재산이 되는…….

따악! 따악! 부웅!

“파울!” “파울!” “스트라이크 아웃!”

시속 81km.

포크볼처럼 코앞에서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발레 스윙을 한 함성일이 시무룩해서 물러났다. 그와 교차해서 타석에 들어가는 손진우가 반쯤 울상된 얼굴로 말했다.

“야, 나 번트 대면 욕 존나 먹겠지?”

“그건 번트 대고 살았을 때 얘기고. 그러고서 뒤지면 완전히 빅재미지. 깡 있으면 한번 해봐라. 나중에 기록 깨져도 두고두고 움짤 돌아다닐걸?”

“…….”

투수의 집중력을 깨트리지 않으려는 배려일까?

엘리펀츠의 홈에서 신인 최다 이닝 노히트 기록과 타이를 이뤘는데도 이렇다 할 소란은 없었다. 기분 탓인지 여기저기서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할 정도였다.

퍼억!

“스트라이크!”

여지없이 스트라이크존 모서리를 찌르는 초구 패스트볼.

이만큼 코너워크를 해대면 오심으로라도 볼 하나쯤 나올 법도 하거늘.

손진우는 투덜거리면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제2구…….

“어, 뭐야?!”

“……!”

“번트?”

한순간, 구장 전체에 숨 막히는 경악이 퍼졌다. 손진우가 갑자기 허리를 구부리면서 번트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

엘리펀츠로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코스가 번트대기 어려운 무릎 위 스트라이크존이었다는 정도. 더군다나 번트 모션 자체가 페이크였는지, 손진우의 자세가 곧바로 정상 타격으로 돌아왔다.

짤막한 전율을 뚫고, 최태웅의 2구는 그대로 미트에 꽂혔다.

퍼억!

“스트라이크!”

심판이 콜하는 순간, 사방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침묵도 잠시.

선수들은 당연히 별 반응이 없었으나, 1루 응원석 쪽에서 악에 받친 폭언이 쏟아졌다.

“이 새꺄! 더럽게 굴래?”

“씨발롬아! 정정당당하게 붙으라고!”

“밤길 조심해라!”

담이 작은 사람이라면 이것만으로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을 터다

하지만 손진우도 나름대로 뼈가 굵은 프로였다. 관중의 아우성에는 잠시 눈살만 찌푸렸다가, 엉뚱하게도 포수인 장기석에게 대고 투덜거렸다.

“형님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내가 뭘?”

“아까 제가 번트 대볼까, 하고 중얼거리는 거 못 들었어요? 그러면 상식적으로 공 하나쯤 빼라고 사인 줘서 간 좀 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뭐 이렇게 인간미가 없어?”

“……미친 놈아. 어쩐지 다 들리게 중얼거린다 했다. 넌 그따위로 저렴하게 잔대가리를 굴리니까 그 짬 처먹도록 포지션이 오락가락하는 거야. 쟤랑 배터리 짤 때는 나 그냥 받기만 하는데 간 보기는 개뿔.”

농담 반으로 한 소리라는 거야 알지만. 어지간히도 어이가 없었는지라 장기석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심판이 주의를 주지 않았더라면 몇 마디나 더 티격태격했을지 모를 정도였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네. 인간미가 없어.’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장기석은 속으로 공감했다.

어떤 투수라도 기습 번트 모션이 나오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번트 모션인 상대에게 맞혀줄 생각으로 던질 때조차 완전한 평상심은 안 나온다. 공을 던지면 갑자기 타격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제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 하나 차이로 코너에 넣고 빼는 제구를 하는 중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최태웅은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이 태연하게 귀퉁이에 공을 찔렀다. 정말로 기막힌 점은 그 와중에도 번트 자세에 반응해 대쉬를 해왔다는 것이다.

‘페이크 번트인 줄 미리 알기라도 한 거야 뭐야? 딱 보니까 완전히 이놈 독단이라서 훔칠 사인도 없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깡으로 이런 똥볼을 스트라이크존에 꽂지, 라는 생각은 이제 들지도 않는다. 최태웅의 눈에는 보통 사람에게 안 보이는 뭔가가 보인다는 사실 정도만이 갈수록 확신으로 굳어질 뿐 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투 스트라이크였지.’

최태웅이 천천히 투수판을 밟았다. 지난 몇 차례의 경험에 의거하여, 장기석의 신경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뻐어억!

“큭!”

실제로는 그럴 리 없겠지만. 미트의 포켓이 당장에라도 찢어질 듯이 격렬하게 출렁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격이 다른 속구에, 손진우가 꼼짝도 못하고 침음성만 삼켰다.

“스트라이크 아웃!”

“와아아아아!”

145km/h라는 전광판의 표시와 심판의 삼진아웃 콜.

거기에 ‘역대 신인 최다 이닝 노히트 경신’이라는 문구와 화려하게 솟구쳐 오르는 불꽃놀이.

