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69화 (69/90)

< 괴물 배터리 -070- >

070.

‘닥터 K’의 최대 효과를 확인한답시고 전력투구했다가 눈총 받은 건 그렇다고 치자.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답시고 까불다가 제 풀에 걸려 넘어진 거니까.

하지만 지금 이 똥물은 도대체 어디서 튀긴 건지 상상조차도 안 간다. 아이고, 골이야. 이게 뭔 일이래.

“일단 물어나 보자.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그렇게 몹쓸 흉내를 냈냐.”

나름대로 자제한다고 한 건데, 어처구니없는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나 보다. 호랑이 선생님한테 야단맞는 유치원생처럼, 서기찬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게……. 선발투수 지망하려면 아무래도 이닝소화가 돼야 하는데……. 투구수 늘어나면 갑자기 구위가 확확 떨어지고 그래서…….”

“응응. 해치지 않아요. 계속 말해보렴.”

“완급 조절하려고 체인지업도 좀 파봤는데……. 각이 잘 안 나와가지고……. 다른 방법 없나 궁리 좀 해보고 있는데……. 너 던지는 거 보니까, 체인지업 말고 그냥 직구도…… 빠른 거랑 느린 거 나눠서 던지길래…….”

“그래서 무작정 따라해 봤다? 그것도 모처럼 선발로 시험 등판한 상황에서?”

“…….”

이게 말인지 당나귀인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콧물이 다 나온다. 어쩐지 그때 던지는 모양새에서 위화감이 들더라니만.

시속 140km라고 해도 한국 프로야구를 기준으로 한다면 빠른 축에 드는 공이다. 투구수가 100개를 넘긴 상태에서 뿌린 공이 저 스피드를 찍었다면 리그 전체에서도 알아줄 만한 피지컬이다. 그 투수의 원래 최고 구속이 157km/h에 이른다고 생각하면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왜 위화감을 느꼈느냐? 컨디션이 나빠서였는지 그날 서기찬은 1회부터 140 초중반대의 직구를 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날 불펜피칭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152km/h를 찍기도 했지.

괴상망측한 타입의 지구력이라고 생각했는데, 답은 간단했다. 나처럼 전력투구를 안 했기 때문에 100구가 넘어도 일정한 구속과 구위를 유지한 것이다.

……이거 혹시 노림수냐? 목구멍까지 올라온 쌍시옷 단어가 여러 개이긴 한데, 나도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다 보니까 차마 입 밖에 못 내겠네.

“혹시 나 따라하기 전에…… 코치님이나 감독님한테 상의는 안 해봤냐?”

“당연히 해봤는데, 코치님은 오래 던질 생각보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끌 생각 하라고…….”

그거야 코치님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언이다. 서기찬이 방어율 2~3점쯤 되는 상태에서 이닝 소화만 못하는 게 아니니까. 유망주라면 일단은 눈앞의 타자 한 명을 잡아내는 게 급선무지. 다다다음 타자 같은 걸 생각할 여유가 어딨어.

‘이거 미치겠네. 진효 형 때랑 똑같잖아.’

나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진효 형의 경우에는 ‘매의 눈’을 이용한 개인강습이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공 하나 던질 때마다 약점 코스를 해설해줬더니, 존 전체에 대한 대처능력이 골고루 상승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진효 형이 타자였기에 얻을 수 있는 효과였다. 그나마도 장담할 수 없어서 ‘역효과가 나도 모른다’라고 못 박은 뒤에 상대해줬을 뿐이고.

서기찬이 나를 롤 모델로 삼아서 뭔가 나아질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서기찬에게는 타자의 약점이 보이지도 않고, 땅볼이 될 확률이 늘어나는 운도 없으며,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결정구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니까.

겉으로 보이는 내 피칭을 고스란히 따라하기만 했다가는 애 버린다, 버려. 몰랐다면 모를까, 내가 튀긴 똥물 때문에 앞길 창창한 유망주가 시궁창에 빠졌다고 생각하면 꿈자리가 사나워질 거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누르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서기찬 어린이. 오프 스피드 할 때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학교에서 배운 적 있죠.”

“구속 차이랑 폼?”

“그걸 아는 새ㄲ…… 아니, 흠흠. 하여튼, 그러면 뭐가 잘못됐는지는 알겠네. 살살 던지는 게 티나면 오프 스피드도 뭣도 아니고 그냥 똥볼…….”

“그런데 너도 던지는 폼 보면 빠른 공인지 느린 공인지 완전히 티나잖아?”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서기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저런 의문을 품은 것은 서기찬 뿐만이 아닐 거다. 내 입장에서는 장사 밑천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나, 침묵하고 있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너랑 나는 경우가 달라. 내 진짜 무기는 데이터 야구고, 오프 스피드는 그냥 눈속임이거든.”

