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65- >
065.
샤크즈와의 3연전. 엘리펀츠에서 선봉으로 내세운 투수는 오랜만에 유망주였다.
서기찬. 고등학교를 졸업한 시점에서 153km/h를 뿌리는 우완 정통파 오버핸드. 고교야구 시절에는 구위 하나로 활약했으나, 프로에 와서는 밋밋한 변화구가 통타당한 전형적인 케이스. 서드피치가 어느 정도 합격점을 받게 된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선발 수업. 단조로운 구종이 문제되었을 뿐, 지구력 면에서는 진작부터 선발 재목으로 언급되던 선수.
팀 전체가 리빌딩을 하는 이 시점에서는 가장 유력한 6선발 후보로 여겨진 모양이었으나…….
따악!
“3루 늦었어! 2루! 그냥 2루로!”
“세이프!”
전광판을 본 유승혁 감독이 입맛을 다셨다.
시속 141km.
6회에 벌써 98구를 넘긴 시점이라고 해도 그렇지. 선발투수감을 테스트하는 자리에서 유망주가 보여도 될 법한 스피드는 아니었다.
“오늘따라 영 매가리가 없는데. 150 찍은 거 오늘 하나도 없었지?”
“어, 예. 그러네요……. 불펜에서는 썩 나쁘지 않았는데…….”
“혹시 내가 눈 뗀 사이에 어디 삐끗하고 그런 거 아니지?”
“지 혼자 삐끗하고서 입 꾹 다물고 있는 거면 제가 알겠습니까? 감독님 말씀대로 매가리 없어서 그렇지. 폼이 꼬이거나 한 느낌은 아닌데요.”
“언놈은 게임에서 쌩쌩하더니 불펜에서 보면 비실비실하고. 언놈은 불펜에서 쌩쌩하더니 게임에서 비리비리하고. 골고루들 한다, 증말.”
유승혁 감독이 노골적으로 힐끗 쳐다보고 가는지라,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한쪽 볼을 긁적거렸다. 나하고 서기찬은 사정이 전혀 다르지만, 납득시킬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들여서 강제로 받아들이게 한다면 모를까.
서기찬의 등판은 거기까지였다.
5.2이닝 4실점. 1대 4로 패전투수 요건.
퀄리티 스타트도 못 되지만, 6선발감이라고 생각하면 가망이 없다고 할 것도 없는 정도의 결과였다. 선수들은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서기찬을 격려했고, 교체된 투수가 남은 타자 한 명을 깔끔하게 삼진으로 잡아냈다. 하지만…….
“야이 호로 새까! 그렇게 똥오줌이 안 가려지냐!”
“때와 장소를 가려야 될 거 아냐! 샤크즈 가뜩이나 4연승 중인데, 이 타이밍에 코찔찔이 올려가지고 테스트하는 게 말이 되냐! 그런 건 좀 널럴할 때 해야지!”
“연승할 때 계속 몰아쳤어야지! 스윕 한 번 했다고 팔자 늘어졌냐? 배불러서 터질 것 같지!”
점수 차이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중간에 상대 실책으로 간신히 한 점을 따라잡았을 뿐. 오히려 8회 말에 교체된 투수가 쓰리런 홈런을 얻어맞으면서 2대 7.
역전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까지 되자 관중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그아웃 근처에 자리 잡고 있던 몇몇 관중은 들으라는 듯이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똥망한 게임도 아닌데 너무하는구만. 나는 괜히 불편한 기분이 들어서 쭈뼛쭈뼛 주위 선배나 코칭 스태프의 눈치를 살폈다.
2군에서도 못했을 때 욕하는 관중은 있었으나, 여기와는 머릿수나 임팩트부터가 달랐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뉴스감이지만, 계란이나 물통이 날아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신랄하고 독살스러운 분위기였다. 홈에서의 3연전은 모두 이겼기에 미처 이런 분위기를 느껴볼 새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또 보면, 선배들은 별로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백화점 같은 데를 걸을 때 들려오는 배경음악 취급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욕설들이 진짜로 안 들리는 것일 리는 없다. 감독님만 해도, 욕설이 들리는 관중석을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노골적으로 불만스럽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래서 시벌. 연승하는 게 싫어. 뭐만 좀 시도했다 하면 헛짓거리로 분위기 깼다느니 뭐라느니 짖어대잖아.”
“연패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연패는 당연히 더 싫지! 안 그래도 팀 막장인데, 미친 짓거리로 아예 말아먹으려고 환장했다고 그러지. 쓰벌, 그렇다고 검증된 애들만 굴려서 리빌딩은 언제 해? 막말로 막판에 잔여 경기 할 때 빼고. 중간 팀한테 널럴한 게임이 어딨어? 다 틈틈이 하는 거지, 틈틈이.”
이거 참. 저런 노골적인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으니까, 새삼 또 내가 프로 선수가 되었다는 실감이 나네. 저런 불평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들을 수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리빌딩이랑 성적을 같이 해결해야 한다고 했지?’
