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63화 (63/90)

< 괴물 배터리 -063- >

063.

따악!

“아웃!”

한 번 패닉에 빠지기 시작한 뒤부터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테트리스 최고 속도에서 작대기 하나를 잘못 꽂아서 ‘어버버버’하게 된 느낌으로 무턱대고 터무니없는 스윙을 갖다 바치고 말았다.

“썅! 저 새끼는 무슨 강박증이야 뭐야?”

“미친…….”

“지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던졌다 하면 스트라이크존이야! 한 100마일쯤 나오는 것도 아니면서!”

스콜피온즈 타자들은 이제 답답하거나 혼란스러운 걸 넘어서 부아가 치밀었다. 엘리펀츠 타선은 갈기갈기 찢어진 야수진의 멘탈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박용진 선수! 뜁니다!

-2루수! 주자가 도루하는 줄 알았다가 타구에 반응이 늦었어요! 안타, 안타!

-들어올 수 있어요! 들어올 수 있어요! 박용진 선수 그대로 질주합니다!

-세이프! 드디어 역전! 4대 5! 무너진 선발의 자리를 최태웅 투수가 유유자적한 피칭으로 틀어막는 사이에! 마침내 엘리펀츠가 저울추를 뒤집고 맙니다!

역전타가 나오는 순간. 관중석 양 진영의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었다. 오늘 하루쯤 져도 상관없으니까 호흡이나 잘 고르라고 생각하던 골수팬들마저 얼굴이 시뻘게져서 기립해 환호했다.

“씨이바알…….”

“또? 미친 거 아니야?”

그리고 8회 초. 엘리펀츠 수비.

당연하다는 듯이 마운드로 뚜벅뚜벅 걸어올라오는 최태웅의 모습을 보고서. 스콜피온즈 타선은 완전히 눈앞이 캄캄해졌다.

***

-최태웅 선수가 계속해서 마운드에 오르는데요. 이 투수 운용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사실, 이상하다고 볼 일은 아닙니다. 경기 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최근 엘리펀츠 불펜진의 과부하는 상당한 수준이니까요. 심영호 선수의 선발등판이 손톱 부상으로 무산된 탓에, 장기적으로 보자면 오늘 경기에 선수 하나를 제물로 바쳐서라도 불펜진에 숨을 불어넣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면 최태웅 선수가 원래는 오늘 팀을 위해서 희생할 작정이었다는 건가요?

-제 생각에는 지금 유승혁 감독도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늘 막 이적해온, 그것도 트라이아웃으로 프로 입문한 신인한테 이런 활약을 기대하는 감독은 아무도 없을 거거든요. 팀을 위한 희생이라면 희생인데, 2~3이닝 정도만 소화해주기를 바라고 올렸던 게 어어하는 사이에 여기까지 왔다고 봅니다.

-확실히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불펜을 보면, 최태웅 선수가 딱히 흔들리는 것도 아닌데 아까부터 이진석 투수가 준비 중이거든요. 이한양 해설위원의 말씀대로 언제든지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데 자꾸 아웃을 잡아내니까. 어어어어 하는 사이에 여기까지 왔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은 피칭 내용과 상관없이 투수 교체해도 이상하지 않은 타이밍이기는 합니다만, 여기서 또 놀라운 게요. 5이닝을 소화한 이 시점에서 최태웅 선수의 투구수가 49개입니다. 탈삼진을 5개나 뽑아냈는데도 이런 투구수라는 게 이해가 가십니까?

- 어우, 굉장한데요. 생각해보면 아까 5회를 제외하면 볼을 언제 던졌지? 싶을 정도로 스트라이크 위주의 피칭을 하고 있었거든요.

-이게 또 사실 신인으로서 훌륭한 점입니다. 아무리 밋밋한 공이라도 타자가 때려서 무조건 안타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하지만 도망치는 피칭을 하다가 볼넷이 나오면 무조건 출루시키는 게 되니까요. 볼넷 줄 바에는 홈런을 맞으라는 조언의 전형적인 모범을 보이는 게 지금 최태웅 선수의 피칭입니다. 최태웅 선수가 홈런을 맞았다는 건 아니지만요.

***

“차라리 빠르게 승부하자.”

“빠르게?”

