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57화 (57/90)

< 괴물 배터리 -057- >

057.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몸을 움직여 보는데 컨디션이 영 별로였다. 확실히 어제 많이 던지기는 했으니까. 60개가 넘었나, 조금 모자랐나.

체인지업이 느린 공이라고 해서 스태미너를 덜 잡아먹는 것은 아니다. 손바닥으로 공을 감싸서, 똑같은 힘으로 던지는데도 느리게 날아가는 것이 투구 원리이기 때문이다. 숙련된 투수는 힘을 덜 주고도 똑같은 폼으로 던질 수 있다지만, 그건 말 그대로 숙련된 투수 얘기고.

전력투구를 안 하는 나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불펜 투수가 이만큼 던졌다면 삭신이 쑤셔서 죽는 소리를 했을 거다.

오늘 하루는 진짜 디비져 있어야지. 어제 60구를 던진 불펜 투수가 오늘도 마운드에 오를 가능성은 0에 가까우니까.

등판할지 어떨지도 불확실한 상태에서 긴장감만 유지하는 게 영 체질에 안 맞았는데. 오늘은 간만에 특등석에서 경기 관람하는 관중의 기분으로 꿀이나 빨아야…….

“최태웅. 짐 싸라.”

“예?”

“저쪽에서 아주 극진하네. 설마 픽업까지 하러올 줄은 몰랐어. 찾아가느라 욕보지는 않겠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내 입으로 두어 경기 기다려 달라고 했던지라 바로 못 알아들었을 뿐. 구단주한테서 귀띔을 들은 지 이틀밖에 안 됐다. 짐 싸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뻔한 거였다.

“어느 팀입니까?”

“엘리펀츠다. 자네가 어제 했던 시위가 바로 먹힌 모양이야. 얼마라고는 정확히 못 들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이적료를 올려서 불렀다더군.”

“정말요?”

“그래. 어차피 이적료야 자네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도 아니지만.”

“…….”

이미 아는 얘기인데도 그렇게 들으니까 조금 서럽네. 나는 스포츠 기사에서 누구 몸값이 1천억이니 어쩌느니 하는 거 보면 거시기하더라. 이적료는 선수가 받는 돈도 아닌데.

물론, 이적료가 그만큼 나오는 세계급 선수는 연봉도 수백억 한다지만……. 나라고 그만큼 받아가면서 유아이랑 꽁냥꽁냥해보지 말라는 법 있어? 오정환 선배도 숙녀시대랑 연애하는데.

“아무튼, 축하한다. 거기 가서도 잘 해봐라.”

정식 구단이 독립 구단으로부터 선수를 사갈 때는 대부분 당장 써먹을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 트레이드는 사실상 1군 콜업인 셈이었다.

이 순간이 오면 머릿속이 하얘진다거나 심장이 두근거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 생각이 안 들었다.

야구하는 초능력까지 가졌는데 설마 1군 콜업도 못 받겠어, 하는 여유와는 조금 다르다. 단순히 실감이 안 난다고 해야 하나? 졸업하고 나서 내일 학교 안 가도 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던, 딱 그런 느낌이었다.

“어? 태웅이 너…….”

“가는 거냐? 어느 팀이야?”

인터뷰 같은 걸 보면 동료가 트레이드된 사실을 기사 보고서야 알았다는 얘기가 종종 보인다.

남의 일일 때는 박정하다 생각하고 말았는데, 내 일이 되고 보니 어떤 사정인지 알 듯도 했다.

프런트끼리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면, 선수는 당일에라도 바로 이동해야 한다. 시간이 빠듯하기도 하거니와, 2군에서 고생하는 동료들한테 염장 지르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짐 챙기다가 맞닥뜨린 선수하고만 가볍게 인사를 했는데, 의외로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제일 먼저 불려갈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으면서 내 어깨나 등을 툭툭 칠 뿐이었다.

“아이고. 규정 이닝 다 채울 정도로 불편에서 꾸역꾸역 막아주던 놈이 이렇게 가버리면 우리 허리는 어쩌냐. 우린 이제 다 죽었네.”

