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60- >
060.
‘매의 눈’이 무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피지컬의 차이가 압도적이면, 어떤 코스에 어떤 공을 던져도 통하지 않는다. 쿨존에 공을 던진다고 해서, 타자가 게임 NPC처럼 멀뚱멀뚱 지켜봐주지도 않는다.
그래도 반칙에 가까운 힘인 것은 사실이었다.
시속 130km 정도의 슬로우볼로 리그를 씹어먹은 투수가 역사적으로 전무했던 것도 아니다. 내 공은 조금 더 느리지만, 상대의 약점을 직접 실시간으로 봐가면서 던질 수 있으니까. 역사적인 슬로우볼 투수보다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3~4회는 퓨처스 리그에서와 다름없을 정도로 6타자를 가뿐히 농락했다. -타자들이 나를 얕봐준 덕분이라는 건 인정하지만서도.
‘1군에서는 허구헌 날 140km 넘는 공만 보니까. 아무리 속도 감각이 흐트러졌어도 130 중반쯤에는 반응이 된다는 건가?’
결과적으로는 플라이 아웃이었지만, 과정과 상대가 문제였다.
민재호는 분명히 스콜피온즈의 클린업 트리오 중 하나다. 하지만 리그 전체로 시선을 옮겨 보면 타율이 10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팀마다 한두 명씩은 있는 수준의 타자라는 말이었다.
‘매의 눈’과 내 공을 활용한 투구 패턴 하나가 깨졌을 뿐이지만. 수 싸움이 아니라 피지컬에 박살났다는 사실은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4번 타자! 루퍼트!
-떴다 떴다, 루퍼트! 날려라, 날려라!
-뛰어가기 싫으면! 걸어서 가라!
착잡하게 입맛을 다시는 사이에 다음 타자가 천천히 타석에 들어왔다.
빅 리그에서만 통산 30홈런을 때렸다고 하는 36세의 외국인 용병. 벌써 3년째 한국에서 뛰는지라, 어떤 타자인지는 나도 대강 알고 있었다.
적당히 상대 투수의 구질 정도만 머릿속에 집어넣고 나와서는, 눈으로 직접 보고 때리는 타자. 타율은 2할 6푼 정도에서 왔다갔다하지만, 걸리면 휙 넘겨버린다.
‘이 아저씨한테는 한가운데 던져서 약 올리는 거 죽어도 하면 안 되겠네.’
수 싸움을 하기보다는 실투한 투수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는 타입이라고 해야 하나? 무조건 몰리는 공만 노리겠다는 듯이, 루퍼트의 스트라이크존은 한가운데 부근만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코너워크가 되는 공을 무시하는 편이라면, 내게 있어서는 굉장히 편한 상대다. 민재호 타석에서 놀란 가슴을 다독이며, 나는 천천히 와인드업했다.
초구는 몸 쪽 낮은 코스.
제구에 신경을 잔뜩 쏟은 시속 110km 중반대의 포심 패스트볼──
따아악!
“……!”
이번에도 황급히 뒤를 돌아보다가, 하마터면 목을 삐끗할 뻔했다.
여기가 돔 구장이라면 천장에 부딪혔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타구가 끝없이 솟아올랐다.
비거리만 생각한다면, 사실 뒤돌아보는 의미도 없을 만한 공이었다. 타구의 궤적이 완만하게 파울존으로 휘어가고 있어서 기대감을 품은 것이다.
“파울!”
“우와아아아아!”
폴대 밖으로 휘어졌다는 심판의 판정에 우레 같은 함성이 터졌다. 딱히 미묘한 판정도 아니었기에 스콜피온즈 측에서 물고 늘어지는 일은 없었다.
“인간적으로 너무하네. 지가 골프 선수도 아니고, 무릎 위로 가는 공을 왜 건드리냐고.”
워낙 큼지막하게 날아갔던지라, 이번에는 진짜로 간담이 서늘했다.