“생각해보면, 카운트 잡는 공 자체는 9할 이상이 체인지업이야. 그걸 노리자고.”

“체인지업 노리기 힘드니까, 그건 걷어내고 패스트볼 노리자고 하지 않았어요?”

“그때랑은 상황이 달라졌잖아! 생각해보면 미묘한 완급차 때문에 헛치게 되는 거지, 공 하나하나가 까다로운 건 아니니까. 다른 스피드에 눈 버리기 전에 쌔려버리면 그만이야.”

“그러려면 초구?”

새로운 대책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으나, 어차피 지금 이대로는 속수무책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시도해보는 편이 맞긴 했다.

하지만…….

따악!

“아웃!”

따악!

“아웃!”

벤치의 오더대로 방망이를 뻗었던 타자들의 표정이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이쯤 되면 농담이 아니고 자기들 벤치 오더가 도청당하는 건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초구 체인지업을 노리려고 하자마자, 언제 그런 공을 던졌느냐는 듯이 느린 직구가 연달아 퍽퍽 꽂혔던 것이다.

그것도 타자 개개인이 가장 싫어하는 코스에.

‘생각은 했지만. 기대한 것보다 효과 좋은데?’

물에 탄 잉크처럼 널찍하게 번져가는 쿨존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최태웅의 입가에 희열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투 스트라이크가 아니라도 의미가 있어.’

지금 스콜피온즈 타선은 완전히 혼란에 사로잡혀 있었다. 저들 입장에서는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과 140km대의 묵직한 직구가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만 날아온다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투수에게 직구와 구별하기 어려운 변화구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타자는 밋밋한 직구를 보면서도 ‘사실은 변화구 아닐까?’라는 격정을 지워버릴 수 없다. 이 걱정은 아주 조금이라도 타자의 반응속도를 잡아먹기 마련이다.

여기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반응속도를 낭비하고도 때려낼 만한 타격 능력이 필요하다. 아니면 ‘내가 노린 공이 아니라면 그냥 아웃당하고 말겠다’라는 각오로 완벽하게 하나를 버리거나.

‘닥터 K’의 효과가 씌워진 공을 겪어본 이상.

저들은 이제 평범한 체인지업이나 직구에도 두 가지 패턴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당연히 타격 능력의 저하로 이어진다.

‘지금은 내가 신인이라서 효과가 덜한 부분도 있겠지만, 이름이 알려지면 등판한 직후에도 통하기 시작할 거야. 이미 한 번 붙어본 타선이면 말할 것도 없고.’

***

“스트라이크 아웃!”

[일반 미션 ‘삼구 삼진’을 달성했습니다.]

[5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일반 미션 ‘두 바퀴’를 달성했습니다.]

[100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불과 5구.

탈삼진 하나까지 곁들여서 완벽하게 틀어막고 내려온 최태웅은 더그아웃 분위기가 묘하게 어색한 것을 느꼈다. 전 이닝에 신통방통한 신인이 들어왔다면서 친근한 체하던 것과는 상반된 분위기라, 최태웅이 눈을 끔뻑거렸다.

“왜들 그러세요? 누가 보면 퍼펙트 게임 중인 줄 알겠어요.”

“아니, 너. 퍼펙트 중이기는 한데…….”

“에이, 기록 남을 것도 아닌데요 무슨.”

갓 등판한 시점이나 중간에 구위가 확 올라갔을 때만 해도. 최태웅의 표정에는 어딘가 분명히 고양된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성적이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는 것처럼 초연한 느낌이었다. 으스대거나 억지로 겸손을 떠는 것과도 달랐다.

“감독님. 그런데 저 인간적으로 오늘 경기 뛴 걸로 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뭔 소리야?”

“3이닝 동안 어깨만 풀고 있잖아요.”

5회가 끝난 시점부터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던 이진석이 투덜거렸다. 농담 섞인 투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승혁 감독은 눈을 치떴다.

“그러면 니가 나라고 치고. 지금 저놈 내릴래? 그럴 수 있어?”

“아니, 뭐 또 그런 건 아니지만요…….”

물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유승혁 감독이 마음만 먹는다면 내리지 못할 것도 없었다.