“뜬 다음에 우리 모른 체하고 그러지 마라.”

이래저래 뒷정리하고 엘리펀츠에서 나왔다는 사람을 만났는데, 낯익은 얼굴이었다. 표정이 씰룩거리는 걸 보니, 내가 자기를 알아봤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조수석에 오르자 강충식이 피식 웃으면서 말을 붙여왔다.

“그거 알아요? 최 선수는 진짜 양심 불량입니다.”

“예?”

“트라이아웃을 보러 왔으면 당연히 트라이아웃 연 팀하고 도장을 찍었어야지. 옆에서 찌른다고 쪼르르 토네이도즈 가버리는 건 뭡니까? 박 감독님도 이거 진짜 더티 플레이야. 제소해서 규정을 만들어야 된다니까. 이런 식이면 누가 돈 들여가면서 트라이아웃을 열겠냐고요. 어차피 한솥밥 먹을 거 쓸데없이 멀리 돌아왔네.”

“하하하…….”

웃자는 말 같으면서도 강충식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보아하니 트라이아웃에서 나를 바로 잡지 못한 게 분했던 모양이다. 그러면 내가 엘리펀츠로 이적되는 게 이 사람 입김인가?

확실히, 내가 퓨처스 리그에 찍은 성적을 보면 아쉬울 법도 했다. 제 발로 굴러온 호박을 코앞에서 놓친 게 됐으니까.

찔리는 점이 없는 것도 아닌지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둘러댈 따름이었다.

“그거야 또 모르는 일이죠. 엘리펀츠에 들어갔으면 출장 자체를 못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면 어디 1군 올라갈 기회가 생기겠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짐작은 가는데. 그건 최선수가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 2군 감독님도…….”

“아,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제가 한참 어린데요.”

“흠흠, 그럴까? 아무튼, 우리 2군 감독님도 그렇게 머리 꽉 막힌 사람 아니라고. 하다못해 자체 청백전에서라도 기회는 줘. 자네가 결과만 꾸준히 냈다면 오히려 우리 쪽에 오는 게 빠른 길이었을 수도 있어.”

“지금도 그렇게 늦은 건 아닌데요 뭘.”

“어이구. 속도 좋은 친구네. 아니, 자신감인가? 언제든지 올라갈 수 있다는?”

강충식이 피식 웃으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낯설어서 쭈뼛대는 나와 달리,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꽤 친근했다. 저렇게 불평하면서도,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첫 1군행에 긴장했으리라 생각하는지, 강 스카우트는 운전하면서 틈틈이 이런저런 화제를 던져 왔다.

“우리 엘리펀츠 상황은 좀 아나?”

“글쎄요……. 승패까지는 잘 모르겠고, 지금 4위죠? 타격 빨로 많이 버티던데…….”

“14승 15패. 딱 반타작이지. 그런데 1위랑 2위만 너무 독주해서, 3위 자리 놓고 나머지가 개싸움하고 있어. 내가 보기에는 좀 빠듯해.”

“3위랑 승차도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직 시즌 초반인데, 벌써 앓는 소리 할 건 없지 않아요?”

한국의 프로야구 구단은 모두 12개.

북부 리그 6팀과 남부 리그 6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리그의 최종 승자끼리 7전 4선승제의 한국 시리즈를 치른다.

리그 우승자를 결정하는 방식은 정규 시즌 상위 3팀의 플레이오프. 전체 팀의 절반이나 가을야구를 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매년 얘기가 나오지만, 그건 지금 따질 일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직 30경기밖에 안 됐으니 현 꼴찌가 반등해서 가을야구를 하게 돼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당연한 지적을 해본 건데, 강 스카우트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선수진 평균연령이 30.2세라는 건 아냐?”

“……헐.”

“원래는 올해 유승혁 감독하고 계약했을 때부터 리빌딩이 목적이었어. 막말로 2년쯤 꼴찌해도 되니까 오래 갈 유망주 키우라고. 그런데 어중간하게 승률을 내니까 팬들이 괜히 들썩거리는 거야.”

나는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면서 끄덕거렸다. 그거야 있을 법한 일이지. 리빌딩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도, 팬은 응원하는 팀이 항상 이기기를 바라니까.

