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69- >
069.
촉이 좋은 기자들은 9회가 되기도 전부터 미친 듯이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노히트라는 신성한 기록.
갓 데뷔한 신인이라는 프리미엄.
이처럼 명백하게 상품성 있는 소재는 무조건 빨리 쓰는 사람이 임자다. 먼저 올려서 메인에 노출되면, 뒤늦게 올린 기사로는 도저히 조회수 경쟁을 할 수가 없다.
숫자가 들어갈 부분을 일단 공란으로 해두는 것은 기본. 손이 빠른 기자 몇몇은 기록이 무너졌을 때를 대비해 두세 패턴의 기사를 미리 써두기까지 했다.
뻐어억!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아웃 카운트.
대포알 같은 직구가 미트에 꽂히는 순간, 대다수 기자들이 엔터키를 눌렀다. 그러나 개중에는 이호섭처럼 바짝 얼어서 반응이 늦은 사람도 있었다.
“150?”
“아니, 무슨 미친…….”
일단 업로드를 마친 기자들도 전광판의 숫자를 보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늘 경기에서 내내 140정도나 턱걸이한 투수가 아니었나? 그야 최고 구속은 1~3km/h쯤 더 나올 테고, 프런트에서 스피드건을 약간 건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150이라니?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데도 정도가 있지?
[합.성.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아니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 100km도 안 던지던 놈한테서 왜 뜬금없이 150이 찍혀ㅋㅋㅋㅋㅋ]
[사실 저는 아직도 두 번의 변신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너, 너 이 자식… 지금까지 이렇게 무거운 옷을 입고 싸웠던 거냐?!?!?!]
[진짜 개뜬금퐄ㅋㅋㅋㅋㅋㅋ]
[저런 공 던질 수 있으면 진작 던지라곸ㅋㅋㅋㅋ 왜 사람 피 마르게 100km짜리 똥볼로 노는데ㅋㅋㅋㅋ]
당연히 인터넷이나 TV로 중계방송을 본 사람들도 난리가 났다.
시속 150km의 직구는 현대 야구에서 딱히 희귀한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같은 무기라도 보여주는 방식에 따라서 임팩트의 차원이 달랐다.
‘이건 대박이다.’
이호섭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전율마저 느꼈다.
디셉션이나, 오프 스피드 피치나, 컨트롤 쪽에 눈 돌리는 투수는 얼마든지 있다. 투수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타자를 잡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역시 투수의 로망은 시원하게 타자를 윽박지르는 강속구였다.
기술이란 결국 약한 자가 강한 자와 대등히 겨루기 위해 연마하는 것이다. 타고난 어깨를 가졌으면서도 일부러 ‘요령’을 우선적으로 갈고 닦는 투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백 년 야구 역사에 그런 투수가 전무한 것만도 아니었다.
사자의 발톱과 원숭이의 꾀를 한 몸에 지닌, 그야말로 규격 외의 몬스터. 괴력(怪刀)과 진기(珍技)를 동시에 뽐낸 이들은 거의 예외없이 ‘전설’이라는 호칭을 거머쥐었다.
“이따위 짝퉁 노히트가 문제가 아니야. 우리 특집 짜자. 오랜만에 발로 좀 뛰어야겠어.”
“네? 누구를요? 최태웅이요?”
이호섭이 불쑥 내뱉자, 후배인 유아진은 옆에서 화들짝 놀랐다.
발로 뛴다는 말을 이호섭 식으로 해석하면 다큐멘터리 수준이 된다. 선수 이력을 일일이 되짚어 올라가면서 스토리 될 만한 걸 찾아보겠다는 의미.
기자라면 물론 그렇게 움직여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만…… 이제 겨우 두 경기 뛴 신인한테?
“어차피 지금 주목할 만한 이슈도 없잖아. 짬날 때 미리미리 예습해두는 거지. 나중에 저 친구가 큼직한 거 한 건 하면 다들 허겁지겁하는 사이에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특집 올릴 수 있게.”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에요? 솔직히 저는 지금 기록도 오래 갈 것 같지가 않은데…….”
“마지막 직구 보고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부루퉁한 후배의 반응에 이호섭은 기가 막혀서 가슴을 쳤다.
“저놈 오늘 전력투구 자체를 안 했다고! 공이 느려서 어쩔 수 없이 오프 스피드 피치를 한 게 아니었단 거잖아! 일부러 힘을 뺀 거라고!”
저 스피드를 계속 고수한다면 언젠가 밑천이 털릴 수야 있다. 하지만 그러면 뭐? 그때 가서 스피드를 올리면 되는 게 아닌가.
구속 차이를 유지만 한다면 당연히 빠른 공일수록 치기 어려운 법. 최태웅은 이런 기록을 쌓아놓고도 아직 벗겨낼 껍질이 남았다는 말이었다.