설령 최태웅이 선발로 나가서 압도적인 완봉 페이스를 지키는 경우였을지라도 그렇다. 어제 60구 던지고 갓 올라왔다는 사실을 밝히면 팬들의 반발쯤은 그럭저럭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선수는 경기에서 감독조차 터치할 수 없는 아우라에 휘감길 때가 있었다.

선발 등판인지, 구원 등판인지. 퍼펙트 상황인지, 노 히트 상황인지, 완봉 상황인지, 아니면 탈삼진 기록 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단지 그런 순간이 있을 뿐이었다.

감독이라는 지위와는 상관없이, 한 사람의 야구인이자 야구팬으로서. 지금 최태웅을 내리면, 뭔가 역사에 흠집을 내는 꼴이 될 것 같았다. 그런 비논리적인 압박감이 끊임없이 유승혁 감독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쓰리 아웃! 체인지!”

다들 정신이 다른 데 팔려서인지. 상대 투수의 컨디션이 오락가락하는 데가 있었는데도, 타자들이 허무하게 쓰리 아웃을 헌납하고 돌아왔다.

유승혁 감독이 곁눈질로 최태웅을 힐끗 보았다.

“어떻게 할래? 마저 할래?”

물어보는 의미가 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최태웅이 9회 초에까지 마운드를 밟자, 흥분한 관중이 일제히 기립해서 천둥 같은 함성을 냈다.

-최태웅! 최태웅! 최태웅! 최태웅!

-최태웅! 최태웅! 최태웅! 최태웅!

응원가조차 없는 신인인지라, 관중들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그저 ‘최태웅’이라는 세 글자를 처절하게 연호했다.

아무리 프로 선수들이 승리욕의 화신이라고 해도. 이런 분위기에서까지 전의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악! 따악!

“아웃!” “아웃!”

가뜩이나 귀신 들린 것처럼 허를 찌르는 투구만 해오는 상대인데, 구장의 분위기에 압도까지 당했으니 정상적인 스윙이 나올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투 아웃.

하필이면 마지막 타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에, 인주호는 식은땀이 다 났다. 타석에 들어서는 발걸음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따로 없었다.

‘진짜로, 어떻게 치면 될지 모르겠다…….’

언젠가 올림픽에서 변화구만 6개를 던지는 일본 투수와 상대했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때는 지금만큼 폼으로 구질을 구분하기도 어려웠는데, 왜 지금이 훨씬 까다롭게 느껴지는 건지…….

퍼억! 따악!

“스트라이크!” “파울!”

무서울 게 없다는 듯이 푹푹 찔러 들어오는 투구를 보면서. 인주호는 왜 그런 차이가 느껴지는 건지 새삼스럽게 다시 깨달았다.

‘……맞아.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니라. 이 자식은 진짜로 내가 지랄같이 싫어하는 코스로만 주고 있어.’

3구. 느릿하게 휘둘러지는 팔을 보고서, 인주호는 에라 모르겠다며 이를 악물고 휘둘렀다.

부우웅!

터억!

섬뜩한 파공성과 둔탁한 충돌음.

기세를 못 누르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아버린 인주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메이저리거급 포크볼도 아니고, 중간까지는 완만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던 체인지업이 뚝 떨어져서 아예 홈 플레이트에 처박혔던 것이다.

황급히 공을 주운 포수가 얼떨떨해 있는 인주호를 터치했다.

퍼엉! 퍼엉!

“우와아아아아아아──!”

쩌렁쩌렁한 함성과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선언하는 심판의 콜은 들리지도 않았다.

***

최태웅.

소속 : 엘리펀츠.

상대 : 스콜피온즈.

결과 : 구원승

ERA (평균자책점) : 0.00

TBF (타자 상대수) : 21

IP(이닝) : 7

H(피안타) : 0

HR(피홈런) : 0

BB(볼넷) : 0

HBP(몸에 맞는 공) : 0

SO(탈삼진) : 7

R(실점) : 0

ER(자책점) : 0

AVG(피안타율) : 0.000

NP(투구수) : 59

< 괴물 배터리 -064 >

064.