“눈속임?”

“네 말마따나 폼 보면 빠른 공인지 느린 공인지 견적이 딱 나오잖아. 타자들은 이렇게 생각하겠지. 폼만 미리 읽으면 된다! 구속에만 적응하면 된다! 그런데 사실 부지런한 최태웅이는 타자 약점을 미리 조사해서 철저하게 쿨존만 공략하고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언더스탠?”

“네가 자료분석 하는 거 못 본 거 같은데…….”

“어허! 네가 나를 보면 얼마나 봤다고! 우아하게 호수에 떠 있는 백조도 사실은 물 아래에서 물장구친다는 거 알아 몰라? 남들 안 보는 데서는 존나 열심히 야구 공부 하고 있다고, 내가!”

“……와, 대, 대단하다. 그게 그렇게 얍삽이로 뚝딱 되는 게 아니었구나.”

기합 좀 넣어서 으르렁거렸더니, 서기찬이 이집트 피라미드의 비밀이라도 안 것마냥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운동만 하면서 큰 애들은 순박한 구석이 있다더니만. 내 얼굴에 똥칠을 하는 기분에다가 양심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했지만…….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앞길 창창한 유망주가 나 때문에 망가지는 것보다는 낫지.

“흠흠. 아무튼 알아들었으면 됐고. 이딴 몹쓸 피칭 따라하면 못 써요. 지지야, 지지. 공도 빠른 새끼가 그냥 스트라이크존에 구겨넣어서 후딱 승부내버리면 그게 투구수 조절이지. 완급은 무슨 개뿔.”

“그것도 그러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걸 몰라서 안 하는 투수가 세상에 어디 있으리오. 서기찬도 예외는 아닌지 어색하게 쓴웃음만 지었다.

저 반응만 봐서는 이제 무작정 날 따라하다가 똥물 뒤집어쓰는 일은 없을 듯도 싶었다.

……염병. 다 좋은데, 생각해보니 상식은 도대체 어디다 팔아먹은 놈인지 모르겠네. 이제 1군에 데뷔해서 두 게임 뛴 신인 피칭을 따라해보겠다는 발상은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 제정신이야?

***

어제에 이어서 최태웅이 연투하게 될 일은 없었다. 엘리펀츠 선발진에서 오랜만에 완투 가까운 페이스로 이닝을 소화해주었던 것이다.

샤크즈와의 3연전에서 위닝 시리즈를 거둔 엘리펀츠는 으쓱한 기분으로 홈에 돌아왔다.

“어? 쟤 아닌가? 최태웅?”

“그런가? 얼굴은 아직 잘 모르겠어서…….”

“맞네, 맞아! 구레나룻! 최태웅! 여기 좀 봐봐요!”

홈과 원정이 이렇게나 차이나는 거였나?

그라운드에 나와서 훈련하던 최태웅은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실감했다. 훈련복장이라서 등에 이름도 안 적혀 있는데, 홈 팬들이 알아보고 환호를 보내왔던 것이다.

‘무사사구 노히트’ 같은 갖다 붙이기식 기록이지만, 마냥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에 2이닝만 더 잡아도 신인으로서 최다 이닝 노히트를 달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악!

“오라이, 오라이!”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방망이를 주며는! 홈런을 쳐요.”

“와아아아!”

팔콘즈와의 3연전 첫 경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날은 엘리펀츠 타선이 대폭발했다.

3회와 4회에만 대거 8득점. 부담이 작은 덕분인지 선발투수인 양정식도 많지 않은 투구수로 5회까지 5피안타 무실점으로 꽁꽁 틀어막았다.

경기 초반에 이만큼 점수가 벌어지면, 선발투수 보호 차원에서 책임 이닝 이후로는 불펜을 가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그것도 불펜 사정에 따라서 다르지만, 엘리펀츠에는 지금 같은 상황에 꺼내라고 만들어놓은 듯한 패가 한 장 있었다.

-최태웅! 최태웅! 최태웅! 최태웅!

-후발투수! 후발투수! 후발투수!

“후발투수는 또 뭐여? 별명이야? 꼴랑 두 경기 뛴 놈한테?”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유승혁 감독은 피식 웃었다.

처음 듣는 단어지만 뉘앙스로 보아 대강 어떤 뜻인지 짐작은 갔다. 나중에 올라와서 몇 이닝씩 소화한다는 의미로 후발투수라 부르는 거겠지.

퍼억! 퍼억! 퍼억!

“……저 꼬라지만 봐서는 진짜 아닌데.”

