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59화 (59/90)

< 괴물 배터리 -059- >

059.

-아, 엘리펀츠에서 벌써 투수를 교체했네요. 정기용 선수가 이미 한계투구수를 넘은 것도 있고, 오늘 밸런스도 나빴거든요. 벤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유승혁 감독으로서는 아쉽겠어요. 점수 차이는 둘째치더라도 3~4이닝은 소화해주기를 기대했을 거거든요. 지금 불펜이 상당히 과부하된 상태라 유승혁 감독이 골치가 많이 아플 겁니다. 오늘 경기만 생각하면 어떻게든 될지 모르겠지만, 엘리펀츠 선발진을 생각하면 휴식을 장담해줄 수가 없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올라온 두 번째 투수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겠는데요……. 최태웅 선수입니다. 이름을 처음 듣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토네이도즈에서 이적해온 신인이죠? 팀 사정 때문에 유니폼을 갈아입자마자 이렇게 마운드에 서게 되네요.

-데뷔전이니만큼 최태웅 선수도 긴장이 많이 될 테지만……. 사실 최태웅 선수의 입장에서는 괜찮은 스타트 무대입니다. 이런 상황에 당일 이적해온 신인을 마운드에 올리면서, 과도한 기대를 거는 벤치는 없거든요. 유승혁 감독이 기대하는 건 불펜진의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이닝을 소화해주는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대도 되는 게요. 최태웅 선수 기록을 보니까, 퓨처스 리그에서 0.58이라는 엄청난 평균자책점으로 1위에 랭크돼 있단 말이에요.

-예, 맞습니다. 팬 여러분이 기대해보실 만한 관전 포인트는 평균자책점 자체가 아니라요. 이게 구원투수로서만 등판해서 규정 이닝을 채워 나온 순위라는 겁니다. 혹사 논란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만큼 연투능력과 이닝소화력이 있다는 거거든요.

-생각해보면 엘리펀츠는 이전부터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할 선수가 필요하다고 꾸준히 지적받고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최태웅 선수를 트레이드해온 게 아닌가 싶네요.

-1군 무대의 중압감을 못 이기고 무너지는 선수도 많지만……. 퓨처스 리그에서 자그마치 0.5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선수가 1군에서 와르르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거든요. 과연 이 최태웅이라는 신인이 과부하 상태에 있는 엘리펀츠 불펜의 숨통을 터줄 수 있을지. 기대해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

“내가 대강 기록만 훑어봤었는데 말이야. 진짜로 직구랑 체인지업밖에 없냐?”

“예. 일단 체인지업이 두 종류이긴 하지만요.”

“체인지업이 두 종류여봤자지. 아이고, 이걸 어떻게 배합해야 하나? 무슨 쌀보리 게임도 아니고.”

포수인 장기석 선배가 투덜거리는 걸 보았더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슬쩍 나왔다. 쌀보리 게임이라? 저번에도 들은 적 있는 표현인데, 역시 사람이 생각하는 건 다 거기서 거기인가 보네.

“정 그러시면 제가 배합해봐도 되겠습니까?”

“네가? 하긴, 맨날 던지던 공이니까 네가 더 잘 써먹기야 하겠지만…….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그럼 사인은…….”

“필요하시다면 내기는 하겠는데, 사실 딱히 필요 없을 겁니다. 제가 구속이 빠른 것도 아니라서 이것저것 섞어 던져도 보고 잡으면 그만이거든요. 사회인 야구 할 때도 제가 꼴리는 대로 던지면 포수는 재깍재깍 보고 잡았어요.”

“……이놈 참 희한하게 야구를 하고 다녔네. 뭐, 그래라. 좋을 대로 던져 봐.”

다행스럽게도 가장 큰 장벽일지 모르는 부분은 이렇게 해결되었다. 어쩌면 경기 전에 호흡을 맞춰본 적 없는 것이 오히려 득이 됐는지 모르겠다.

마운드에 올라가자, 만원에 가까운 관중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처음 보는 신인이 올라왔다며,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드문드문 들려왔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1군 무대의 첫 등판.

보통 같으면 간담이 서늘하다거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을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별다른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야 뭐 여럿 있겠지만……. 일단,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저거다.

홈 플레이트 앞에서 푸르스름하게 일렁이고 있는 스트라이크존.

언제나 내 평상심을 유지시켜주는 절대적인 표적판.

“처음 보는 투수다 이거지?”

단순히 쿨존을 노리고 던지기만 하는 단계는 넘어선지 오래였다.

스트라이크존의 핫존과 쿨존이 변화하는 데는 대부분 이유가 있다. 명색이 1군 타자씩이나 되는데, 저렇게 쿨존으로 범벅이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저건 타자가 공을 칠 마음이 없다는 의미.

주자가 있다면 헛스윙으로 도루를 지원하거나, 희생 번트를 대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닝의 선두타자. 그런데도 칠 마음이 없다는 것은, 초대면인 내 공을 최대한 많이 지켜보려 한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데이터 수집이 목적이라면, 내가 할 일은 당연히 찬물을 끼얹어주는 거다.