사실, 내 데뷔전이 야구계를 발칵 뒤집는다거나 할 정도로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신인 데뷔전을 10탈삼진이나 완봉승으로 장식한 괴물들도 역사에 분명히 있었으니까. 7이닝 퍼펙트라고 해봐야, 구원 등판이다보니 대기록의 가능성은 원천봉쇄되어 있었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뿌듯했던 부분은 투구수 관리다. 이건 나 혼자만의 성적이 아니라, 불펜진의 페이스조절에 보탬이 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개인 성적보다는 역시 팀에 대한 기여도지.

무엇보다 감사하고 싶은 사람은 감독님이다. 오늘 갓 올라온 신인에게 이만큼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주는 감독이 어디에 또 있으랴. 거기에 보답하고 싶어서 발버둥치다 보니까 결과가 따라왔을 뿐. 감독님이 아니었다면 데뷔전에서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라는 내용으로 무난하게 원격 인터뷰를 했더니만. 헤드셋에서 윤기정 캐스터의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네. 누가 신인 아니랄까 봐, 영혼 없고 가식적인 인터뷰 정말 잘 들었습니다. 암요, 신인은 감독한테 잘 보여야죠. 원래 데뷔전 인터뷰는 감독 찬양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최태웅 선수가 뭘 좀 아네요.」

“…….”

「방송 인터뷰는 이걸로 충분할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이번에는 가식적인 거 말고 좀 진실미 있는 내용으로요.」

아니, 이 아저씨가! 인터뷰한대서 몇 분 사이에 허겁지겁 짱구 굴려서 멘트 준비해 왔더니만!

윤기정 캐스터가 원래 종종 신인을 놀리기 좋아한다는 거야 알았는데, 설마 내가 그 대상이 될 줄은 몰랐다. 일단 오늘 중계하는 캐스터가 누구인지도 방금 전에야 알았고.

순진한 신인을 약 올리는 게 퍽이나 재밌는지, 스태프들이 ‘큭큭큭’ 하고 소리죽여 웃었다.

그런데 내가 어디, 어르신들이 약 올린다고 마냥 쩔쩔매는 순박한 청년이던가.

“제 이름 적힌 유니폼이 내일부터 나올지 모레부터 나올지 모르겠는데, 나오면 많이많이 사주세요. 요새는 유니폼 판매 비용 몇 퍼센트 선수한테 떼어준대요. 제가 최저 연봉자라서요.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에 생활 수준이 바로바로 달라집니다. 그리고 야구 게임에 이름 쓰게 해주는 것도 라이센스인가 초상권인가 짭짤하다고 하던데. 하루빨리 제 이름 딴 캐릭터를 볼 수 있었으면 하네요.”

「…….」

“아, 그리고 앞으로 제 인터뷰 딸 때는 여자 아나운서를 대동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남자 목소리로 이렇게 인터뷰를 받으니까 승리의 기쁨이 반감되는 것 같네요. 이상입니다.”

어디선가 ‘풉’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카메라가 희미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

└엘리펀츠_신인의_흔한_인터뷰_avi

└패기 쩐다 ㅋㅋㅋㅋ 앞으로 자기 인터뷰할 때 여자 아나운서 데리고 오래 ㅋㅋㅋㅋ

└신인 새끼가 싸가지가 없네. 발정난 개새끼.

└윤기정이 먼저 장난 거니까 지도 받아친 거지, 별 게 다 싸가지네. 신인은 이등병처럼 얼어서 눈알만 굴려야 되냐?

└머엉… 오늘 내가 뭘 본 거지… 듣보잡 신인 올라와서 초구로 70km짜리 첸접 한가운데 던지는 거 보고 리모콘 던질 뻔했는데….

└최태웅 별로 듣보잡 아닌데. 선수 소개할 때 졸았냐? 퓨처스 리그 방어율 1위임.

└똥볼로 꾸역꾸역 잘 막네… 하면서 팝콘 씹고 있는데 갑자기 143 찍히는 거 보고 뿜을 뻔.

└미친ㅋㅋㅋ 지가 매덕스여? 구속 쓸 만큼 나오는 것 같은데 그냥 휙휙 잡아버리지 뭐하는겨ㅋㅋㅋ

└공 날아가는 거 보면 뭔가 속 터지는데 결과가 저러니까 욕을 못 하겠어 ㅋㅋㅋㅋㅋ

└얼마나 깡이 쎄야 신인이 데뷔전에서 저러냐? 나 같으면 무서워서라도 전력투구할 것 같은데.

