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58화 (58/90)

< 괴물 배터리 -058- >

058.

“최태웅이라고? 어어, 그래. 들어본 것 같다. 퓨처스에서 방어율 1등 먹던 애 맞지?”

“트레이드? 트레이드 있었나?”

“어, 그래. 반갑다. 어느 학교…… 아아, 고등학교 때는 야구 안 했다고?”

“반갑다. 최태웅이라고? 우리 오래 보자.”

라커룸에 짐만 대강 정리하고 나온 나는 여기저기 인사부터 하러 다녔다.

내가 엘리트 야구 코스를 안 밟아서 그런가. 다들 데면데면한 반응이었지만, 텃세나 군기 잡는 모습 같은 건 없었다.

선배들 입장에서야 내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신인이겠지만, 내 입장에서 선배들은 TV에서나 보던 프로 선수였다. 그런 이들에게 똑같은 선수로서 인사를 주고받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보통 야릇한 게 아니었다.

“어제 그렇게 잔뜩 던졌다니까, 오늘 등판하는 일은 없을 거다. 적당히 컨디션 관리 수준으로 알아서 몸 풀고 있어라. 2군에서도 그쯤은 알아서 했지?”

“예. 걱정하지 마십쇼.”

오늘 선발투수가 빵꾸났다고 했던가. 그 때문에 정신이 없는지, 투수코치는 낯선 환경에 쭈뼛거리는 나를 방치하고 불펜 쪽으로 슥 가버렸다.

괜히 좀 서먹했으나, 어차피 2군에서도 공 던질 때 말고는 혼자 훈련한 적이 많았다. 거기다가 오늘은 등판할 일이 없으리라 못 박아주기도 했고.

그래서 오늘 하루는 팀 분위기 파악을 우선해두려고 했는데…….

“이거, 진짜로 오늘 안 나가도 되는 거 맞아?”

최근 경기 기록을 대강 훑어보던 나는 미간이 다 저절로 찌푸려졌다.

선발투수 빵꾸난 게 골치 아픈 일이기야 해도 저리 예민할 필요 있나 싶었는데……. 최근 불펜 기용을 보니까 그럴 만도 하네.

보통 승리조라고 불리는 불펜 A조의 경우는 마무리까지 포함해서 4일 연투. 성적만 보면 ‘추격조’보다 패전처리과라고 불러야 할 법한 불펜 B조도 퐁당퐁당 페이스로 한 달 내내 마운드를 밟았다.

토네이도즈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차이점은 있었다. 책임 이닝을 간신히 지킬 뿐이라서 그렇지, 선발투수진의 방어율 자체가 썩 나쁘지는 않다는 부분이다.

이래서 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반겼구만? 내 연투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인 줄은 몰랐다.

오늘 등판 없다고 못 박히기야 했지만. 팀 상황이 이 모양이어서야……. 흐음…….

혹시 모르는데, 준비 정도는 해두는 게 좋으려나.

***

경기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관중석도 조금씩 사람으로 채워졌다. TV에서나 보던 프로들에게 인사하러 다닐 때만 해도 얼떨떨했는데, 저 광경을 보니까 비로소 내가 1군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오늘은 시구 같은 게 없었다. 애국가 제창과 선발 라인업을 소개하고는 바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저기 뭐냐?”

“정기용? 아니, 왜 정기용이 선발로 나와?”

“뭐야 뭐야? 손진현은 어쨌어?”

스마트폰 같은 게 발달했어도, 현장 관람객에게는 오히려 세세한 정보 전달이 늦기 마련이다. 전광판에 소개된 선발투수가 예고와 다르자, 관중석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선발예고제는 원래 팬서비스의 일환일 뿐. 위반한 팀을 구체적으로 제재하는 규정은 없었다. 비매너라고 팬들한테 욕이나 먹는 정도지. 이번에는 선발투수의 손톱이 깨졌다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고, 상대 팀의 양해도 얻은 뒤였다.

인터넷 검색 등으로 선발 교체 이유가 조금씩 전달된 모양이지만, 웅성거림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웬만한 팬이라면 최근 엘리펀츠의 불펜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방귀도 참아야 할 판국인데, 물똥을 싸질러버렸네…….”

“이러면 오늘 웬만한 애들은 5일 연투 아니야?”

“이거 오늘 넘긴다고 될 일이 아닌데…….”

분위기가 어수선하거나 말거나,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정기용이 마운드에 올라가고, 스콜피온즈의 1번 타자도 타석에 들어왔다. 심판이 플레이볼을 선언하자 관중석에서도 함성과 응원 음악이 흘러나왔다.

-날려버려! 날려버려!

-날기 싫음! 달려버려!

정기용은 생일이 빨라서 그렇지 나이 자체는 나와 동갑인 고졸 신인이었다.