스윙 타이밍이 미묘하게 늦은 걸 보면, 내 공이 의표를 찌르기는 했다고 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엉겁결에 쳐낸 타구인데도 저만큼 날아갔다는 게 된다.
‘이거 우연인가…….’
지금까지도 쿨존에 던진 공이 스윙에 제대로 걸려서 멀리 날아간 적은 있었다. 그래도 정말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빈도라서 일일이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두 타자 연속, 아니, 2구 연속으로 홈런에 가까운 대형 타구가 나왔다.
확률적으로 가끔 벌어질 수 있는 일이 우연찮게 연속으로 나온 걸까? 아니면 앞선 타자들은 방심하다 당했을 뿐이고, 피지컬로 나를 찍어누를 대책이 벌써 튀어나온 건가?
퍼억! 퍼억!
“볼!” “볼!”
위협적인 타구에 제구력이 흔들린 것은 아니다. 방금 홈런을 날릴 뻔했으니, 혹시 방망이가 나와주지 않을까 비슷한 코스에서 살짝 빼봤을 뿐이다.
“꿈쩍도 안 하네.”
공 하나 차이로 들어오고 빠지는 걸 구분할 만큼 선구안 좋은 타자는 아니라고 들었다. 아니 뭐, 스트라이크존의 형태를 보면 코너워크 된 코스에 방망이를 휘두를 타입이 아니긴 했다.
그런데 그러면 이상한 게, 왜 초구는 방망이를 냈느냐 이거지.
퍼억!
“볼!”
혹시나 싶어서 이번에는 바깥쪽으로도 한 번 빼봤는데, 루퍼트는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이걸로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가장 홈런이 많이 나온다는 카운트.
피로해져서 이마의 땀을 닦는데, 갑자기 장기석 선배가 타임을 걸고 마운드로 걸어왔다.
어랍쇼? 이게 뭐하는 건지는 당연히 아는데, 직접 겪어본 적은 거의 없어서 나도 모르게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그렇게 흔들려 보였나? 딱히 제구 문제는…….
“너 말이야. 혹시 여기서도 0점대 방어율 찍을 줄 알았냐? 그런 똥볼 던지면서? 아니면 뭐? 9회까지 전부 퍼펙트로 틀어막고? 그런 거 생각했어?”
“……예?”
“내가 무슨 표적판 대신하려고 저기 앉아 있는 줄 알아? 일부러 빼는 거랑 제구 흔들리는 것도 구분 못하게?”
장기석 선배는 짜증내는 건지 타이르는 건지 모를 애매한 표정으로 내 이마를 쿡 찔렀다.
“연속으로 큰 거 맞아서 쫄았나 본데. 바꿔서 말하면 그렇게 무식하게 얻어맞았는데도 안타가 안 됐다는 말도 돼. 야구가 원래 그런 거잖아. 다 운이고 확률이야. 공은 둥글고 배트도 둥글다는 말 못 들어봤어?”
“그거야 저도 당연히 아는데요…….”
“안다는 놈이 뭐 그리 안타 하나도 안 맞으려고 집착이야? 맞을 때가 되면 맞는 거고, 상대보다 점수만 덜 주면 되는 거지. 2군에서도 자책점이 퍼펙트하게 제로였던 건 아니잖아.”
“…….”
“내가 타자들이 움찔거리는 걸 코앞에서 봐서 장담하는데. 왜 저딴 똥볼에 허둥대는지 사실 나도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너 현실적으로 타자들 타이밍 확실하게 헝클고 있으니까. 100퍼센트 타자가 예상한 공을 던진 게 아닌 이상, 나머지는 다 확률 문제야. 그거까지 통제하려는 건 오만이라고.”
어떤 의미에서는 참 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설교였지만. 나는 갑자기 막혔던 코가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원론적인 잔소리에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내 머릿속을 번쩍 스치고 지나간 것은 조금 더 구체적인 힌트였다.
“확률이라…….”
장기석 선배가 내려간 뒤. 나는 뇌리에 아로새겨진 단어를 멍하니 중얼거렸다.