새삼스럽게 강충식 스카우트의 말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리빌딩만 하면 된다고 했다가, 의외로 성적이 나오니까 말을 바꿨다고 하던가? 그런 의미에서는 감독님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리빌딩이라고 해봐야 무식하게 압축해서 말하자면 ‘싹수 있는 유망주를 뚝심 있게 기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집중적인 훈련으로 역량을 끌어올리는 것은 겨울이나 봄에 하는 일. 경기에 많이 내보내는 것만큼 유망주를 쉽게 진화시킬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성적도 유지해야 한다면 말처럼 쉽게 안 되지. 검증된 베테랑 위주로 기용하면서 틈틈이 기회를 줘야 하니까.
물론, 생각해보면 리빌딩과 가을 야구를 동시에 노리는 것은 어느 구단이나 하는 일이다. 감독님의 경우에는 처음과 말이 달라진 게 마음에 안 드는 거겠지.
“경기 종료!”
결국, 오늘 경기에 내가 투입될 일은 없었다.
불펜에서 던지는 걸 보고 ‘최태웅이 공이 오늘 변변치 않다’라고 판단했는지, 그냥 평범하게 끼워 넣을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다. 아직 그렇게 오래 쉰 것도 아니니까, 기다리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
퍼억! 퍼억! 퍼억!
“으음……. 으으음…….”
다음 날에도 내 불펜 피칭을 감상하는 감독님의 표정은 썩 탐탁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이해는 간다. 하루 더 쉬어서 어깨가 가벼워지기야 했다지만. 그런다고 프로 감독의 눈에 감흥을 줄 만큼 구위가 올라갈 리는 없었으니까.
감독님은 ‘혹시 타자가 없으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타입이냐?’라면서 직접 타석에 들어와 보기까지 했다. 그래도 달라지는 게 없자,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해가 안 되네. 지금도 나름 힘껏 던지는 거라면서. 원투 스트라이크 잡을 때 설렁설렁 던지는 거랑 별로 다를 게 없는데.”
“그렇긴 한데요. 어차피 전력투구하면 오래 던지지도 못해요.”
“…….”
어째 살짝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감독님 뇌리에는 ‘닥터 K’ 효과로 던진 공에 대한 임팩트가 어지간히도 컸나 보다. 대뜸 내팽개치지는 않겠지만, 등판 기회가 한참 뒤에나 찾아오는 건 아닌가 몰라…
“선배님. 다음에는 저도 좀 받아주시겠습니까?”
“서기찬? 너, 어제 선발이었잖아.”
“밸런스가 조금 헝클어진 것도 같아서요. 가볍게 던질 겁니다.”
연습 마운드에서 내려왔더니, 서기찬이 곧바로 그 자리에 들어갔다. 심심해서 내가 던지는 걸 구경하는 줄만 알았던 나는 조금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불펜 피칭을 매일 하는 타입의 선수도 선발 다음 날 정도는 자제하는 편이라던데. 뭐, 컨디션 조절하는 방법이야 사람마다 워낙에 천차만별인 법이지만.
마땅히 할 일도 없었던지라, 일단은 나도 그 자리에 남아서 서기찬의 불펜 피칭을 구경했다. 가볍게 캐치볼 몇 개를 주고받던 서기찬이 투수판을 단단하게 밟았다.
뻐억! 뻐억!
아우, 귀 따가워. 실내 연습장이라서 그런지, 폭탄 터지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요란하게 메아리쳤다. 바로 직전에 던진 내 공하고 무의식적으로 비교가 돼서인지, 미트에 훅훅 박히는 공이 마치 포탄처럼 느껴졌다.
“헐. 152km?”
무심코 스피드건의 숫자를 본 내 입에서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가볍게 던진다메? 그런데 어떻게 어제 선발로 뛰었던 놈이 불펜에서 이 스피드를 내? 정작 경기에서는 150짜리 하나를 못 찍어놓고서?
“얌마. 어제 올려줬을 때 이렇게 던져보지 좀. 어떻게 떠먹여줘도 뱉을 수가 있냐?”
“그게……. 죄송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럴 정도였는데 감독님은 오죽했을까. 어처구니가 없다는 타박에 서기찬이 풀죽어서 고개를 수그렸다.
***
엘리펀츠의 선발 로테이션은 가까스로 궤도를 회복한 상태였다. 물론, 이것은 불펜 혹사와 더불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최태웅의 7이닝 호투로 말미암은 것이다. 시즌 운영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선발진에서 2게임 정도는 넉넉하게 소화해줄 필요가 있었다.
현태준.
11년 동안 엘리펀츠에서만 활약해온 프랜차이즈 선발투수는 바로 그렇게 팀 사정에 보탬이 되는 플레이를 선보이고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높이 뜨는 공! 우측 담장! 우측 담장! 우익수가 잡아냅니다! 마지막 순간에 타구가 힘을 잃었죠?
-지금 타구의 경우는 현태준 선수에게 운이 따라줬습니다. 공이 가장 높이 뜬 시점에 역풍이 불기 시작했거든요. 타자가 낮은 직구를 기다렸는데 실투성으로 가운데 몰린 점이 오히려 도움이 됐어요.