로스터에는 꾸준히 등록되었던 모양이지만, 미안하게도 잘 모르겠다. 그냥저냥 무난한 상황에 올라와서 무난하게 던지고 내려가는, 흔하디흔한 불펜 투수라는 말이었다.

평균자책점 4.42.

오늘 경기를 책임진다기보다는, 그나마 가장 체력적인 여유가 돼서 오른 것이리라. 내가 보기에도 이 팀이 선발 로테이션을 당겨썼다간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질 것 같았다.

엉겁결에 선발 데뷔를 치르게 된 정기용이 크게 심호흡했다. 1회 마운드에 올라본 것은 처음인가 보지만, 수없이 실전을 치러본 프로가 새삼스럽게 긴장할 것은 없었다.

퍼억!

“볼!”

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묵직한 직구가 포수 미트에 틀어박힌다. 전광판에 찍힌 142라는 숫자를 보고서 나는 무심코 탄성을 냈다.

프로야구 전체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스피드도 아니지만……. 내가 바로 어제까지 있었던 2군 리그에서는 웬만큼 행세하고도 남을 직구였다.

중간에 허리를 지키러 올라왔다면 모를까. 선발로 올라갔으니까 일단은 힘닿는 데까지 이닝을 소화할 생각일 터. 저 142km/h는 나름대로 힘을 줄이고 던졌는데도 나온 스피드라는 것이다.

퍼억!

“스트라이크!”

1군과 2군의 장벽은 투수의 질적 차이에서 온다고 하더니만. 어렴풋이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던 말이 지금은 확실하게 피부에 와 달았다.

무서운 것은 저만한 직구를 뿌리는 투수조차 리그에서 별 존재감을 못 낸다는 점이었다.

조만간 데뷔해서 120km짜리 직구 던지면, 다른 의미에서 임팩트는 대단하겠네. 프로 투수가 다 150쯤 던지는 줄 아는 사람도 많다는데, 뭐 저딴 똥볼 투수를 등판시키느냐며 대뜸 야유할지도.

퍼억!

“볼!”

그러고 보니 신인 투수보다 신인 타자가 1군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말도 있지. 투수야 침착하게 자기 공만 던지면 어떻게든 연명되지만, 타자는 1군에 올라오는 순간 갑자기 상대하는 공의 수준이 확 달라진다면서.

퍼억!

“스트라이크!”

하지만 그게 정말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1군에서 나름대로 살아남은 타자라면, 그런 투수와 겨룰 만한 역량을 갖추었다는 말인데.

그러니까 말하자면…….

따악!

“우와아아!”

“넘어간다! 넘어간다!”

2군에서는 보기 드문 저런 공이 넘어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거다.

***

감독은 쉽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들 한다. 이길 때는 상관없어도, 질 때는 시합 자체와 무관한 긴장감을 전염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유승혁 감독은 표정을 감추는데 능숙한 인물이 아니었다. 진땀으로 범벅된 정기용을 보는 그의 얼굴이 막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돌아버리겠네. 벌써 내려오면 안 되는데…….”

1.2이닝 4실점.

굳이 말하자면 대량실점의 범주에 들어가겠으나, 이제 겨우 2회가 끝난 상태. 평범하게 보면 시합을 포기할 만한 점수 차이도 아니었다. 엘리펀츠는 타력으로 먹고사는 팀이었으니까 더더욱 그러했다.

문제는 정기용이 프로 데뷔 이래 40구 이상을 던진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실점해도 괜찮으니까, 최다 투구수를 갱신할 각오로 3~4이닝만 소화해주길 바란 기용이었다. 하지만 1회 선두타자 홈런을 맞고 헤롱거리더니, 2회에는 완전히 제구가 위축되어 버렸다.

‘투구수가 벌써 50개. 실점이고 나발이고 간에, 저 상태로는 마운드 소화 자체를 못해.’

무슨 벌투시키는 것도 아니고. 감독으로서, 선수가 이런 식으로 무한정 평균자책점 말아먹게 방치할 수만도 없었다. 정기용의 속투는 명백히 무리였다.

‘저쪽 타선이 쓸데없이 기세 타버렸어. 지금 누가 나가도 곱게는 못 막는다.’

경기 전에 구상한 투수 운용은 파토가 나버렸다.

팬들이 알면 뒤집어지겠지만, 유승혁 감독은 이 시점에서 경기를 버릴 구상을 굳혔다. 이건 죽어라 덤벼서 이겨도 10패 가까운 부작용을 감수해야 할 경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를…….’

어마어마한 비난이 예상돼서 그렇지. 이런 경기를 넘기는 방법은 단순하다. 투수 하나를 아예 이 경기의 제물로 바쳐버리는 것이다. 아니, 단순하다고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비난을 버티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만만한 수는 아니었다.

“어쭈구리?”

유승혁 감독의 눈썹이 꿈틀했다. 불길한 낌새를 느꼈는지, 투수들이 노골적으로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독님. 저 내년에 FA인 거 아시잖아요……. 성적 관리 해야 돼요…….”

