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61화 (61/90)

< 괴물 배터리 -061- >

061.

세상에 만능인 선수는 없다. 여러 기술이 균등한 선수를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으나, 결국은 두드러진 장점이 없다는 거다. 이런 선수는 쉽게 프로가 될 수 있을지언정 스타급은 되기 어렵다고도 한다.

각설하고, 내가 가진 초능력도 마찬가지다.

오픈할 때마다 2배의 포인트가 필요하므로, 모든 특성을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기존의 피칭스타일과 호환이 되는 특성으로 장점을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지금 내 스타일은 완급 조절로 투구수를 줄인 그라운드 볼러.’

‘매의 눈’은 타자의 허점을 보여주고, ‘철벽 내야’는 빗맞은 타구의 땅볼 확률을 높여준다. 두 가지 특성이 동시에 발동하려면 오히려 타자가 헛스윙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래서 타이밍을 잡기는 어렵지만 컨택 자체는 잘되도록 2단 체인지업을 익혔다. 실제로 이 스타일이 지금까지 잘 먹혔지만, 벽에 부딪혔다. 체인지업을 무조건 다 커트하면, 투구수 절약이고 땅볼 유도고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세 번째 특성으로 뭘 고를지. 처음에는 몇 가지 후보 앞에서 고민했고, 박현성이 날 공략한답시고 커트 남발할 때 확실하게 결정했다.

[닥터 K :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구속과 구위와 무브먼트와 제구력이 대폭 상승한다.]

영구적으로 능력치를 올리는 특성도 있으나, 모든 능력치를 한꺼번에 올려주는 특성은 몇 없었다.

무브먼트를 올려봐야 당장 크게 효과 볼 변화구도 없었고, 포수와 사인 나누기가 번거로워진다. ‘돌직구’ 특성을 골라 봐야 제구력 때문에 위력을 고스란히 뽑아내기가 어렵다.

‘스나이퍼’는 매력적이었으나, 솔직히 포인트를 쓰기가 조금 아까웠다. 오랫동안 제자리걸음 중이지만, 제구력은 노력으로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닥터 K’는 투 스트라이크라는 상황에서만 능력치를 올려주는 만큼 상승폭이 압도적으로 컸다.

게다가 결정구로 못 써서 문제일 뿐. 카운트를 버는 것만 생각하면, 2단 체인지업보다 효과적인 구질도 없었다.

[플레이어에게 ‘닥터 K’ 특성이 부여됩니다.]

신중하게 아이콘을 건드리자, 조그만 알림창이 사라졌다.

“푸하아…….”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싶었는데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격렬하게 들썩이는 어깨를 눈으로 보고 나서야 내가 숨도 안 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와우. 나름대로 침착한 상태인 줄 알았는데. 두 번째 특성을 얻을 때의 실수 때문인지 신경이 어지간히도 곤두서 있었던 모양이다. 마운드에 처음 오를 때조차 멀쩡했던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이제 슬슬 좀 힘든가? 악력은 어때?”

그런 내 상태를 오해했는지, 투수코치가 다가와서 걱정스럽게 살폈다.

확실히 피로감은 있지만, 힘이 빠지기 시작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제 60구를 던졌어도 전력투구는 거의 없었고, 그 직전에는 꽤 오래 휴식했다.

내일이나 모레도 등판한다면 모를까, 당장은 아무런 무리 없이 속투할 수 있었다. 다른 투수와 달리, 나는 중고등학교 때 오른 어깨를 혹사한 적도 없으니까.

“아직 멀쩡합니다. 불펜에 준비하고 있는 투수도 없잖아요. 그리고 저 아직까지 퍼펙트인데요.”

“말이 퍼펙트지, 인마. 내가 보기에는 살짝 밑천 털린 것 같은데……?”

사실 투수코치의 걱정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전혀 이해 안 되는 바도 아니었다. 신인답지 않게 압도하는 피칭을 한 것은 3, 4회뿐. 체인지업이 까다롭다는 걸 간파한 타자들이 직구만 노리기 시작한 5회에는 명백하게 흔들렸던 것이다.

프로 타자쯤 되면 어떤 공이라도 방망이에 맞추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던가? 그래선지 체인지업은 아무리 두 종류를 섞어서 던져도 커트를 피하지 못했다. 패스트볼을 던지면 누가 기다리던 공 아니랄까 봐 홈런성 대형 타구로 이어졌다.

내가 감독이나 투수코치라면 ‘특이함으로 2군에서 먹고 살던 투수가 1군에 와서 피지컬의 벽에 부딪혔다’라고 판단할 것이다. 아니, 실제로도 그 말대로지. 어떻게든 꾸역꾸역 연명이야 해도, 체인지업 폼을 보완하기 전에는 포텐을 터뜨리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닥터 K’가 되기 전의 나라면 그랬으리라는 것뿐이지만.