신인이라면 패기.

패기라고 하려면,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에 아리랑볼 하나 던져주는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어?

퍼억!

“스트라이크!”

지금처럼, 휘두를 생각이 없던 타자가 한복판 똥볼에 움찔하는 모습을 보는 건 마약과도 같은 쾌감이었다.

왜, 게임을 할 때 치트키 쓰면 시시하다는 사람이 있지. 나는 거기에 반만 동의하는 편이다.

치트키 플레이가 시시한 이유는 상대가 컴퓨터 프로그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해킹 프로그램 같은 걸로 나와 똑같은 사람을 학살하고 다니는 재미는 결코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법이다.

“나를 얕보는 건지, 단순한 건지.”

2구를 던지기 전.

스트라이크존이 노골적으로 변하는 걸 보면서 나는 속으로 피식 비웃었다.

아마도 내가 신인이라 긴장감 때문에 공이 한복판에 몰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스트라이크존 대부분은 여전히 파랗게 빛나는 가운데, 한복판만 새빨간 색으로 변했다.

방금처럼 한복판에 몰리는 공이 온다면, 굳이 지켜보지 않고 힘껏 갈기겠다는 의미!

부웅!

“스트라이크!”

그에 답변하는 내 2구는 느슨하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다.

‘낙폭’이라고 표현할 만한 무브먼트도 아니었는데, 또 몰리는 공이라고 생각했는지 방망이가 허무하게 튀어나왔다.

“…….”

방심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울컥해서 전의(戰意)를 불태우게 됐다고 해야겠지. 타자가 험악하게 나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스트라이크존의 형태가 굉장히 보편적인 형태로 돌아왔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린 건 칭찬해줘도 될 법하지만. 괜찮겠냐? 내 스피드에 타이밍 한 번 맞춰보지 못하고 벌써 투 스트라이크인데.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일반 미션 ‘삼구 삼진’을 달성했습니다.]

[5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2구 연속으로 시속 70km대의 체인지업을 보여준 뒤에 몸쪽 높은 코스를 찌르는 119km/h짜리 포심 패스트볼.

엉거주춤하게 스윙하다가 발레하듯이 빙 도는 모습을 보고, 스콜피온즈 더그아웃에서 폭소가 터졌다.

“푸하하하!”

“야, 임마! 졸았냐? 그걸 왜 그렇게 휘둘러?”

“아이고, 남사스러워라. 쪽팔리니까 어디 가서 우리 팀이라고 하지 마라.”

“방금 봤어? 직구인데 방망이가 빨리 돌았던 거?”

경기 중에 프로 선수들이 보이기에는 조금 경박한 태도라는 생각도 들지만. 베테랑 타자가 루키의 똥볼에 삼구 삼진 당한 셈이니, 전혀 이해 못할 반응도 아니었다.

그래. 웃어라. 지금 아니면 언제 즐기겠냐.

***

엘리펀츠와의 3연전 첫 경기.

스콜피온즈는 오늘 경기에서 단순히 승리만을 노리지 않았다. 엘리펀츠 불펜이 가뜩이나 과부하된 상황에 선발 로테이션에 펑크가 났던 것이다.

반쯤은 엘리펀츠의 자폭이지만, 프로의 세계는 비정한 법. 약점이 보인다면 철저하게 후벼파는 것이 당연한 처세였다.

오늘 엘리펀츠의 불펜을 소모시킨다면, 내일과 모레 경기는 지독하게 수월해진다. 스윕에 성공한다면 리그 5위인 스콜피온즈도 단숨에 순위 경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선발로 올라온 정기용을 두들겨서 끌어내릴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오늘 이적해온 신인이 뒤이어 등판하는 걸 보고도 ‘궁지에 몰렸구나’라며 흥겨웠는데…… 갑자기 흐름이 뚝 끊어졌다.

따악!

“큭…….”

따악!

“어, 어라?”

따악!

“큭, 뭐, 뭐가 이렇게 느리냐?”

3회에야 비실비실한 공에 조금 허둥댄 것도 있고 하위 타선이었다지만. 4회에는 9, 1, 2번으로 올라가는 상위 타선. 단순히 직구와 체인지업의 조합이라는 걸 깨닫고 분기충천했는데도, 과속방지턱에라도 걸린 것처럼 덜컥거리고 말았다.

“야야야, 장난 까냐?”

“루키랑 놀고 있을 때 아니잖아. 후딱 내려보내고 하성이랑 상훈이 불러내야 내일이랑 모레 경기에서 숨통 좀 트일 거 아냐.”

