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62화 (62/90)

< 괴물 배터리 -062- >

062.

거대한 경기장이 통째로 정적에 잠겼다──같은 상황은 당연히 없었다.

어림잡아도 오늘 관중 수는 1만 5천여에 달한다. 이만한 인원이 몰렸으면, 설령 퍼펙트 게임이 진행 중이라도 어딘가 한쪽에서는 왁자지껄 떠들고 있기 마련이었다.

무엇보다, 구장을 발칵 뒤집을 만한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인류의 정점이라는 170km/h도, 마의 벽이라는 160km/h도, 강속구 투수의 기준이라는 150km/h도 아니었다.

그저 시속 143km.

프로야구에서 비로소 ‘빠른 공을 던진다’라고 표현하기 시작할 만한 숫자가 전광판에 찍혔을 뿐이다.

그래도 일부 관중이 놀라서 술렁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저 투수가 지금까지 어떤 공을 던졌는지, 모두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장인가? 왜 갑자기 143이 나와?”

“아니야. 여태 던진 것보다 빠른 것 같긴 했어.”

“그래도 그렇지. 뭔데 이 타이밍에 갑자기 140을 넘어? 그러면 여태 던진 건 뭔데?”

“언더핸드도 아닌 놈이 뭔 깡으로 100km도 안 나오는 똥볼 가지고 노나 했는데, 믿는 구석이 있기는 했구만.”

“야야, 자고로 스피드 나오는데도 일부러 느리게 던지는 놈들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그러게. 벤치에서 이닝 많이 먹으라고 해서 일부러 힘 빼고 던진 건가?”

“그래도 정도가 있지. 신인이 프로 데뷔전에서. 감독이 이닝만 먹으면 된다고 했대서 저렇게 힘 빼고 설렁설렁 던지는 게 돼?”

하지만 최태웅에게 있어서 관중이 수군거리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구경꾼이다. 응원하는 팀 선수가 꾸준히 좋은 결과만 내면, 과정이 아무리 특이해도 나름의 스타일로 받아들여 준다.

문제는 벤치였다.

“사고 쳤네. 어쩐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을 보고, 솔직히 가장 당황한 것은 최태웅이었다.

제구에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힘이 떨어지던 감각이 남아 있어서 미처 조절을 못 했다. ‘닥터 K’에 제구력 강화 효과도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했던 것이다.

벤치 쪽을 힐끗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코칭스태프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보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상황만 놓고 보면 저들의 반응은 당연히 이해가 갔다. 아무리 이닝 소화를 최우선으로 하랬다지만, 데뷔전 치르는 신인이 여태껏 살살 던지고 있었다는 말이 되니까. 무브먼트나 제구는 어쩌다가 긁혔다는 변명도 통할 수 있으나, 구속만큼은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앞으로 불펜에서 135밖에 못 던지면 이상하게 쳐다볼 텐데…….”

최태웅은 난처한 마음에 우물쭈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다. 배 째라고 해. 스피드건 오류일 거라고 박박 우기면 그만이지. 등판할 때마다 호투하면, 불펜에서 좀 느리다고 죽이기야 하겠어?”

애써 문제를 외면하는 사이에, 8번 타자인 인주호가 느릿느릿 배팅 박스로 다가왔다.

사실, 최태웅의 마지막 공에 스콜피온즈 타선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관중이나 엘리펀츠 벤치야 흥미진진하든 얼떨떨하든 지켜보면 그만이지만, 스콜피온즈는 지금껏 세운 대책을 초기화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데뷔전 치르는 루키가 3이닝을 힘 빼고 던졌다고? 그러면 아까 체인지업 낙폭도 진짜라는 거야?’

하나의 구질에 일어나는 무브먼트를 의도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다니? 전례가 없지는 않으나,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고난도 기술인 것도 사실이었다.

‘이러면 체인지업 커트는 파기다. 갑자기 뚝 떨어지는 거 하나 섞으면 그대로 헛스윙이야. 속도 차이가 이렇게 크면, 폼으로 구질을 구분해도 속도감 갑자기 바꾸기가 어려워. 던지기 전에 읽어야 돼.’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평범한 게스 히팅.

때리면 대박, 못 쳐도 본전인 리그 정상급 에이스를 상대하듯 수 싸움하는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최고 구속을 보여준 직후다. 그런데 직구 하나만 놓고 보면 딱히 압도적인 구속도 아니야. 지금까지 스타일을 생각해보면…… 143km가 머리에 남아 있는 걸 이용하려고 들 거야. 그렇다면 슬로우볼.’

초구.