“아무튼, 무리는 하지 마라. 이 상황에 신인 올리면서 타선 한 바퀴 이상 막아주기를 바랄 만큼 우리가 양심 불량은 아니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앞선 3이닝을 완벽하게 틀어막은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에 대한 치하인지, 투수코치가 든든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불펜 슬슬 준비할 테니까, 부담 없이 해. 적당히 되는 데까지만. 본전은 다 했고, 이제부터는 한 명 잡을 때마다 불펜 절약되는 보너스 스테이지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버틴다는 느낌으로.”

“으음. 오래 버티는 건 좋은데요…….”

따악! 얘기하는 사이에, 우리 6번 타자가 워닝트랙까지 날아가는 큼지막한 타구를 날렸다. 쩌렁쩌렁한 함성에 말소리가 묻힐 것 같은지라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펜스 앞에서 중견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가는 공.

관중들이 탄식하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은 거 다 잡아도 딱히 상관은 없는 거죠?”

“……뭐?”

투수코치가 얼떨떨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나는 글러브를 끼고, 모자를 고쳐 쓰고, 다소 거만한 몸짓으로 뚜벅뚜벅 마운드에 향했다.

으음. 방금 대사 살면서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나 지금 좀 멋있었던 거 같아.

***

“얼씨구? 점마 또 올라오네?”

“신인이라면서? 던지는 거 은근히 용하데.”

“위태위태한 것도 같고, 능글맞은 것도 같고…….”

“뭐가 됐건 막기만 하면 됐지.”

사실, 야구장을 찾은 관중은 투타 대결을 섬세하게 감상하기가 어렵다. 웬만큼 좋은 자리가 아니고서야 코스나 무브먼트를 불 수 없기 때문이다.

휙 던졌다 싶었는데 심판이 가만히 있으면 ‘볼인가 보다’, 뭔가 제스쳐를 취하면 ‘스트라이크구나’ 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현장 관중이 투수 역량에 대해서 판단할 바로미터는 전광판의 구속뿐. 시속 110km대의 공을 뿌리는 신인이 올라온 시점에서, 적잖은 엘리펀츠 관중이 아예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불펜 사정을 아는 팬들이나 ‘기대 안 하니까, 선배들 쉬게 오래나 던져라’ 하고 응원하는 정도. 선발이 아닌지라 야금야금 3이닝을 틀어막은 것도 별로 와 닿지 않고 있었다.

-6번 타자! 신한이!

-심봤다! 심봤다! 야구하다 심봤다!

원정 응원석의 요란한 함성을 등진 재, 신한이가 비장한 발걸음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아니, 발걸음뿐 아니라 실제로도. 그는 다소 비장한 각오로 방망이를 꼬나쥐고 있었다.

타순이 한 바퀴 돌 동안에 아무도 출루하지 못했다는 것은 역시 상징적인 굴욕이다. 10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이 마의 벽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공략은 대강 나왔어. 직구 온리. 저깟 신인 똥볼에 휘둘리는 것도 정도가 있어.’

방심하다가 어어어 하는 사이에 허를 찔린 거라고 해도. 신한이는 타선에서 유일하게 삼구 삼진을 헌납했다. 8년 차 베테랑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번 타석을 곱게 넘어가 줄 수는 없었다.

따악!

“파울!”

지금까지 대부분 그랬듯이, 초구는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존을 걸쳤지 싶은 체인지업.

무조건 직구만 노리기로 했지만, 일단은 타이밍을 재어볼 겸 해서 커트했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너무 느린 공이 낯설어서 잘못 걷어낸다면, 그만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악!

“파울!”

2구는 바깥쪽 아래.

초구보다 족히 10km/h는 느린 체인지업.

움찔하면서 어떻게든 파울존으로 날려버린 뒤, 신한이는 착잡하게 입맛을 다셨다. 처음부터 커트할 생각으로 상대한 지금에야 다른 타자들이 왜 그리 허무하게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130km/h와 140km/h는 한눈에 구분되는데, 이건 둥둥 떠서 오는 느낌이라 미묘하게 헛갈렸다. 언제 마지막으로 봤을는지, 짐작도 안 가는 스피드와 궤적이다. 귀신처럼 싫은 코스를 찔러온다는 말도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그래도 건드릴 수는 있다. 직구가 아니다 싶으면 무조건 걷어내면 돼.’

패스트볼에 기어를 맞춘 뒤, 신한이가 씹어먹을 듯 험악한 눈빛으로 투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데뷔 첫 마운드에서 선배를 약 올리듯 한가운데 느린 직구를 쏴댄 놈이다. 이제 와서 살벌한 시선 좀 받았다고 주눅이 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아까보다도 느긋하고 여유로운 몸짓으로 투수판을 밟는다. 휘둘러지는 팔의 속도를 보면서 신한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느려! 체인지업!’

구질을 간파한 순간, 기어를 덜컥 내린다.

실투인지 도발인지, 코스는 스트라이크존 한복판.

본능적으로 치고 싶어지는 코스였지만, 신한이는 흔들리지 않고 톡 건드리는 느낌으로──

퍼억!

“스, 스트라이크 아웃!”

준비운동이라도 하듯, 가볍게 휘두른 배트가 바람을 휙 가른다.