“이 새끼가 아주 미쳐 돌아가는구만. 투수가 FA 한 번 처먹었으면 됐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지랄이야? 영혼을 불사르고 박수칠 때 떠날 생각은 않고…….”

“저는 와이프 뱃속에 쌍둥이가……. 요새 분유값도 만만치 않다잖아요…….”

“그러게 주식 하지 말라고 했지! 연봉이 몇억인데 분유값 타령하는 게 말이나 돼? 내가 요새 너무 좀 풀어줬지? 어디서 슬금슬금 간 보고 자빠졌어!”

말이야 저렇게 해도, 누구 하나가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다. 막상 자기가 지목당했을 때, 일부러 삐딱선을 탈 만한 녀석은 거의 없었다.

사실 유승혁 감독으로서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위장이 쓰렸다. 차라리 미운털 박힌 놈이라도 있으면 악플 세례 시원하게 각오하고 갈아버리기라도 할 텐데…….

“응? 그런데 너 뭐하니?”

기왕 버릴 거라면 미친 척하고 3회부터 야수 중에서 한 명 마운드에 올려볼까─ 극단적인 망상까지 하던 유승혁 감독의 눈에 묘한 광경이 비쳤다. 불펜도 아니고 파울존 한쪽 구석에서, 오늘 이적해온 신인이 캐치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냥 가볍게 워밍업만 좀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등판 없다고 하시긴 했는데, 보니까 한두 이닝쯤은 급하게 올라갈 수도 있지 싶어서요.”

“……야, 니네 들었냐?”

기가 막힌다는 듯이 피식 웃은 유승혁 감독이 다른 선수들을 들어보면서 이죽거렸다.

“저거 보면서 뭐 느껴지는 거 없냐? 어제 60개 던지고 온 신인이 팀을 위해서 희생 한 번 해보겠다고 하는데?”

“저희도 젊을 때는 다 저렇게 객기 부려봤던 거 아시잖아요.”

“열정 페이 반대!”

아니꼽다는 듯이 투수진을 쏘아보던 유승혁 감독이 다시 최태웅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열정적인 신인을 향한 눈빛이라고 해서 딱히 호의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기특하게는 생각하는데, 너 솔직히 오버다. 패기랑 객기 정도는 구분해둬라.”

“예?”

“난 분명히 오늘 너 올릴 생각 없다고 했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프로쯤 됐으면 자기 몸은 알아서 챙겨야지. 쌍팔년도에 왜 그렇게 선수 생명들이 짧았는지 생각해봐라.”

이 상황에서 면박을 당할 줄은 몰랐던지라, 최태웅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방금까지 티격태격하던 투수들이 젊은 애만 이뻐한다며 ‘우우’하고 가볍게 야유했다.

“감독님.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는데요.”

최태웅이 살짝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꾸했다.

보통 신인이라면 주눅 들어서 찌그러질 타이밍인지라, 유승혁 감독은 살짝 놀랐다.

“지금 상황이 혹사인 건 다른 선배들도 마찬가지인데, 차악을 골라야죠. 기왕이면 어깨 싱싱한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

“……뭐?”

“그리고 선발투수 기준으로 생각하면 60구 별것도 아니잖아요. 테스트하기에는 아주 나쁘지도 않지 않습니까? 적어도 오래 버틸 자신은 있습니다.”

“…….”

자신이 당연히 선발투수 후보로 고려될 거라는 듯한 말에 유승혁 감독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건…….’

무의식적으로 풍긴 뉘앙스가 아니라 어필이다.

자신은 선발투수가 되고 싶다는.

당돌함과 시건방짐 사이에서 미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태도였으나, 유승혁 감독은 의외로 불쾌하지가 않았다.

1군에 갓 올라온 신인이라고 생각하면 꽤 바람직한 패기였다.

단순히 마운드에 올라가고 싶어서 좀이 쑤셔 하는 것과는 달리, 비전이 느껴졌다. 경험상, 이런 타입은 갑작스러운 실전 마운드에서 새가슴이 되지 않는다.

‘어제 60개 던졌다는 말에 정신이 팔리긴 했는데, 생각해보면 이놈 투구수 아끼는 게 거의 괴랄한 수준이었지?’

최태웅의 리포트를 떠올린 유승혁 감독이 눈썹 사이를 좁히면서 고민했다. 생각해보면 지금이 신인을 테스트해보기에 썩 나쁜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한 번 올려볼 수도 있기는 한데…….”

유승혁 감독이 음흉하게 씨익 웃으면서 최태웅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내가 너 혹사하려고 한 게 아니라, 네가 우기고 우겨서 올라간 거다. 알긋냐?”

“예?”

“혹시라도 누가 물어보면 대답 잘해라잉? 나 욕먹게 하면 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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