└설레발 ㅉㅉ 저게 상식적으로 나올 법한 투구수냐? 전갈 새끼들이 느리다고 대충 휘두르다가 자폭한 거지. 연지석도 예전에 3이닝 15구로 끝낸 적 있는데 요새 1군에서 본 적이나 있냐?

└아직 두고 봐야 된다는 건 동의하는데, 투구수는 마냥 뽀록이라고 하기 애매한 듯. 2군 성적 보면 거기서도 투구수는 지대로 날로 먹음.

└아이고, 좆문가들아. 143km 찍힌 거 못 봤냐? 빠른 공 못 던지는 것도 아닌데, 신인이 태업하느라 똥볼 던졌겠냐? 지 나름대로 계산이 있는 거지.

└엘리펀츠 노인네 새끼들 20개 던지고 헐떡거리는 거 보다가 이거 보니까 존나 사이다ㅋㅋㅋㅋ

***

스콜피온즈 타선은 나한테 7이닝 동안 꽁꽁 묶인 여파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듯했다.

다음 날. 스콜피온즈의 투수진은 그럭저럭 제 역할을 했지만, 타격진의 상태가 영 엉망이었다. 우리 투수의 구위가 대단했던 것도 아닌데, 매번 미묘하게 타이밍 엇나간 스윙이 나왔다.

이날 경기는 엘리펀츠가 잘했다기보다 스콜피온즈가 반쯤 자폭한 느낌으로 승패가 갈렸다.

그래도 명색이 하루에 연습 스윙을 수백 개씩 하는 것이 프로다. 다음 날에는 어찌어찌 타격감을 회복한 모양이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후반에 대폭발한 타선에 힘입어 우리 팀은 기어이 스윕을 거두었다.

우리 팀이 스콜피온즈와 경기를 치르는 이틀 동안. 나는 그저 벤치에서 구경하며 푹 쉬기만 했다. 기초훈련은 꾸준히 참가했지만, 감독님의 특명에 따라 야구공은 만져보지도 못했다.

조금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이해도 갔다. 하루에 120개를 던진 것과 이틀 연속으로 60구를 던진 건 또 다르니까. 꼼꼼한 선수 보호라고 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만큼 나한테 가능성을 본 거라고 좋게 생각하지 뭐.

퍼억! 퍼억! 퍼억!

“오케이. 그러면 이번에는 체인지업이요.”

이틀의 휴식 뒤에 재개한 불펜 피칭은 감독님과 투수코치 앞에서 이뤄졌다.

몸이 조금 무거운 듯도 했으나, 어깨 자체는 쌩쌩했다. 구원으로 한두 이닝쯤 소화하는 정도야 아무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한 번쯤이라면 또 저번처럼 선발 땜빵 수준으로 던지지 못할 것도…….

퍼억!

“윽? 아, 실수. 체인지업이랬지?”

어라? 미트를 살짝 빗맞히고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공에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 뭐. 프로 포수도 사람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캐치하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별것도 아닌 공을 흘릴 수야 있었다. 치명적인 실수라고 해도 내가 선배를 갈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지금 건…….

“다시 갑니다, 체인지업.”

퍼억!

당연하게도 백업 포수인 채영선 선배는 이어지는 내 투구를 가뿐히 잡아냈다. 포물선 그리면서 가라앉는 공을 따라가서 낚아채듯이 잡는, 지극히 무난한 캐치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나는 순간적으로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미트가 움직였어?’

어안이 벙벙했지만, 일단은 내색하지 않고 신중하게 피칭을 이어나갔다.

퍼억! 퍼억! 퍼억!

체인지업만 연달아서 3구.

평소보다도 속도를 줄여서 던져봤는데도, 채영선 선배의 미트는 여지없이 아래로 움직였다. 공이 요구한 코스보다 조금씩 낮게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설마…….”

‘매의 눈’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9분할 이상의 집요한 컨트롤이 필요하다. 그걸 얻기 위해서 나는 구속을 15km/h 가까이나 잡아먹었다.

실전에서는 내 마음대로 던지니까 예외.