엉겁결에 떠맡듯이 익혀버린 두 번째 특성 ‘철벽 내야’. 타구가 땅볼이 될 확률과, 땅볼이 야수 근처로 굴러갈 확률을 높여주는 패시브 스킬.
아무리 두 가지 타이밍의 체인지업을 쿨존에 꽂아넣는다고 해도. 70km/h 남짓한 공에 프로 타자들이 매번 휘둘리기만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의표를 찔리는 순간, ‘철벽 내야’ 특성이 발동하니까 지금의 투구가 성립하는 것이다.
가시적인 이펙트가 없어서 종종 잊어버릴 때도 있지만. ‘철벽 내야’는 분명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퓨처스 리그에서 내가 기록한 압도적인 GB/FB(땅볼/뜬공 비율)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확률을 제어한다는 게 어떤 원리인지 상상도 안 가지만──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조금 치사한 느낌도 드니까 패스.
“자자, 원 아웃! 수비 정위치!”
플레이가 재개되고, 장기석 선배가 가슴을 두드리며 내야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글러브 안에서 그립을 쥔 뒤. 나는 천천히 투수판을 밟았다.
퍼억!
“……스트라이크!”
컴퓨터 선구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꿈쩍도 않던 루퍼트의 어깨가 움찔했다.
핫존을 살짝 벗어나는 낮은 코스. 코너워크가 됐다고 하기도, 몰렸다고 하기도 애매한 자리에 시속 85km짜리 공이 꽂혔던 것이다.
공을 건네받은 내가 의도적으로 루퍼트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루퍼트는 딱히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걸로 풀 카운트.’
체인지업을 익힌 뒤로는 딱히 ‘철벽 내야’를 의식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동으로 적용되는 스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내야 하는 상황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던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땅볼 확률이 늘어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대응책은 간단하지. 일부러 땅볼 될 확률이 높은 공을 던지면 되는 거 아닌가?
따악!
“이야아아!”
우레 같은 관중의 함성이 그라운드를 덮쳤다.
한가운데 낮은 코스.
시속 74km의 체인지업.
스윙이 덜컥 무너진 가운데서도 쏘아낸 포탄같은 타구가 다이빙한 유격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간다.
“잡았다!”
“안 늦었어! 천천히! 1루!”
“침착하게!”
유격수는 주위에서 외치는 목소리대로 심호흡까지 해가며 침착하게 1루로 송구했다. 워낙에 빠른 타구였던지라, 야수가 슬라이딩까지 해서 잡았는데도 루퍼트는 두세 걸음이나 앞에서 깔끔하게 포스아웃 당했다.
“아오 씨, 살벌해. 클린업이라고 유세 떠는 거야, 뭐야? 뭔 타구가 저렇게 무식해?”
장기석 선배 덕분에 마음은 좀 가라앉았지만. 저 타구를 보니까 또다시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듯했다.
이쯤 되면 확실하다. 아무리 의표를 찔려도, 공이 방망이에 맞는 한은 피지컬에 눌리고 만다. 내 공이 사실 구위는 스피드에 한참 못 미치는 편이니까.
-5번 타자! 강형민!
-오라오라오라오라! 날려버려! 날려버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신인왕 출신. 작년에 홈런 31개를 기록한 강형민이 일찌감치 타석에 들어와서 위력 시위하듯 날카로운 파공성을 냈다.
“……왜 노려보고 난리야?”
평소 같으면 저런 기싸움 따위 가볍게 무시했을 텐데, 지금은 괜히 짜증이 치밀었다. 생각해 보라고. 여차하면 백 투 백 홈런을 맞았을지도 모르는 건 내 쪽인데. 성질을 내거나 전의를 불태우는 것도 루키인 내가 할 일…….
“아니지. 생각해보니까 아직도 퍼펙트이긴 한데.”
