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67- >
-억지로 노림수 갖지 마세요. 초점은 한복판에 둔 채로, 날아오는 거 보고 때려요. 방망이는 짧게 잡되, 스윙은 힘껏. 장타를 때린다기보다는 내야를 뚫어버린다는 느낌으로.
이번 이닝이 시작되기 전. 박진효가 야수 몇몇을 불러놓고 꺼낸 말이었다.
올해로 풀타임 3년 차. 똑딱이 타구가 많기야 해도, 이제 슬슬 ‘반짝스타로 끝날 일은 없겠구나’ 싶어지는 붙박이 선발.
나이에 비해서는 내세울 만한 경력도 아닌지라, 누가 먼저 묻지 않으면 이러쿵저러쿵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박진효가 자발적으로 공략 방침을 제시하고 나오는 것 자체가 일단 의외였다. 그래도 원래 좀 아는 녀석이라는 말에 귀 기울였다가, 내용을 듣고는 다들 어이없어했다.
-그게 무슨 공략이야? 그냥 요행 바라고 막 때리는 거지.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감이 귀신같은 놈이라서, 뭐 하나 노리면 무조건 반대로 들어온다고 봐야 해요. 몸쪽 기다리다가 바깥쪽 때리는 것보다, 아예 멍 때리고 있다가 바깥쪽 때리는 게 당연히 쉽잖아요.
어때요, 참 쉽죠? 농담인가 싶은 말이었으나, 실제로 앞서 붙어본 타자들은 표정이 묘해졌다. 저 공략법에 공감하는 것과는 살짝 다르다. 하지만 마냥 부정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공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대단하지도 않아요. 아무런 사전정보 없는 상태에서 투 스트라이크 먼저 주고 시작해도 될 만한 수준 아닙니까? 바로 직전에 무슨 공이었는지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고요. 수 싸움은 포기하고 오로지 피지컬만으로 상대한다는 느낌으로. 지금 눈에 보이는 공 하나만.
5번 채수민은 어이없는 소리라며 흘려들었으나, 박훈의 큼직한 타구를 보고서 마음이 바뀌었다.
단순히 결과만 보고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앞선 타자들이 반 박자씩 삐끗한 것과 비교하면 임팩트 순간이 명백하게 안정적이었던 것이다.
‘짧은 그립에 풀 스윙이라고 했지? 그 정도야 뭐…….’
생각해보면 ‘보고 때려라’라는 말도 엉뚱한 것만은 아니었다.
빠른 공과 느린 공의 폼이 구별된다는 점 때문에 날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현혹될 뿐. 저렇게나 구속이 오르락내리락한다면, 순간적인 감각으로 때려내는 편이 효과적일지도 몰랐다.
따악!
초구. 바깥쪽 모서리에 걸치는 공을 손목 탄력으로 갖다 맞혔다.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가 1루수의 머리 위로 넘어가는 걸 보고서 질주했으나…….
“파울!”
“아아악!”
“우와아아아!”
관중석 양쪽에서 상반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채수민은 투덜거리면서 느릿느릿 타석으로 되돌아왔다.
‘확실히 코스가 짜증나기는 하네. 그런데 딱히 맞히기 어렵다는 느낌은 없는데. 다들 왜 그렇게 헤맨 거야?’
타석에서 본 초구는 밋밋한 슬로우볼.
정말로 그냥 그게 다였다.
프로에게는 익숙지 않은 스피드니,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다고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몇 번씩 반복된다면 프로로서 자격이 없다. 느린 공이라고 무조건 먹힌다면, 아시안 게임에서는 120km/h를 던지는 약체 국가한테서 어떻게 콜드 게임을 따냈겠는가.
따악!
2구. 똑같은 코스를 찌르는 시속 120km짜리 패스트볼에 방망이가 나갔다.
안정된 임팩트. 총알 같은 타구가 뻗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정직한 2루수 방향.
채수민은 중간쯤에서 일찌감치 포스아웃 당하고 투덜거리며 물러났다.
“야. 일단 이번 타석은 니 말대로 해봤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다들 느리다 느리다 하는데, 최고는 140도 나오잖아. 제구도 공 하나 차이로 넣었다 뺏다 하고. 이런 걸 보고만 때린다는 게 말이 돼? 세 타석에 하나도 못 넘길 것 같은데?”