하지만 포수가 지목하는 곳으로 던지는 불펜 투구에서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직구든 체인지업이든 마찬가지. 포수가 미트를 대고 있으면 공이 알아서 찾아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직구를 던질 때만 해도 컨트롤은 문제가 없었고, 지금도 사실 대단한 제구 미스는 아니었다. 포수가 미트를 움직일 필요조차 없을 정도의 제구는 프로 기준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으니까.

문제는 포수가 내 공을 잡으려고 미트를 살짝이나마 움직여야 했던 이유였다. 이건 내 체인지업의 컨트롤이 둔해졌다기보다…….

‘체인지업에 낙폭이 생겼어!’

‘닥터 K’의 효과로 폭포수처럼 뚝 떨어지던 그 체인지업은 아니었다. 하루 이틀 내 공을 받은 사람은 구별하기도 어려울 만큼 미미한 변화였다.

하지만 매일 같이 공을 던지던 나까지 못 알아볼 리가 있나. 평소 같으면 정확하게 꽂혔을 공을 잡으려고, 포수의 미트가 반 뼘쯤 아래로 움직였다.

폭이 일정했다는 점에서 역시 컨트롤 미스는 아니었다. 아예 영점 자체가 어긋났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닥터 K 효과가 아직도 몸에 남아 있어!’

아니. 이것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닥터 K’의 효과를 받으면서 던지던 감각이 몸에 남아 있다고 해야 하나?

구속은 ‘닥터 K’의 효과가 끝나자마자 원래대로 줄어든다. 근력이나 탄력 등과 밀접하게 연관된 스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브먼트와 제구는 일종의 감각. 효과가 사라져도, 그때 공을 던지는 감각이 어땠는지에 대한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건 진짜 생각지도 못한 부수효과인데?’

당장에는 큰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생각지도 못한 낙폭이 생긴 셈이니까. 오히려 당장은 ‘매의 눈’을 활용하는데 방해된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효과를 꾸준히 상기할 수 있다면 앞으로 변화구 습득에 큰 도움이 된다. 말로는 전수하기 어려운, ‘어떻게 해야 공이 더 잘 휘는가?’에 대한 감각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닥터 K’가 발동해 있을 때는 힘을 줄이지 않아도 정밀 제구가 된다. 그 감각을 끊임없이 체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구력도 상승…….

“혹시 너. 불펜 피칭 하루 이틀 거르면 감 못 잡는 타입이냐? 아무래도 영 신통치가 않은데……. 제대로 던지는 거 맞아?”

“…….”

감독님이 불쑥 내뱉은 말에, 나는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되었다. 한창 희열을 느끼고 있었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입을 여시다니, 쳇.

뭐, 감독님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143km/h야 어떻게 얼버무렸지만 내가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던진 공은 충분히 위력적이었으니까.

그 공을 기억하는 상태에서 지금 나를 보면 상태가 메롱이라고 생각할 법도 하다. 실전에서나 페이스 조절하지, 불펜에서 그럴 이유는 없으니까.

“제가 원래 아드레날린 빨로 던지는 실전형이라서요. 이런 말씀 드리기 조금 뭐하지만, 토네이도즈에서도 불펜 피칭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미리 준비한 변명을 던졌더니, 아니나 다를까. 유승혁 감독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얌마.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불펜 피칭에서 잘 던지다가 실전에서 말아먹는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그 반대가 어딨냐? 실전 타입이라는 건 불펜에서 던진 공을 실전에서도 그대로 던질 수 있는 놈한테 하는 말이지!”

“그렇게 말씀하셔도…… 실제로 그런지라…….”

“…….”

감독님의 떨떠름한 얼굴을 봤더니, 첫날 갑작스러운 등판이 의외로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7이닝 퍼펙트라는 결과를 실제로 냈으니까. 불펜에서 똥볼만 던지는 게 마음에 안 들어도 궁할 때면 한 번쯤 기회를 주겠지. 그 경기에서 밥값 하면 한 경기만 더, 한 경기만 더.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므로,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아, 몰라. 배째. 쟤 원래 이상해.’ 하면서도 어거지로 납득하게 되는 날이 을 거다.

어차피 한 번은 앓고 지나가야 할 문제.

떨떠름해하는 감독님의 시선을 머쓱한 표정으로 받아내며, 나는 그라운드 한복판에서 연습 중인 진효 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혹시 등판하더라도 한동안은 불펜일 텐데.

붙을 기회가 오려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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