엘리펀츠 구장은 삽시간에 광란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

“와, 이런 씨.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냐? 최다 이닝 노히트? 지금 그게 우리 팀에서 나왔다고?”

“쟤 이제 막 데려온 신인이잖아? 1~2년 안에 어디 갈 일 없는 거지?”

“이거 완전히 재능낭비 아니냐? 아니 미친! 저런 놈이 있으면 승리조나 아싸리 선발 로테이션에 쑤셔 넣어야지! 왜 롱 릴리프 같은 걸로 굴리고 있어? 10점도 넘게 차이 나는 게임에서?”

“야야야, 그거야 뚜껑 열어보니까 나온 거지. 데뷔하기 전에 이럴 줄 어떻게 알았겠냐? 유 감독이 알아서 하겠지.”

“그거 알아? 쟤 고삐리 때 야구도 안 했대. 혹사고 나발이고 없어. 어깨도 존나 싱싱하대.”

“누가 데려왔냐? 용국이 같은 먹튀 새끼 짜르고 인센티브 몰아줘야 되는 거 아니야?”

“최태웅! 최태웅! 최태웅!”

“멋있다! 잘생겼다!”

소리 소문도 없이 특 튀어나온 신인이 일주일 남짓한 동안에 보인 퍼포먼스는 관중들을 광란의 도가니에 빠트렸다. 엘리펀츠 팬들은 얼굴이 완전히 시뻘게져서 함성을 질렀으나 다음 타자가 들어서자 조금씩 긴장감을 되찾았다.

12.1 이닝 노히트.

신인으로서는 최다 이닝 기록.

하지만 지금 상황이 무시무시한 부분은, 데뷔하자마자 만들어낸 기록이라는 게 아니다. 바로 연속 기록으로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 있었다.

-자, 이제 1번 타자인 황상훈이 타석에 들어오는데요. 이제부터 상위 타선으로 올라가는 타이밍이라 최태웅 선수 입장에서는 고비가 되겠죠?

-물론입니다. 팔콘즈는 사실 공격 측면에서 상위 타선과 하위 타선의 격차가 상당히 큰 편에 속하거든요. 지금부터는 타자 한 명을 잡을 때마다 기록이 새롭게 써지는 셈이니, 팔콘즈에서도 쉽게 물러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반면에 최태웅 선수는 일단 계단을 하나 넘었거든요. 기록을 의식했다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밖에 없겠죠?

-맞습니다. 하지만 벽을 넘었을 때 투수가 도달하는 심리 상태는 개인차가 크죠. 이러한 릴렉스가 플러스로 작용할지 마이너스로 작용할지 지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시는 순간, 최태웅 선수가 와인드업을 합니다. 상위 타선을 맞이해서 던지는 초구는…….

***

퍼억!

“스트라이크!”

몸쪽에 바짝 붙어서 날아오는 패스트볼을 황상훈이 흠칫 놀라면서 뒤로 피했다. 여차하면 맞을 뻔했다고 생각한지라, 황상훈은 심판의 판정에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로 저거 신인 맞아? 뭘 믿고 이렇게 마이 페이스야?’

기록을 달성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심리 상태에 변화가 있을 터. 그걸 자극해보려는 차원에서 과도할 정도로 홈 플레이트에 달라붙어 본 건데……. 심드렁한 표정이나 던지는 코스를 보면 멘탈에 기스난 기미조차 안 보였다.

따악!

“파울!”

이미 기록의 희생양이 된 뒤라서일까. 팔콘즈 타자들은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어떻게든 설욕을 하겠다는 독기와는 다르다. 이런 식으로 멘탈이 한 번 굴러떨어지면 한동안 기어오르기 어렵다는 진득한 위기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 것이다.

부웅!

“스트라이크 아웃!”

“큭!”

컨택만큼은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고 자부했거늘. 갑자기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방망이를 헛돌린 황상훈이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타이밍 잡기 어렵다는 게 뭔지 알겠네. 공을 두 개만 봐도 속도감이 이상해져. 폼이 어설프게 티나니까 더더욱. 거기다가 이 정도로 떨어지는 체인지업도 섞을 수 있다면……. 그래도 한 타석 더 보면 감이 올 듯도 한데…….’

“어?”

짜증스럽게 물러나던 황상훈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선발투수가 탈삼진 하나 따낼 때마다 팬들이 벽에 붙이곤 하는 K마크. 불펜투수인 최태웅으로 바뀐 지가 벌써 2이닝째인데, 여전히 그걸 벽에 붙이는 관중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잠깐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다가.

벽에 붙은 K마크 3개의 의미를 깨달은 황상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

[3타자 연속 삼구 삼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까 맞혀 잡는 거 보는 재미 쏠쏠하다고 한 새끼 튀어나와라.]

[ㅈㅅ 나도 이불 뻥뻥 찰 거 같으니까 잊어주셈.]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짘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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