불펜에서 어깨 푸는 최태웅을 힐끗 보고서, 유승혁 감독이 혀를 찼다.

언제나 저런 공을 던진다면 오프 스피드 피처로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판단하기에는 실전 마운드에서 보여준 강속구가 너무나도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저 짬에 태업일 리는 없고…….”

무엇보다, 정색하고 갈구기에는 사안 자체가 애매했다.

불펜에서 잘 던지고 실전에서 말아먹는 경우라면 모를까. 실제로 경기에서 저만한 결과를 뽑았는데, 연습하는 공이 느슨하다고 쥐 잡듯이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본인은 끝까지 힘껏 던진 거라고 우기고 있기까지 한데.

‘모르겠다. 굴려볼 수밖에 더 있나. 잘 굴러가면 그대로 쓰는 거고. 고꾸라지면 그 핑계 김에 개조 한 번 해보는 거고.”

***

“우와아아아아!”

“드디어 나왔다!”

“최태웅! 최태웅!”

“하던 대로만 해라! 하던 대로만!”

6회 초가 되자, 관중이 그토록 외쳐댄 것처럼 최태웅이 터벅터벅 마운드로 걸어 나왔다. 신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이 유유히 연습 투구하는 모습에 1루 관중석이 환호에 휩싸였다.

-아, 모두가 기대하시는 것처럼 최태웅 선수가 엘리펀츠 6회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1군에서 2경기, 10.2이닝을 소화했고 평균자책점은 0입니다. 볼넷 0에 탈삼진은 12개. 데뷔 이후 10.2이닝째 무사사구 노히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참 재미난 장면이네요. 연습투구가 대부분 120~130정도 되겠는데, 실전에서는 대부분 저것보다 수십 km/h는 느린 공을 던지죠?

-예. 다들 아시다시피 완급 조절에 능숙한 오프 스피드 피처인데, 최태웅 선수에게는 일반적인 오프 스피드 피처와 차이점이 있지요?

-예. 바로 샤크즈 전에서 마지막으로 던졌던 150km/h의 강속구인데요. 사실 대다수의 오프 스피드 피처는 구속이 느린 편입니다. 느린 구속이라는 약점을 감추기 위해 더 느리게 던졌다가 빠르게 던졌다가 하면서 타자를 현혹시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최태웅 선수도 그러한 유형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샤크즈 전에서 보란 듯이 150짜리 직구로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죠. 자신은 강속구를 못 던지는 게 아니라는 강렬한 어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참 매력적인 퍼포먼스였다고 생각합니다만, 최태웅 선수에게는 양날의 검이겠죠. 꾸준히 성적을 낸다면 하나의 스타일로 인정을 받겠지만, 얻어맞기 시작하면 건방지다는 비난의 재료가 되겠지요.

-대기록을 진행 중인 최태웅 선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이유에서도 오늘 꼭 호투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

“재수 한 번 오질라게도 없네. 기록 같은 건 다른 데서 깨진 다음에 좀 오지.”

“우리가 무슨 동네북이야?”

팔콘즈 더그아웃에 긴장감이 내려앉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10점이나 되는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농락당하는 상황. 여기서 신인의 대기록에 희생양이 되기라도 한다면……. 그 낙인은 적어도 이번 시즌 내내 따라다닐 것이 분명했다.

“좋게 생각해, 좋게. 원래 퍼펙트게임도 9회 말 2아웃에 안타 치면 완봉당했는데도 퍼펙트 깨서 잘했다고 박수 쳐주잖아.”

“……존나 긍정적인데.”

“7이닝 헌납한 건 스콜피온즈인데, 우리가 망신스러울 게 뭐 있어? 안타 하나만 쳐. 그러면 오늘 말아먹은 거 면죄부된다.”

나름대로 긍정적인 투지를 가슴에 두르고서, 5번 타자인 오영근이 타석에 들어갔다.

아무리 신인이라지만, 매스컴까지 탄 투수의 정보가 아직도 깜깜할 리는 없었다.

‘구속을 예측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패턴의 체인지업과 느리고 빠른 직구. 스트라이크 위주의 볼 배합. 140km/h 이상의 직구는 거의 투 스트라이크 이후의 결정구. 느린 대신에 철저하게 코너워크되는 컨트롤.’

오영근은 미리 체크한 정보를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재생하고 폼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최태웅의 발도 투수판을 밟았다.

퍼억!

“스트라이크!”

***

벤치에 앉아 있던 서기찬의 손이 기계적으로 방금 공을 기록지에 적어 넣는다. 곧바로 다시 와인드업하는 최태웅의 모습을 보면서, 서기찬은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이 어떻게 하면 쿨존이 된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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