앞으로 날릴 생각 자체가 없었던지라 맥이 빠질 정도로 허무한 스윙이었다. 심판이 삼진 콜을 하니까 그냥 ‘와아아!’하고 함성을 지르는 관중과 달리. 벤치에서 지켜보던 선수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설마 방금…….’

‘떨어진 거야? 저 스피드에?’

***

[일반 미션 ‘삼구 삼진’을 달성했습니다.]

[5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새하얀 알림창이 시야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벙쪄서 더그아웃으로 돌아갈 생각도 못하고 있는 신한이를 보며. 최태웅 또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장난 아닌데?’

체인지업을 커트할 작정인 게 훤히 보여서 걱정 없이 던져봤을 뿐인데. 포크볼 저리 가라 할 만한 낙폭으로 공이 뚝 떨어졌다. 진짜 포크볼만 한 스피드가 나왔다면 포수가 빠트려서 폭투가 났을 지도 모른다.

‘스피드는 78km.’

전광판의 숫자를 돌아본 최태웅이 미묘하게 거친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체인지업은 패스트볼과의 속도 차이로 타자를 속이는 공. 스피드가 올라간다고 해서 좋은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스콜피온즈 더그아웃은 발칵 뒤집혔다.

애초에 별다른 정보가 없는 투수였으니, 사실은 제법 낙폭 있는 체인지업을 던질 줄 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그럭저럭 공략법을 준비했다 싶어서 나갔는데 새로운 공이 튀어나오다니?

“스피드만 두 종류인 게 아니라…….”

“낙폭까지 조절한다고? 그게 말이 돼?”

아니. 다양한 변화구를 가진 투수라면 경기 초반과 후반을 전혀 다른 구질로 운영하기도 한다. 불펜에서 연습만 하던 구질을 갑자기 후반에 보여줘도 타자들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대는 데뷔전을 치르는 신인이었다.

다리를 부들부들 안 떠는 것만 해도 칭찬해줘야 하는 루키가 3이닝 동안 저런 ‘비장의 무기’급 공을 감춰두고 있었다니.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워워, 진정해. 아직 하나밖에 못 봤잖아. 확실한 거 없어.”

“까놓고 말해서 체인지업인데. 원래 떨어지는 게 맞는 거고, 안 떨어지는 지금까지가 아리랑볼이었던 거지.”

“계속 떨어뜨리고 싶었는데 안 떨어지던 게, 지금 딱 한 번 긁힌 걸지도 모르잖아. 지레 과대평가할 필요 없어.”

투수에게 주눅이 들면 충분히 칠 수 있는 공에도 반응이 느려진다. 그런 사실을 익히 잘 아는 타격코치가 재빠르게 나서서 야수들을 진정시켰다.

“그러면 이제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작전 그대로 간다. 방금 본 공은 무시해. 체인지업만 30개 넘게 던졌는데, 딱 저거 하나 떨어졌어, 그쯤 되면 일부러 낙폭 조절할 수 있다고 해도, 확률 믿고 무시해볼 만하잖아.”

“…….”

하필이면 왜 내 차례 앞에서 저런 공이 나오나.

7번 타자인 박태호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타석에 들어갔다.

타격코치는 무시하라고 했지만, 사람의 뇌는 그리 편리하게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다. 홈 플레이트에 자석이 붙었나 싶을 정도로 뚝 떨어지는 공이 섞여 올지 모르는 판국에, 직구가 올 때까지 커트라니. 그야말로 정신고문이 따로 없는 일이다.

퍼억!

“스트라이크!”

초구.

과장 조금 보태자면, 물풍선처럼 둥실거리며 날아온 공이 스트라이크존 낮은 곳을 스쳐갔다.

시속 82km.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포물선 궤적 외에는 별다른 낙폭도 없는 밋밋한 공.

퍼억!

“스트라이크!”

시속 76km.

한가운데보다 약간 아래를 휙 지나가는 궤적에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것만 보면,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 휙휙 던져주는 배팅볼과 다를 게 하나 없다.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이런 공을 멀뚱멀뚱 지켜봤다는 사실에 부아가 치미는 것이다.

제 3구.

최태웅이 느긋한 몸짓으로 투수판을 밟았다.

다리가 올라가는 순간.

신경이 바짝 곤두선 박태호의 시야에,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비쳤다.

‘빨라! 직구!’

판단은 찰나.

행동은 즉시.

채찍처럼 날카롭게 휘둘러지는 팔을 보자마자, 박태호의 몸이 움직였다. 빠른 공에 맞춰놓은 속도감각 그대로 방망이가──

퍼억!

“……!”

생각지도 못한 미트 소리에, 박태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뭐지? 분명히 빠른 공이었는데? 휙 들어왔잖아.

설마 슬로우볼에 눈이 익어서 반응이 늦었나? 아니면 이번에는 진짜 포크볼이라도 꺼내서 갑자기 뚝 떨어진 건가? 아니면──

“143km?”

얼떨떨한 가운데, 무심코 전광판에 찍힌 구속을 본 박태호가 입을 떡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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