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65화 (65/90)

< 괴물 배터리 -066- >

066.

엎어치나 메치나. 모로 가도 서울로만.

체인지업에 미묘하게 낙폭이 붙어서 오히려 난처했으나, 써먹는 데는 문제가 없을 듯했다. 제구가 문제지만, 낙폭 자체는 거의 일정하니까 염두에 두고 살짝 높은 지점을 노리면 그만이지. 신경 쓸 부분이 아주 약간 늘어났을 뿐이다. 보통 투수가 투구할 때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날로 먹는 범주다.

-9번 타자! 이담휘!

-물어라! 뜯어라! 날카로운 상어의 이빨!

쩌렁쩌렁한 응원가 속에서 왜소한 체격의 타자가 등장했다.

그립을 쥐고서 신중하게 살폈더니, 존 전체가 균일하게 빛나고 있다.

주자가 있을 때 스트라이크존의 상태가 저렇다면 보내기 번트나, 도루 지원성 헛스윙. 하지만 지금처럼 베이스가 깨끗한 상황에서는…….

따악! 따악!

“파울!” “파울!”

예전에는 투구수 테러만큼 까다로운 것도 없었다만. ‘닥터 K’를 손에 넣었더니 별다른 감흥이 없어졌다. 아니, 오히려 알아서 밥상을 차려주는 셈이니까 고맙다고 해야지. 안 그래도 감독님이 내 불펜 피칭을 못 미더워하는 눈치라. 확실하게 어필하고 싶었거든.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

“140km/h…….”

공 4개로 타자 두 명. 그야말로 이닝을 후루룩 마셔버리는 피칭.

의기양양하게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최태웅을 선발이었던 현태준이 흐뭇하게 반겼다.

감독으로서도 뿌듯해야 마땅한 상황이지만, 유승혁 감독은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쟤 혹시, 불펜 피칭 싫어하는 거 아닐까?”

“예?”

“이자성이도 경기 당일에밖에 피칭 안 하잖아. 지금이야 베테랑이라서 다들 그러려니 하지만, 신인 때는 어디 그랬겠어? 눈치 보여가지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왼팔 다친 다음에 오른팔로 전향해서 그러나? 왜, 그런 애들 종종 있잖아요. 다치고 난 다음에 예민해지는.”

“일리는 있는데……. 혹사도 아니고 뭐에 맞아서 다친 거 아니었나?”

아리송하기 짝이 없었으나, 앉아서 쑥덕거린다고 대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었다. 다음 이닝에도 던져야 하는 놈을 불잡고 물어보기도 뭐했기에 궁금증은 나중으로 미뤘다.

-뛰어라, 뛰어, 김호범! 이겨라! 이겨라!

-예끼! 앞으로 던져라!

정확히 1번부터 시작되는 타순.

신인에게 너무 맥없이 당한 게 영향을 미친 걸까. 유격수 이담희의 실책에 힘입어 선두타자가 출루한 것을 기점으로, 엘리펀츠 타선은 노도와 같이 샤크즈를 몰아쳤다.

7회 초에만 대거 5득점. 단숨에 6점을 앞서나가게 되자, 불펜 근처에서 서성이던 승리조 이진석이 벤치로 돌아와 앉았다. 신인에게 1점 리드하는 마운드를 언제까지 떠맡기기가 껄끄러웠을 뿐. 이만큼 점수가 벌어졌다면 아무런 걱정 없이 최태웅에게 ‘본업’에 충실할 것을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7회 말.

똑같이 1번부터 시작되는 타순.

초구 스트라이크를 묵묵히 지켜본 강성규가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걸 왜 못 치는 거야?’

나승현에게 들은 바대로 약간의 낙폭이 있다는 건 알겠다. 고속 체인지업과 저속 체인지업이 있어서 타이밍을 빼앗긴다는 것도, 일단 듣기는 했다. 그야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한 타석쯤 ‘엇’하고 삑사리가 날 수는 있지. 하지만 결국에 구종은 포심 패스트볼과 체인지업뿐이다. 타이밍으로 장난질 치는 게 고작이라는 말이다.

‘체인지업이야 무조건 떨어지면 좋은 거지. 낙폭을 줄였다 늘렸다 하면서 쓰는 놈이 어딨어? 운 좋게 한 번씩 긁힌 거겠지.’

하필 지금 긁히는 공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만. 포기할 건 포기하고 가야 한다. 처음 만나는 사이라면 투수가 훨씬 유리한 게 당연하거늘. 신인이랍시고 깔보니까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공에 전력을 쏟지 못하는 것이다.

2구.

스트라이크라면 무조건 휘두를 작정으로 우선 방망이가 나갔다.

스윙은 직구 타이밍.

하지만 느린 공. 미세한 낙폭. 브레이크.

“……!”

리드오프답지 않게 두꺼운 허리가 억지로 경직된다.

허릿심으로 강제로 집어삼킨 스윙이 뒤늦게 공을 후려쳤다.

따악!

“와아아아아아아!”

“빠졌……!”