박진효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슬쩍 웃어 보이기만 한 그가 타석에 들어갔다.
‘세 타석에 하나? 도대체 얼마나 많이 때리길 바란 거야?’
최태웅이 패스트볼 하나로만 먹고 살던 군대 야구 시절. 따로 1대 1 맞대결을 하면서 연습하던 때에 자신은 3할 타율을 채 넘기지 못했다. 서로의 피지컬 차이를 생각하면 농락당했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그런 경험이 있는 박진효와 다른 타자들은 최태웅을 상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랐다.
7이닝 퍼펙트니, 퓨처스 리그 방어율 1위니 해도, 당장은 신인. 실제로 저런 똥볼만 던져대면 일부러 경각심을 품기도 어렵다. 머리로는 만만찮은 투수라 긴장하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질 않는 것이다.
한 타석만 범타가 되어도 농락당한 기분이 들겠지. 바로 이 부분에서부터 잘못되었다. 무의식이 ‘때리는 게 당연. 못 때리면 손해.’라고 느끼고 있으니까 한 번이라도 나쁜 결과가 나오면 악순환에 빠져든다.
‘승부에서 수 싸움은 완전히 배제. 지금 날아오는 공 하나만 집중. 오로지 피지컬로만 대결.’
이 요령을 깨달은 시점에서 최태웅과의 1대 1 맞대결 타율이 조금은 올랐다.
‘하지만 태웅이도 그때보다는 구속도 훨씬 늘었어. 체인지업이라는 무기도 생겼고.’
리그 탑 클래스 에이스 상대로 3할 타율을 당연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때리면 대박, 못 때려도 본전이라는 타자들의 인터뷰가 마냥 립 서비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최태웅을 상대할 때도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3~4할을 노리면 100개 중 하나도 못 때린다.
따악!
타율 2할.
처음부터 그 정도를 목표로 잡으면, 의외로 결과는 나온다.
***
“큭……!”
“공! 공 어디?!”
“아니, 너 움직이지 마! 내가!”
초구에 날카로운 땅볼.
다이빙한 유격수의 글러브 끝을 맞고 공이 굴절된다. 황급히 백업한 3루수가 힘껏 송구했으나 박진효의 발이 먼저 베이스를 밟았다.
“세이프!”
“이야아아!”
6점 차에 8회 말 투아웃. 그리 희망을 가질 만한 상황도 아닌데 샤크즈 관중석에서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구렁이처럼 느물느물한 피칭에 숨도 못 쉬도록 틀어막혀 있던 게 어지간히도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데 방금 게 왜 에러야? 기록원 미친 거 아니야?”
“당연히 안타지! 저게 왜 유격수 실책이야!”
“그냥 타구가 쎄서 못 잡은 거잖아! 미친 새끼들!”
사소한 아우성이 있었으나, 큰불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대기록을 진행 중이었던 것도 아니고, 출루했다는 점은 똑같다. 기록에 영향을 받는 박진효 외에는 그리 불평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거…….”
유승혁 감독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이번 이닝부터 타구의 질이 달라졌다─.
첫 타석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박진효 타석에 이르러서 그 사실을 확실하게 감지해낸 것이다.
“구위가 떨어진…… 건 아니겠지.”
“예. 원래부터 똥볼이었는데요 무슨.”
“그러면 볼 배합이라도 읽힌 건가……. 뭔가 애매한데…….”
말로 표현하기 애매하지만, 타격 직전에 덜컥하는 느낌이 사라졌다. ‘당했다’ 싶은 느낌의 정타는 아니었으나, 방향에 따라서 어떻게 돼도 이상하지 않은 타구가 연달아 나왔다.
최태웅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으나, 긴장하기는커녕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저쪽에는 진효 형이 있으니까. 요령이라도 퍼트렸나 보지.’
최태웅이 피식 웃으면서 1루 쪽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박진효가 마주 보면서 씨익 웃었다.
‘그래 봤자 발악이지.’
투타가 서로에 대해서 잘 아는 경우에는 타자가 유리하다고도 한다. 야구는 언제나 투수가 먼저 수를 두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태웅도 그 ‘요령’이 뭔지 짐작할 정도로는 박진효에 대해 잘 알았다.