“저는 사실 일부러 느리게 던졌다는 사실 자체가 납득이 안 된다는 거거든요?”
구구절절한 해설을 들어놓고서도 유아진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삐죽거렸다. 피지컬 신봉자인 그녀로서는 저 피칭 스타일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 일부러 먼 길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요. 보여주는 용도로만 한두 개 섞었어도 훨씬 쉽게 갔을 거잖아요. 신인 주제에 일부러 봐주거나 태업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뭔데? 강속구 못 던지는 게 아니란 건 방금 눈으로 봤잖아.”
“그거까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서, 유아진은 수훈선수 인터뷰가 진행 중인 그라운드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한 거 하나는,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거예요. 데뷔전에서부터 일부러 슬슬 던지는 정신 나간 루키가 어딨어요? 세게 못 던진 이유가 따로 있는 거겠죠.”
“그 이유가 뭔데?”
“그러니까 그걸 제가 무슨 수로 알아요?”
***
3과 2/3이닝 무실점. 5탈삼진. 세이브.
구원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잘한 거기야 한데, 누구나 물개박수를 칠 정도냐 하면 그건 아니다. 6회 빼고는 점수 차이도 계속 넉넉했으니까. 대량득점 하고 있을 때 구원투수가 4이닝 퍼펙트쯤 한다고 해도 인상에는 잘 안 남는 법이다.
그래도 데뷔전부터 이어진 노히트 행진 때문인지, 오늘 수훈선수는 내가 지명되었다.
데뷔하고 두 경기 뛰었는데 수훈선수 인터뷰만 두 번. 영광까지는 어떨지 모르겠어도 뿌듯하기 그지없는 일이기는 한데…….
“데뷔전 때와는 다르게 1점 리드의 빠듯한 상황이었는데요. 어땠나요? 긴장되지는 않았나요?”
“감독님이 저를 기용했다는 건, 저를 믿으셨다는 뜻입니다. 저는 자신을 믿은 게 아니라 감독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감독님이 믿는 저도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경기까지 10.2이닝 무사사구 노히트를 기록하셨는데요. 신인으로서는 이미 최다 이닝입니다. 이 기록의 원동력을 하나 꼽으라면 뭐가 있을까요?”
“제가 마운드에 오른 건 전적으로 감독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중생들이 감히 감독님의 투수 기용을 불신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아……. 그러니까 오늘 최태웅 선수의 호투는 하나부터 열까지 유승혁 감독님 덕분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예. 감독님을 바라보면 저는 행복해지고, 감독님을 바라보면 저는 건강해지고, 감독님을 바라보면 저는 잘 생겨지고, 감독님을 바라보면 저는 공이 빨라집니다. 롸잇 나우.”
“라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보기에는 감독님이 옆에서 그렇게 노려보시니까 최태웅 선수가 진솔한 인터뷰를 못하는 것 같은데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럽니까? 누가 들으면 내가 인터뷰 잘 하라고 협박한 줄 알겠네.”
갑자기 마이크가 다가오자, 두 발짝쯤 떨어져서 지켜보던 감독님이 떫은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아나운서는 재미난 퍼포먼스라고 생각했는지 소리죽여 큭큭 웃었다.
그야 뭐 실제상황이 아닌 건 맞지만……. 경기가 끝난 직후부터 얼굴이 뚫어지게 쳐다보시는 덕분에, 나는 진땀이 주륵주륵 흘렀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쓸데없는 객기 안 부리는 건데. 설마 자릿수가 달라질 줄은 몰랐다고.
감독님 머릿속이 어떨지는, 사실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면 바로 답이 나왔다.
불펜에서 던질 때는 기껏해야 130 중반. 그나마도 125km/h를 넘어가면 급격하게 제구가 흔들리는 신인. 그래도 실적이 있어서 경기에 내보내 봤더니 뜬금없이 150km/h짜리 강속구도 뿌려댄다면?
이건 실전에서의 아드레날린 효과가 어떻다느니 하면서 얼버무릴 레벨이 아니다. 나 같아도 불펜에서 농땡이를 피웠다는 식으로밖에는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
“헤헤헤. 감독님. 혹시 건강 팔찌 안 필요하세요? 아까 인터뷰하고 선물로 받은 건데. 이거 차면 혈액순환이 잘 된대요. 피로도 금방금방 풀리고.”
“필요없다, 인마. 집에 가면 나도 쌓였어.”
깨갱.
인터뷰가 끝난 뒤. 나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감독님 주위를 살랑거렸다. 그 와중에도 감독님이 나를 가느다란 눈으로 쏘아보기만 하는지라 피가 바작바작 말랐다.