“비리리한 공이 의외로 치기 힘들 때도 있다는 건 아는데……. 그러면 투구수라도 좀 늘려야지. 쟤가 이닝 다 처먹게 만들면 어쩌자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누가 봐도 대단한 공이라면 모를까. 불과 13구만에 6아웃을 헌납한 것이다. 타석에 들어갔던 선수들은 양심 때문에라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폼만 봐도 체인지업이랑 패스트볼이랑 딱 구분이 되는구만.”

“공이 어중간하게 만만해 보여서 그래. 자꾸 때리고 싶어지는데……. 일단 공이 80도 안 나오니까 의외로 타이밍이 낯설어.”

“그래도 막상 휘둘러보면 방망이에는 맞지?”

“어. 쓸데없이 컨택 자체는 오히려 잘 돼서 문제야. 괜히 투구수만 절약해줬잖아.”

워낙 우스워보이는 공이라서 보고 치면 된다는 생각에 무시했을 뿐이지. 타석에 들어갔던 타자들이 모여서 의논하다 보면, 피칭 스타일이 어떤지는 금세 정리가 된다.

5회의 선두타자. 3번 민재호가 앞선 타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본 끝에 결론 내렸다.

“그럼 일단 커트를 좀 해봐야겠네:

“커트?”

“내가 볼 때는 그냥 타이밍이 어긋나서 빗맞은 공이었어. 당연하지. 우리가 7~80짜리 공을 어디서 보냐? 타이밍에 좀 익숙해져야 할 거 아냐.”

“…….”

민재호가 내놓은 대응책은 꽤나 파격적이었으나, 그럭저럭 이치에 맞았다. 시속 120km짜리 직구만 해도, 이미 프로인 그들로서는 거의 구경할 일이 없는 공이었다.

너무 비상식적인 스피드의 공은 프로에게도 맹점이 된다. 어했든 방망이에 맞추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 계속 건드리다 보면 정타를 때릴 수 있는 타이밍이 파악되리라는 것이었다.

퍼억! 따악! 따악! 따악!

“스트라이크!” “파울!” “파울!” “파울!”

민재호의 대응책은 제법 적절했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만 6개의 파울.

자꾸만 방망이로 건드리다 보니, 어떤 타이밍에 스윙해야 정타가 나올런지 속도 감각이 대강 맞춰졌던 것이다.

‘그나저나 신인이면서 깡 하나는 대단하네. 어떻게 이딴 공을 계속 스트라이크존에 넣을 생각을 하지?’

아무래도 오프 스피드 피치로 먹고 사는 투수인가 본데. 두 가지 타이밍으로 던지는 체인지업은 괜찮지만, 패스트볼 던지는 폼이 도드라지다보니까 썩 위협적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엘리펀츠에서 왜 저런 투수를 이적시켜 왔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아무튼, 다음 공. 오면 친다.’

방망이를 고쳐잡자, 최태웅의 오른발이 천천히 투수판을 밟았다.

매끄러운 와인드업.

공을 쥔 오른팔이 휘둘러지는 순간, 민재호의 눈이 부릅떠졌다.

‘패스트볼!’

체인지업과는 명백하게 구분되는 팔 스윙에, 민재호가 재빨리 타이밍을 당겨 잡았다.

죄다 너무 느려서 헷갈리는 공이지만, 그래도 둘 중 하나를 골라잡으라면 패스트볼이 낫다. 7~80km짜리 공은 겪을 일이 거의 없지만, 120km 짜리 공은 변화구 타이밍으로나마 종종 겪어─

‘빨라!’

뭐지 이건? 130? 135?

기껏 맞춰둔 속도감각을 모조리 깨부수는 스피드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방망이는 이미 뻗어나간 뒤.

어중간하게 거둘 수 있는 기세도 아닌지라, 민재호는 에라 모르겠다며 오히려 스윙에 힘을 실었다.

따악!

그리고, 묵직한 타격음이 울려퍼졌다.

***

“미친!”

나도 모르게 경악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무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더니, 목에서 으드득 소리가 다 났다.

“마이 볼! 마이 볼!”

워닝 트랙까지 날아간 플라이볼.

허겁지겁 뛰어간 중견수가 가까스로 펜스 앞에서 잡아냈지만, 바람만 잘 탔어도 넘어갔을 공이었다. 아니, 폴대 근처의 짧은 코스였다면 빼도 박도 못하는 홈런이었다.

“이게 말이 돼?”

시속 70km짜리 체인지업을 8개나 보여준 직후에 대뜸 던진 시속 134km짜리 직구였다.

느닷없이 60km 이상이나 빨라진 공을 순간적인 반응으로 저렇게 쳐낸다고? 그것도 내 직구 스피드를 120km 미만으로 알고 있었던 상태인데도?

2군에서는 미리 알고 대비한 타자조차 대처하지 못한 공이다. 저렇게까지 좋은 타구가 나온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반응은 엉겁결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은 타자가…… 몇 명이지?”

1군과 2군의 차이가 무엇인지, 이제야 비로소 체감한 기분이었다. 남은 아웃 카운트를 헤아렸더니, 괜히 등골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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