설마하니 시즌 내내 퍼펙트를 지킬 생각이라도 했을까 봐.
순수하게 피지컬 대결로 들어가도, 쿨존에만 꽂으면 높은 확률로 제압할 수 있다. 이미 두 가지 특성을 더 오픈했다는 걸 생각하면 가끔 안타 맞는 것쯤은 ‘애교’였다.
아무리 그래도 시즌 내내 방어율 0인 건 양심불량이지. 타팀 팬들은 뭔 재미로 야구 보겠어.
퍼억!
“스트라이크!”
7번 타자 백경석.
그에게 119km/h짜리 한가운데 직구를 꽂은 최태웅이 히죽 웃었다.
‘그리고 아직 공략법이 퍼진 것 같지도 않고.’
한눈에 딱 보기에도 백경석은 코너워크된 체인지업을 기다렸다.
‘아무것도 예측하지 말고 보고 때려라’라는 방침을 모든 타자가 받아들일 리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이가 있는 편이라고 해봐야 20대. 팀내에서 그렇게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할 터였다.
‘수 싸움 해주겠다면 나야 땡큐지!’
2구. 의식의 사각(死角)이 아니더라도 타자들이 가장 날리기 어려워하는 몸쪽 낮은 코스에 체인지업. 방망이를 낼 엄두도 못 내고 움찔하는 백경석의 모습에 주먹을 불끈─
“어?”
최태웅은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포수인 장기석이 캐치하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송구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세이프!”
결과적으로 장기석은 공을 던지지 못했다. 박진효가 잡을 엄두도 안 날 만큼 압도적인 타이밍으로 2루 베이스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
방심했다며 혀를 차는 장기석과 달리. 최태웅은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도루할 만한 리드가 아니었다거나, 박진효가 원래 도루 많이 하는 주자가 아니라는 건 나중 문제였다.
‘스트라이크존에 아무 반응도 없었는데?’
보내기 번트를 한다거나, 도루를 지원하기 위해 고의 헛스윙을 한다거나. 타자에게 이런 의사가 있으면 당연히 쿨존과 핫존이 크게 변한다. 히트 앤 런이나 런 앤 히트도, 100퍼센트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주자와 호흡을 맞춰야 하는 만큼, 마음에 안 드는 공이라도 어떻게든 건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뛰는 작전이 나왔는데 일부러 특정 코스에 집중하는 타자 따위는 세상에 없었다.
‘진효 형이 혼자서 뛰었나? 그린 라이트도 아닌데?’
슬쩍 돌아보았더니, 샤크즈 더그아웃이 아주 조금 수선스러웠다. 그걸 보면 벤치에서 지시한 도루는 아닐 가능성도 높았다.
“미안하다. 공이 느려서 내가 좀 신경 썼어야 하는데. 원래 잘 뛰는 애도 아닌데, 리드도 별로라서 바보짓 했네. 이건 내 실수야,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실점하면 어때? 점수 차이가 한두 개도 아닌데. 투아웃이기도 하고. 다음 거 잡으면 되잖아.”
따지고 보면 최태웅으로서는 처음으로 득점권에 주자를 내보낸 상황이다. 긴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장기석이 올라와서 다독였다. 최태웅은 적당히 대꾸하면서 2루 주자인 박진효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귀찮게스리. 이런 꼴 한 번 보였으니, 앞으로 어쩌다 출루한 놈들은 툭하면 뛸 거 아냐.’
타자 반응으로 작전을 예측할 수 있다 보니, 도루에 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뛸 타이밍에 피치아웃을 하면 그만이고, 그러고도 못 잡으면 팔자인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플레이의 의미를 완벽하게 간파하는 팀은 없겠지만……. 발야구에 약점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거슬리게 된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약점이 튀어나왔다는 것은 의외로 짜릿한 데가 있었다. 앞으로도 예상 못한 방향에서 역습이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역시……. 야구 어려워.”
나직하게 구시렁거리면서, 최태웅은 투수판을 밟았다.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일반 미션 ‘삼구 삼진’을 달성했습니다.]
[5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어려워, 어려워. 야구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