노히트로 뉴스 탄 것만 믿고 있기에는 내 입지가 너무 초라했다. 감독님의 눈 밖에 난다면 야구인생이 한바탕 꼬일 수마저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으려니, 감독님이 문득 한숨을 쉬었다. 나는 괜히 찔끔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너 오늘 던진 공이 몇 개지?”
“예? 아, 그…… 딱 30개였나, 그럴 겁니다.”
“기록 중이라서 관리는 해주겠다만……. 거진 힘빼고 던진 공이니까, 돌아가는 상황 따라서 연투할 수도 있다. 감안하고 몸 관리 해둬.”
“아, 예! 물론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얼떨떨한 것도 잠시. 나는 흠칫 놀라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독님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젓다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냥 넘어간다는 거겠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터벅터벅 숙소로 향했다.
나 같아도 불펜 피칭에서 농땡이를 피웠다고 생각하겠다고 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신인의 태업은 말 같잖은 일이기도 했다. 수십 억 연봉이 보장된 FA 대박 선수라면 또 모를까. 코칭 스태프 눈 밖에 나서 도대체 뭐 얻을 게 있다고.
그리고 ‘신인’이니 ‘무사사구 노히트’니 해괴한 조건 붙여서 기록 취급해준 언론 덕도 있지 싶었다.
아무리 감독이라도, 날계란 맞고 싶지 않고서야 퍼펙트 중인 선발투수는 못 내린다. 나도 한 번 기록이 진행 중인 걸로 팬들에게 인식되었으니, 깨지기 전까지는 올리지 않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일단은 그거면 충분…….
퍼억!
“어이 씨, 깜짝이야!”
코너를 도는 순간 귓가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엉거주춤하게 물러나면서 봤더니 젖은 수건을 든 서기찬이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미안. 놀랐어? 이쪽으로 누구 올 줄은 몰라서…….”
“아니. 뭐 미안할 것까지야……. 그런데 뭔 연습을 여기서 해?”
동갑내기인 서기찬과는 일단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렇다고 해봤자 내가 엘리펀츠에 온지는 일주일도 채 안 된다. 친하다고 할 정도는 아닌데다가 서기찬 본인도 내성적인 데가 있어서, 우리 사이에 묘하게 서먹한 공기가 맴돌았다.
“그냥 좀 눈치가 보여서……. 하는 것도 없는데 유난 떤다고 할까 봐…….”
“에이. 그 반대지. 연습은 원래 남들이 보는 데서 하는 거야. 그래야 잘하든 못하든 조금이라도 점수를 더 쳐주지.”
툭 던져본 농담에 서기찬이 어색하게 웃었다. 듣기로는 최고 157km/h도 찍는 강속구 투수라고 하던데. 우물쭈물하는 모습만 봐서는 영…….
“그러면 뭐해? 보나마나 6선발은 너한테 갈 것 같은데…….”
“응? 누가? 6선발? 어떻게? 감독님이 그런 말했어?”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귀가 쫑긋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따지듯이 물었더니 서기잔이 움찔하면서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딱히 무슨 말이 있었던 건 아닌데……. 상식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딱 봐도 너는 그렇게 지구력이 되잖아.”
“지구력은 무슨. 느리게 던지니까 그만큼 힘이 아껴지는 거지. 나는 또 뭐라고.”
나는 맥이 탁 풀려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뜬금없이 선발 얘기가 나와서 놀랐잖아. 사실은 눈총이 아니라 고평가 받고 있는 줄 알고. 하지만 유망주 혼자서 설레발치는 거였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연습하겠다는 사람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것도 뭐한지라, 나는 계속 수고하라며 손 흔들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서기찬의 소심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자, 잠깐 태웅아. 혹시 말인데…….”
“응?”
“완급 조절하는데 무슨 요령 같은 거 좀 없을까? 단순히 좀 속도 줄여서 던져본 것만으로는 도저히 각이 안 나오던데……?”
“……뭐?”
일단 멈춰서 뒤돌아본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요새는 나이로 선후배 따지니까 우리가 말 트고 지내는 거지. 입단으로 따지자면 서기찬이 나보다 몇 년은 선배다. 아니, 선후배를 떠나서, 입단한지 1년도 안 된, 1군에서 딱 두 경기 던진 신참한테 투구 노하우를 물어?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언놈은 게임에서 쌩쌩하더니 불펜에서 보면 비실비실하고. 언놈은 불펜에서 쌩쌩하더니 게임에서 비리비리하고. 골고루들 한다, 증말.
서기찬의 불펜 피칭을 보고서 투덜대던 감독님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퍼뜩 떠오른 어떤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야……. 너 설마 저번 선발 때, 나 흉내내서 던진 거였냐…?”
서기찬은 난처한 듯이 내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