관중석에서 산사태 같은 함성이 솟아올랐다가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총알 타구. 투수 강습이었다면 어디 한 군데를 부러뜨리고서라도 강제 내야안타가 되었을 만큼 위력적인 스피드. 그런 공이 암담하게도 고꾸라지듯 다이빙한 유격수의 글러브로 쏙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1루! 저놈 빨라!”

“빨리 빨리!”

퍼억!

“아웃!”

베이스에 도착하자마자 강성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굳이 심판의 콜이 아니더라도 1루수 미트가 먼저 출렁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운도 더럽게 없네……. 어떻게 그걸 딱 잡아가지고…….”

그러고 보면 가끔 이런 경기가 있다. 타격진 전체가 조절나사가 고장난 것처럼 대수롭지도 않은 공에 삐끗해대는. 어쩌다가 제대로 얻어맞은 공도 무슨 약 올리는 것처럼 야수 글러브로 빨려들어가는 때가.

‘저놈이 선발 아닌 거 하나만 다행이네. 그랬으면 뭔가 대형사고 하나 터졌을 삘인데.’

냉정하게 말하자면 샤크즈에는 아직 ‘공략법’이 없었다. 스콜피온즈라는 제물이 7이닝씩이나 싸워준 덕분에 어떤 공을 던지는지 정도만 모두가 파악하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이런 투수…… 본 적이 없는데?’

투구 패턴을 숙지한 뒤에 타석으로 들어온 2번 이용신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하다는 듯이 완급조절형이라고 생각했는데. 포심, 투심, 싱킹 등등 패스트볼만 가지고 싸우는 투수는 있어도 최태웅 같은 경우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피칭 스타일을 보면 ‘빠른 공’과 ‘느린 공’ 자체가 하나의 구종이라고 해야 하지 않은가.

‘140초반. 130초반. 110후반. 패스트볼만 해도 세 패턴.’

여기에 체인지업이 두 종류. 만약 정말로 체인지업의 낙폭을 조절할 수 있는 거라면, 그것만으로도 체인지업이 네 종류로 불어난다.

완전히 똑같은 궤적을 그린다고 해도 스피드가 10km 차이나면 이미 다른 공.

그런 의미에서 최태웅은 7가지 구종을 구사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폼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다고는 들었지만……. 7종류의 공을? 폼으로 구별해서 치라고?

따악! 따악! 퍼억!

“파울!” “파울!” “스트라이크 아웃!”

그쯤 되면 그냥 눈으로 보고 허겁지겁 치는 게 더 반응하기 쉬운 거 아니냐?!

***

퍼억! 따악!

“스트라이크!” “아웃!”

7회 말도 삼자 범퇴.

타율 3할 7푼 5리. 리그 2위의 소정원마저 2구만에 씹어 삼키는 광경을 보고서, 더그아웃에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았다.

“장난이 아닌 게 아니라, 이건 정상이 아니지.”

“미친…….”

솔직히 말해서 스콜피온즈전의 7이닝 퍼펙트 때만 해도 운이 좋았을 뿐이라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능구렁이형 피칭으로도 물론 리그 정상에 군림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경험과 연륜이 필요하다. 타이밍 흐트러뜨리는 피칭 스타일에 초심자의 행운이 더해진 결과일 뿐이다. 무엇보다 1군 타자들의 데이터를 분석할 틈도 없었을 게 아닌가.

하지만 야구에서 우연은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한 사람에게만 비슷한 결과가 계속해서 찾아온다면, 그건 틀림없는 필연이고 스펙이다.

유승혁 감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불펜에서 제대로 안 던진 게 아니었어.”

“예?”

“애초에 저놈은 팔로 야구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불펜에서는 던지고 싶어도 던질 수가 없었던 거야.”

“…….”

선수들은 괜히 묘한 위압감을 느끼며 최태웅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더그아웃만 본다면 노히트 노런이 진행 중이라고 해도 믿어질 법한 모습이었다.

이미 한바탕 집중력을 쏟아부은 탓인지. 8회 초의 엘리펀츠 공격은 맥을 못 추었다.

삼자 범퇴로 공수가 교대되면서, 경기장이 낮은 함성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박훈! 박훈! 박훈! 박훈!

-볼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따리 쿵따!

신장 202cm. 체중 118kg.

타율 3할 1리(10위). 홈런 12개(공동 1위).

샤크즈 타선에서 클래스를 달리하는 국가대표 우타 거포.

그래 봤자 오늘은 무안타 상태지만. 아무래도 ‘이름값’이 만드는 아우라는 분명히 존재했다. 머리로는 ‘쿨존에 던지면 땡이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최태웅은 알게 모르게 입안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홈런 아니면 안 쳐 타입이라면서 컨택도 된다던데……. 맞혀 잡아도 괜찮을까 모르겠네.’

느린 피칭 스타일에는 장타가 덜 나온다는 특징도 있었다. 반발력이 안 생기므로 타자의 힘만으로 멀리 날려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피할 정도까지도 아니다. 그저 쿨존에 던지기만 하면 된다는 점은 경기 외적으로도 멘탈을 다잡기에 최적의 요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핫존 자체는 압도적일 것도 없었다. 타율 2위였던 소정원의 스트라이크존에도 공략할 구석이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립을 쥔 최태웅이 천천히 투수판을 밟았다.