방심하다가 고꾸라진 6명과 달리. 민재호부터는 정색하고 내게 덤벼들었다. 그 덕에 위험한 타구를 맞았지만, 결과만 생각하면 아직까지 한 명도 1루를 밟지 못한 셈이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1군의 장벽이 이렇게 높은 거였나.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나. 내가 초능력 하나 믿고 너무 깝쳤던 거였나. 짧은 시간 동안에 온갖 회의감을 느꼈는데.
그 대단한 프로야구 1군의 클린업 트리오도 내게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오케이. 생각해보면 명색이 프로인데. 이 정도 스릴은 있어야지, 나 같은 뉴비한테 탈탈 털리기만 하면 쓰나.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만.”
포수와 타자와 심판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거나 말거나. 나는 연신 히죽거리면서 다시 투수판을 밟았다. 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울증인 줄 알겠네. 잠깐 사이에 침울했다가 들떴다가.
퍼억!
“스트라이크!”
***
‘느린 공은 그냥 갖다 맞추기만 해요.’
‘맞아, 맞아. 그거 건드리거나 눈에 자꾸 익으면 다 꼬여. 패스트볼을 치는 게 나을 거야.’
완급 조절을 하는 투수가 상대라면, 기본적으로 빠른 공을 노리다가 느린 공에 대처하는 것이 정석이다. 느린 공에 맞춰져 있던 속도감각을 순간적으로 빠른 공에 맞추기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따악! 따악! 따악!
“파울!” “파울!” “파울!”
그래서 처음에는 동료 타자들의 조언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체인지업을 세 개 정도 커트해봤더니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바로 이해했다.
비슷한 폼에서 나오는 체인지업인데 하나는 80대 중반, 하나는 70대 초반.
컨택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타이밍이 미묘하게 흐트러져서 안타로 만들기가 애매했다. 가만히 보면 자신이 거북해하는 코스만 집요하게 찔러오고 있기도 했다.
갓 등판한 주제에 자신의 데이터까지 분석한 거라면 2군에서는 더욱 철저했을 터. 똥볼이라는 편견만 버리면 방어율 1위라는 사실도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구종이 빈약해. 계속 이러다 보면 아까처럼 패스트볼이 오겠지.’
마음에 안 드는 공을 커트하다 보니, 민재호 타석과 비슷한 양상이 되었다. 민재호는 저 투수의 직구가 134km/h까지 나오는 걸 몰라서 당했지만, 미리 알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스으윽.
이번이 5구째였나? 집중한 탓인지 최태웅의 와인드업 동작이 슬로우 모드로 보이는 듯…….
“……?!”
팔이 휘둘러지는 순간.
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위!’
그래도 야구를 1, 2년 해온 게 아닌지라. 반사적으로 머리 위로 날아간 공의 기척을 캐치했다.
뭐지 이건? 장난해? 팜볼? 이퓨스? 너무 느리다. 30km나 40km?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톡, 토독.
발작을 일으키는 기분으로 간신히 건드린 공이 포수 앞에 떨어져 데구르르 구른다. 강형민이 뛰려고 시도할 틈도 없이, 포수가 재빨리 공을 주워서 1루로 송구했다.
“아, 아웃!”
강형민은 멍청하게 눈만 끔뻑거렸다. 멀쩡히 눈뜬 채로 코 베인 기분에 머릿속이 멍해져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뭐냐, 저놈은?’
스콜피온즈 벤치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저런 바보 같은 공에 나가 떨어졌다며 강형민에게 기막혀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들도 느닷없이 저런 공을 겪으면 허를 찔릴 수도 있다는 것쯤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저 최태웅이라는 놈이다.
오늘 데뷔하는 신인 아니었나? 홈런성 플라이 두 개 맞고 쪼그라들지 않았었어? 그런데 잠깐 사이에 저딴 공을 던질 정도로 깡이 돌아온다고?
“……오케이. 퍼펙트.”
경악에 가까운 시선을 뒤집어쓴 채. 마운드에선 최태웅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새하얀 알림창이 그의 시야를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일반 미션 ‘한 바퀴’를 달성했습니다.]
[50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특성 오픈에 필요한 포인트를 모두 모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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