“여기까지는 있을 법한 일이지. 그런데 문제는 단장이라는 새끼야. 누가 낙하산 아니랄까 봐,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어서 쪼아대는 거야. 유 감독님이랑 계약할 때 했던 말은 싹 다 갈아버리고.”

“…….”

“사실 프로라면 리빌딩이랑 순위 싸움을 동시에 하는 게 맞긴 하지. 하지만 그게 쉽나? 라인업에 FA급이 득시글거리는데 순위 싸움을 하라면, 젊은 애들 줄 기회가 어떻게 나겠어?”

강 스카우트의 푸념 같은 소리를 듣고 있자니, 괜히 입안이 텁텁해졌다. 스포츠 기사 같은 데서 접한다면 꽤 흥미진진한 얘기다. 하지만 나와 관련된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거 혹시 줄서기니 파벌이니 정치니 하는 거에 휘둘려야 하는 거 아니겠지? 나는 그런 거 별로인데. 나처럼 때 묻지 않고 순수한 영혼이 어떻게 그런 복마전을 헤쳐나오겠냐고. 그냥 야구만 잘하면 안 되나?

“노익장이라는 게, 순간순간에 한 방씩 해주는 건 좋은데……. 역시 스태미너가 문제란 말이야. 깡으로도 나이는 도저히 못 속이거든. 타자는 그나마 낫지만, 투수진에서는 끝까지 이닝을 소화할만한 사람이 없다 이거야. 못 던지는 것도 아닌데.”

“으음……. 그거 혹시, 제 보직 얘기하는 겁니까?”

“뭐, 그렇지. 당장 너를 구한 이유 자체는 연투능력 때문이거든. 6선발로 로테이션을 넉넉하게 돌릴 생각이신가 봐. 2군에서처럼 0점대 방어율 찍는 건 기대도 안 해. 연투 능력만 보여줘도 출장은 보장된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

강 스카우트는 내가 팀에서 어떤 식으로 처세해야 하는지 조언해주려는 거였나 보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는데, 내 눈썹이 괜히 찌푸려졌다. 이번에도 불펜이라…….

그야 물론, 가자마자 선발 자리가 뚝 떨어질 거라고는 기대 안 했다. 그래도 아무 보직이나 받아서 꾸역꾸역 던지다 보면 선발투수로 고려해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팀 사정에 따라서 특정 보직을 의식하고서 날 데려온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언제 갑자기 등판할지 몰라서 경기 내내 긴장하고……. 기껏 어깨 풀어놨는데 경기 흐름이 바뀌어서 못 나가고……. 그렇게 답답한 생활을 시즌 내내 하게 될 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니. 숫자로 보여주면 되지. 올라갈 때마다 3이닝씩 꼬박꼬박 틀어막으면, 테스트 차원에서라도 중간에 선발 한 게임쯤 올려주지 않겠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끙끙거릴 거 없다. 기회는 닿을 듯 말 듯한 정도가 아니라, 이미 손아귀에 잡힌 상태였으니까.

보직 따위는 시간이 해결해줄 사소한 문제다. 고졸 신인보다야 못해도, 대졸 신인보다는 싱싱한 몸이니까. 세월과 나이는 명백하게 내 편이다.

***

애당초 엘리펀츠 2군 구장인 성남에서 출발한지라 잠실까지는 금방이었다.

프런트 직원부터 만나서 등록 절차인지 뭔지를 마치고 그라운드에 나왔더니, 수많은 선수가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2군이라면 지금쯤 시합이 한창일 텐데. 1군 경기는 대부분 저녁에 열리다 보니 이제야 몸들을 푸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최태웅이라고 합니다.”

“감독님. 말씀드렸던 그 친구 데려왔습니다. 토네이도즈에서 이적해온…….”

“어, 그래. 얘야? 그 최태웅이? 아이고, 그래 어서 와라. 차 안 막혔냐? 빨리도 왔네.”

다행히도 강 스카우트가 끝까지 따라와 줘서, 허리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더니, 투수들의 불펜피칭을 지켜보던 유승혁 감독이 반색하며 내 목에 팔을 둘러 왔다. 어, 어어? 뭐, 뭐냐, 이 친한 척은?