어차피 빗맞아도 힘으로 넘길지 모른다면 아예 가장 느린 공.

70km/h짜리 서클 체인지업.

쐐애액!

“……!”

공기를 잡아 찢는 흉포한 파공성이 마운드까지 쏟아졌다. 오죽하면 공이 미트에 박히는 소리가 다 안 들렸을 정도였다.

‘무슨 바람 일으켜서 담장 넘기려고 그러나?’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간담이 서늘했다.

‘닥터 K’의 효과로 극단적인 위력을 얻었을 때라면 모를까. 자신의 공 자체를 못 건드리는 타자는 많지 않았다. 저만한 풀 스윙이라면 당연히 정확도는 떨어지겠지만, 제대로 맞으면 ‘철벽 내야’의 효과가 발동한 땅볼이라도 힘으로 내야를 뚫을 성 싶은 위력이었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이 아저씨는 ‘닥터 K’ 효과로 붙고 싶은데…….’

전에 시속 130km대의 직구로 방망이에 금이 가게 한 적이 있듯이. 구위가 늘어나면 그만큼 타구의 위력도 억눌러진다. 비교 분석해본 적이 없다지만 장타가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만은 분명했다.

‘문제는 스트라이크 하나를 어떻게 안전하게 따느냐인데……. 하나만 빼볼까? 어차피 내가 거의 스트라이크만 던지는 거 알고서 막스윙하는 것 같은데.’

타자들은 다양한 타이밍의 공에 혼란스러워하는 모양이지만. 던지는 입장에서는 어차피 다 비슷한 효과이기 때문에 적당히 골라잡는 경우가 태반이다.

자신의 구속을 생각하면 느린 공보다는 빠른 공에 방망이가 무심코 튀어나올 가능성이 더 높으니 직구. 120km/h 정도. 한가운데 높은 코스──

따아악!!!

“……!”

한순간. 공이 시야에서 휙 사라졌다. 마치 연속사진의 한 장만을 잘라낸 듯해서, 어디를 쳐다보면 좋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야아아!”

“넘어가라! 넘어가라! 넘어가라!”

“……!”

가슴이 철렁한 가운데. 최태웅은 다른 선수들을 따라 반사적으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새하얀 점 하나만이 묘하게 동떨어져서 솟구치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이런 미친! 아, 왜왜왜!”

하지만 벌떡 일어난 관중들의 희열이 환호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담장을 살짝 넘어갈 법한 공이, 필사적으로 뻗은 중견수의 글러브 포켓에 걸치듯이 붙잡혔던 것이다.

“…….”

최태웅은 무심코 느릿느릿 1루로 뛰던 박훈을 돌아보았다. 거물이라는 걸까? 홈런이나 다름없는 타구가 잡혔는데도 그는 가볍게 혀만 한 번 차고서 더그아웃으로 방향을 틀었다.

“응?”

그때 문득. 최태웅이 눈살을 찌푸렸다. 더그아웃 한쪽을 쳐다본 박훈이 뭐라고 대답하듯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던 것이다.

무심코 따라간 시선 끝에서는 박진효가─ 명백히 ‘매의 눈’을 가장 많이 겪어본 프로 타자가 자신을 보면서 히죽 웃어 보이고 있었다.

***

“어우, 소름. 저 돼지 새끼. 어떻게 저 느린 걸 지 파워만 가지고 저기까지 날리냐.”

“난 박훈한테 홈런 맞은 적 한 번도 없는데.”

“볼넷만 주니까 그렇지, 병신아.”

“나랑 붙을 때는 꼭 20홈런이니 40홈런이니 그랬단 말이야. 그런 거 대주면 자료화면 자꾸 나와. 두고두고 굴욕이라고.”

큼지막한 타구에 깜짝 놀라서 일어났던 엘리펀츠 선수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쑥덕거렸다.

간담이 서늘했지만, 야구는 결과가 전부다. 이제 어지간히 말아먹지 않는 한, 남은 타석에 박훈이 등장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기찬아. 넌 아까부터…… 아, 기록하는 거야? 태웅이?”

“아, 예. 그냥 이것저것 참고 좀 하느라고요.”

현태준이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서기찬은 약간 머쓱해져서 끼적거리던 기록지를 옆으로 스윽 감추었다.

“전력분석팀에 해서 달라고 하면 줄 텐데? 우리 팀 것도.”

“그냥…… 제가 직접 공부하는 버릇도 한 번 들여보려고요.”

“어이구, 기특하네. 그래. 열심히 직접 해봐야 자기 재산이 되지.”

대선배에게 들은 청찬이 기분 좋아서일까. 서기찬은 괜히 꼼지락거리면서 기록지에 최태웅의 방금 전 투구에 대한 정보를 기재했다.

-박훈. 2구 중견수 플라이 아웃

-6타자 연속 범퇴(2이닝) 12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