최태웅의 다리가 올라간 순간, 인주호가 방망이를 손아귀에서 미끄러트렸다. 포물선으로 날아오는 공을 내야수 머리 넘길 정도로만 건져 올릴…….

‘……아니야!’

퍼억!

팔 휘두르는 속도가 빠르다고 느끼자마자 허리에 힘을 팍 주었다. 어떻게든 방망이는 멈췄지만, 코스 자체가 몸쪽 스트라이크존이라 의미가 없었다.

‘117km/h?’

첫 타순 때와 비슷한 직구 구속에, 인주호는 물론이고 스콜피온즈 타자 전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패스트볼은 스피드 자체가 위력이다. 결과적으로 당하기만 했으니까 할 말은 없는데, 도대체 어떤 운용 때문에 저렇게 힘을 빼고 던지는 건지 상상도 안 갔다.

퍼억!

“스트라이크!”

2구도 마찬가지로 118km/h의 직구.

몸쪽 높은 코스 다음에 바깥쪽 낮은 코스.

교과서에 나올 것처럼 모범적인 볼 배합에 미처 방망이가 나가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느린 직구 던질 때랑 빠른 직구 던질 때도 폼 차이가 크기는 하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체인지업은 힘이 분산되는 그립으로 공을 쥐어서, 똑같이 휘둘러도 느리게 날아가는 공이다. 그립을 똑같이 포심으로 쥔다면, 빠르게 던질 때와 느리게 던질 때의 폼이 똑같을 리는 없었다.

110km대의 직구와 130km대의 직구도, 미리 알고 보면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런 식이면 절대로 반응 못 할 것도 없겠는데.’

카운트는 0B 2S.

앞선 두 타석을 생각해보면 ‘진짜 위력적인 투구’는 모두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 왔다.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만 결정구를 사용하는 것은 굉장히 보편적인 스타일이다. 그렇다면 왜 첫 타순에는 안 그랬는지가 의문이지만…… 인주호는 일단 머릿속을 비웠다.

‘이번 공은 무조건 「전력투구」라고 생각하고 휘두른다. 체인지업이면 낙폭 때문에 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직구를 우선적으로.’

잠깐 숨을 고르는 것도 없이, 최태웅이 곧바로 투수판을 밟았다.

천천히 올라오는 무릎. 그립을 단단하게 쥔 채로 글러브에서 빠져나오는 손.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팔.

‘패스트볼! 전력투구!’

날렵한 팔의 스윙을 보고서 곧바로 반응했다.

140km대의 직구에 타이밍을 맞춘 상태.

비로소 예측이 한 번 들어맞은 셈이었지만, 방망이가 반쯤 나간 시점에서 인주호는 멈칫했다.

‘……느려!’

머리로 내린 판단이라기보다는 척수반응.

직구는 맞다.

하지만 아까 본 143km짜리는 아니다. 이 근처의 구속은 지겹도록 겪어본지라 몸이 먼저 움직였다.

조금, 더 느리다.

130 정도의.

허리에 힘.

스윙을 살짝만 늦췄다가.

딱밤 때리는 감각.

톡 건드리듯.

‘말도 안…… 무거…….’

떠억!

능란한 시간차 스윙이었으나, 맞는 순간 방망이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물먹은 방망이로 돌멩이를 두드린 것 같은 타격음이었다.

“아웃!”

주루를 할 엄두도 안 났다. 오른쪽 페어 라인으로 굴러간 공을 1루수가 직접 잡아서 가볍게 포스아웃시켰기 때문이다.

‘134km/h.’

인주호가 가볍게 헐떡이면서 전광판을 보았다.

미묘하게 속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은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처음 벼르던 타이밍에 휘둘렀다면 아예 헛스윙이 돼버렸을지도 몰랐다.

‘130짜리 던지는 거야 새삼 이상할 것도 없는데…….’

더그아웃으로 털레털레 걸어 돌아가면서.

인주호는 방망이를 주워서 가볍게 바닥에 내리쳐 보았다. 마치 장작이 쪼개지는 것처럼, 방망이가 세로결대로 쩌저적 갈라졌다.

‘내가 잘못 친 거겠지? 134짜리가 구위 좀 좋다고 그렇게 무거웠을 리는 없잖아.’

저 투수에게 구위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였다.

***

“야, 너 지금 어떻게…….”

“감독님! 아까 보셨어요? 전광판에 143 찍힌 거! 제가 잘못 본 거 아니죠? 아, 혹시 여기 스피드건 좀 올려놓고 그럽니까? 다른 공은 스피드 얼추 다 맞았던 것 같은데.”

이닝을 마치고 내려온 뒤.