-제가 보기에는 5회부터 전반적으로 샤크즈에서 때려낸 타구의 질이 좋아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이건 현태준 선수의 구위가 떨어진 겁니다. 시범경기에서는 소화 이닝이 짧아서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정규 시즌에 들어와서 보면 현격하게 드러나죠. 현태준 선수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현명하게 대처했습니다.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판단해서 3년 동안 아주 서서히 맞춰 잡는 투수로서 변신을 시도했거든요.
-3년 전부터 탈삼진 순위에서 현태준 선수의 이름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한 것도 그런 문제 때문이겠군요.
-그런데 벤치로서는 참 골치 아프게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자기 구위가 하락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불펜을 준비할 시간이 늘 빠듯합니다. 그렇다고 이쯤 되면 구위가 하락하겠구나, 하고 미리 교체 투수를 준비하기에는 엘리펀츠의 불펜 사정이 여유롭지 않거든요.
-그러면 지금 투수코치가 올라가 있는 것도, 교체의사를 확인하는 것 외에 불펜이 예열할 시간을 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예. 시간을 끄는 차원에서 현태준 선수가 타자 한 명쯤 더 붙들고 있어볼 수는 있지만, 이번 이닝을 끝까지 책임질 가능성은 적다고 봐야겠죠.
-이번 달은 거의 불펜과 선발의 경계가 없을 정도로 벌떼 야구를 하고 있는 엘리펀츠인데요. 지금 점수 차이에서 나올 만한 선수가……. 아, 여기 핫한 선수가 몸을 물고 있네요. 스콜피온즈전에서 7이닝 퍼펙트로 충격적인 데뷔전을 치른 신인이죠?
-데뷔전에서 갑작스럽게 59구를 던졌지만 오늘로 3일 만의 등판입니다. 퓨처스 리그에서의 연투능력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기대해볼 만하시다고 보는데요…….
***
“미안하게 됐다. 마음의 준비라도 할 시간은 끌어줬어야 하는데”
“에이, 뭐 그런 말씀을 다 하세요. 이런 경기도 있고, 저런 경기도 있는 거죠. 저만 믿으십쇼.”
6회 1아웃. 2실점.
3대 2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
흥분된다는 듯이 히죽거리는 최태웅을 보고 있자니, 유승혁 감독은 미묘하게 입맛이 썼다.
현태준이 오래 못 버티면 최태웅을 일찌감치 투입할 수도 있다는 구상이야 했다. 그래도 되도록이면 이기든 지든 넉넉한 상황에서 말 그대로 이닝만 소화해주길 바랐다. 비실비실한 불펜 피칭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더더욱. 실전에 나가면 달라지는 타입이라고 떠들지만, 선수의 자기 신고를 완벽하게 믿는 감독 따위는 세상에 없었다.
한편, 당장에 최태웅을 상대하게 된 8번 타자 나승현은 희미하게 아랫입술을 핥았다.
‘7이닝 퍼펙트 그놈.’
신인이라고 해도, 이미 적잖은 이닝을 한 번에 소화한 뒤다. ‘어떤 공을 던지더라’ 정도의 분석 리포트는 이미 나와 있었다. 꼼꼼하게 검토한 것은 아니었으나, 타격코치가 와서 읊어주자 확실하게 기억이 되살아났다.
‘완급조절 타입. 투 스트라이크에 몰리면 전력투구. 철저하게 타자의 쿨존을 노림. 가끔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는 한복판 직구를 구사. 낙차 큰 체인지업은 현재까지 결정구로만 사용.’
연습 투구가 끝나자, 나승현이 신중하게 타석에 들어섰다.
얼핏 표정을 읽어보건대, 신인 특유의 긴장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라고 들이받는 타입일지언정 무섭다고 도망치는 타입은 역시 아니라는 뜻. 기록을 봐도 쉽사리 볼넷을 남발하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루킹이나 헛스윙보다는, 파울로 카운트를 버는 놈. 고속 첸접이랑 저속 첸접이 10km 가까이 차이가 나서 그게 통하는 모양인데……. 그러면 나도 쉽게 가지 뭐.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리라는 말도 있고.’
철저하게 쿨존을 노린다면, 신인답지 않게 정보를 다룰 줄 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자신이 리드오프 못잖게 물고 늘어지는 타입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터. 똥볼이나 다름없는 걸 커트해서 투 스트라이크가 되면 비웃으면서 고마워할 것이 분명했다.
루키면 루키답게 공 하나하나를 이 악물고 던져야지. 꼴에 페이스 조절을 해? 그런 괘씸한 놈은 엉덩짝을 두들겨…….
따악!
“……어라?”
제대로 혼쭐을 내주려고 벼르던 초구. 예상대로 너무 허접해서 오히려 무심코 지켜보게 될 것 같은 슬로우볼.
다른 패턴의 구속에 눈에 익기 전에 재빨리 갈긴 것이, 배트 아랫부분을 스치고 1루수에게 데구루루 굴러갔다.
여유롭게 받아낸 1루수가 직접 베이스를 밟으면서 포스아웃.
나승현은 순간 얼떨떨했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타격코치 쪽을 돌아보았다.
‘초구 2구에 나오는 첸접은 낙폭 없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