초면인 감독이 불알친구 대하듯이 부비적거리니, 나는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몰라서 허둥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승혁 감독은 혼자서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어댔다.

“온다고 해서 자료 좀 봤다. 희한하게 던지는데도 성적은 죽여주데? 니가 그렇게 이닝을 배 터지게 잘 처먹는다며?”

“예? 아, 예. 뭐 그냥, 불펜에서 꾸역꾸역 규정이닝 채우는 정도로…….”

“얌마! 불펜에서 규정 이닝 채웠으면 폭식이지! 그만하면 넘치는 거야! 오케이, 넌 앞으로 내가 특별히 이뼈해줄지도 모른다. 최근에 경기 언제 나갔냐?”

“어, 어제 구원으로 올라가서 3이닝 막고…….”

“3이닝? 공은 몇 개나 던졌는데?”

“60개 정도……. 윽.”

갑자기 목에 둘린 팔에서 힘이 빠지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휘청거리면서 당황한 눈으로 보았더니, 오만상을 찌푸린 유승혁 감독이 의자에 털썩 앉아서 씨근거리고 있었다.

“에라이, 밸도 없는 새끼! 불펜 투수한테 60개 던지게 한다고 ‘예, 알겠습니다’하고 굽실거리면서 던지냐? 투수가 지 몸은 알아서 챙겨야지! 어제 그렇게 던졌으면 오늘 못 써먹잖아!”

“……저, 저 말씀이세요?”

“박승덕이 치사한 새끼. 독립 구단은 꼭 트레이드 하기 전에 이러더라. 어차피 이제 남의 식구 될 거니까, 보내기 전에 단물 빨아먹자는 거야 뭐야? 하여간에 상도덕이 없어요, 상도덕이.”

“…….”

으음. 생각해보니까 이게 또 그렇게 오해할 만한 상황도 되네. 어제 경기는 굳이 말하자면 내가 떼써서 오래 던졌던 건데…….

내가 이래봬도 좀 소심한지라. 초면인 감독님이 갑자기 저렇게 역정을 내니까 무서워서 자수를 못하겠다. 그냥 박승덕 감독님이 나 팔기 전에 단물 빨아먹은 걸로 하자. 그걸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감독님도 요새 잠잠하더니만, 오랜만에 성질 나오시네. 왜 이제 막 올라온 친구를 윽박지르고 그래요? 뭔 일 있으셨어요?”

적응이 안 돼서 눈알만 굴리는 나와 달리. 강 스카우트는 이런 광경을 종종 봐온 모양이다. 태연한 질문에 유승혁 감독이 짜증스럽게 허를 찼다.

“영호 놈이 불펜 던지다가 갑자기 손톱 깨졌다고 오늘 선발 못 뛰겠다잖아. 그래서 지금 땜빵  넣을 만한 애 없나 보던 중이었다고.”

“어우, 또요? 어제도 선발 빵꾸나서 땜빵 안 했어요?”

“누가 아니래냐. 저 먹튀 새끼들. 늙어서 골골거릴 거 같으면 빨랑 은퇴나 해버릴 것이지 쓸모가 없어요, 쓸모가.”

“감독님 다 들립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괄시하고 그러지 맙시다. 가뜩이나 와이프 앞에서도 요새 허리 한 번 못 펴고 있는데…….”

“똑같이 취급하지 마 새꺄. 나는 밥값 못할 거 같으니까 얼른 은퇴했잖아.”

콧김까지 씩씩 뿜어가면서 으르렁대던 감독님이 불현듯 내 쪽을 휙 돌아보았다. 어, 시발 깜짝이야. 독살스러운 눈빛을 받고 움츠러든 나에게 감독님이 씨근거렸다.

“뭘 또 뻘쭘하게 서 있어? 가서 연습하고 선수들한테도 돌아다니면서 인사나 해. 그리고 뭐 60개? 넌 시발 내가 60개 던지라고 올려보냈을 때 힘들다고 못 하겠다고 하면 뒤질 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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