유승혁 감독님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최태웅이 먼저 콧김을 씩씩 뿜으면서 떠들어댔다.

유승혁 감독은 완전히 기선을 빼앗겨서 얼떨떨하게 눈만 끔뻑거렸다.

“참, 아직 말씀 안 드렸던가요? 제가 아직 구속이 140이 넘어본 적이 없거든요. 실전이라서 아드레날린이 솟아가지고 그러나? 오늘 당장은 그렇고, 내일이나 모레쯤에 직접 체크해 봐도 되겠죠? 아무리 요새 전광판이 뻥튀기래도 5~6km씩 부풀리고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요. 진짜 140km 벽만 넘으면 저도 어디 가서 어깨 펴고 다닐 것 같은데.”

“……뭐, 나중에 해보면 되는 거지.”

유승혁 감독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갸웃거리면서도, 떨떠름하게 그리 대답하고 말았다.

오케이, 선수 필승. 숨 돌릴 새도 없이 딱따구리처럼 쏘아댄 최태웅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소소한 지혜지. 명백하게 수상쩍은 일이라도, 이쪽에서 먼저 언급하면 상대방은 할 말이 적어진다. 프레임 선정이라고 하던가?

그리고 사실, 연습 때는 죽어도 안 나오던 기록이 실전에서만 나오는 경우도 스포츠 세계에서는 드물지 않다. 실전만이 가져다주는 고양감은 그만큼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게다가 최태웅은 야구가 하고 싶어서 트라이아웃까지 봐가며 입단한 신인이었다. 이 타이밍에 데뷔전에 태업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포수인 장기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불쑥 말했다.

“그나저나 니가 이래 버리면 귀찮아지는데.”

“경기가 꼬여요?”

“일찌감치 털린 게임인 줄 알고 적당히 성적 관리나 하려고 했더니만. 이래놓으면 우리가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게 생겼잖아.”

“…….”

이게 프로의 입에서 나와도 될 법한 소리인가 싶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배의 호투 때문에 한소리 듣게 생긴 선배 타자들의 엄살이었다. 일부러 대충 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5회 동안 한 점도 못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타는 관계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미친다.

아군 마운드가 안정되면, 조금만 분발해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야수진의 사기가 오른다.

그리고 타석에서 어떤 결과를 냈느냐에 따라서, 수비가 흔들리는 일도 드물지 않다. 타석에서 서는 타자와 수비를 하는 야수는 동일인물이기 때문이다.

따악!

“오케이, 빠졌다!”

“뛰어 뛰어!”

스콜피온즈 내야진의 미묘한 흔들림에 힘입어, 엘리펀츠 공격에도 물꼬가 트였다. 썩 좋은 타구는 없었으나 꾸역꾸역 진루해서 2점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7회 초.

- 와아아아!

- 최태웅! 최태웅!

- 최태웅! 최태웅!

이번 수비에도 최태웅이 뚜벅뚜벅 마운드로 걸어오자, 스콜피온즈 타자들의 안색이 다소 핼쓱해졌다.

이렇게 되면 순서만 조금 바뀌었다뿐이지 선발 펑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선발투수의 책임이닝을 죄다 메우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추격당하기 시작한 타이밍이라 마음이 조급해진 부분도 있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평범하게 선발투수가 호투한 상황보다도 골치 아팠다. 5이닝째가 됐으면 생전 처음 보는 투수라도 슬슬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전 이닝부터 투수가 갑자기 감춰둔 밑천을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이러면 완전히 한 끗발 더 높은 투수가 새롭게 등판한 거나 다름없는 모양새다. 스콜피온즈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없었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파울!”

일단 투 스트라이크에 몰린 시점에서 타자들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금까지의 투구 패턴을 생각해보면 다음 공도 스트라이크라는 것은 기정사실에 가까웠다.

멀뚱멀뚱하게 서서 삼진을 당할 수도 없으니 휘두르기는 해야겠는데. 어떤 공이 날아올지 상상하다 보면 그저 피가 바작바작 말랐다.

‘140km대 직구? 130km대 직구? 110km대 직구? 빠른 체인지업? 느린 체인지업? 포크성 체인지업?’

소름끼치는 사실 하나는, 이 모든 공의 구속 차이가 헛스윙을 유발할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폼을 보고 대강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한순간이라도 집중력이 느슨해지면, 팔 휘두르는 모습을 뻔히 보면서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였지? 빠른 체인지업? 느린 체인지업? 포크성? 아, 아니, 느리게 던진 게 맞기는 했나? 느린 직구 던질 때도 저 정도였던 것 같기도──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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