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56화 (56/90)

< 괴물 배터리 -056- >

056.

“132km?”

“구속이 원래 저렇게까지 나왔어?”

엘리펀츠 선수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고작 시속 132km에 경악하는 것이 모양새 빠지지만, 세상 모든 일은 상대적인 법이다.

15개의 슬로우볼 뒤에 튀어나오는 시속 130km 대의 패스트볼. 어떤 의미에서는 1회 초에 느닷없이 시속 100마일이 날아오는 것보다도 까다로웠다.

“지가 무슨 매덕스야?”

“130짜리 던질 수 있는데도 여태 일부러 느리게 던졌다고?”

“뭐 저런 새끼가…….”

최태웅의 패스트볼은 엘리펀츠 선수들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아로새겼다.

체인지업을 커트하고, 그나마 폼이 구별되는 패스트볼을 노리는 작전은 완전히 헝클어져 버렸다.

“아웃!” “아웃!”

머릿속이 복잡해진 다음 타자들은 제대로 투구수를 늘리지도 못했다. 130km짜리 공을 의식하면서 움찔움찔하다가 슬로우볼을 건드리고 5구만에 2아웃을 헌납했다.

“직구가 130까지 나오면, 골치 아프겠는데…….”

“어. 체인지업을 죄다 커트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느린 공이 너무 많이 눈에 익으면, 130km짜리에는 도저히 반응이 안 돼.”

“차라리 슬로우볼이 눈에 익기 전에 빠르게 승부해야 하나?”

공수 교대를 하려고 움직이면서 야수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의논했다.

박현성은 선배들의 의견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따지고 들었다.

“잠깐만요! 빠르게 승부하면 안 돼요! 가뜩이나 1이닝에 10개도 안 던지는 놈인데! 오히려 숨만 돌리게 해주는 꼴이라고요!”

“그럼 어쩌라고?”

“120정도 올 줄 알았는데 130짜리가 날아와서 당한 거지, 처음부터 염두에 두면 되잖아요!”

“야, 그게 말이 쉽지.”

시속 132km에 삼진 당한 강수철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한 마디로 빠른 직구랑 느린 직구, 두 종류가 있다는 거잖아. 130짜리 기다리는데 120짜리 오면? 그건 쉬울 것 같아?”

“아…….”

한 구질을 비슷한 폼에서 다른 스피드로 던질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별개의 구질이라고 해도 좋다. 투구 폼으로 구분이 될지도 모르나, 경기 중에 발견해낼 정도로 눈에 띄는 차이는 아니었다.

“애초에 저 체인지업을 커트한다는 작전이 이상했어. 낙폭도 별로고, 그냥 비실비실하게 들어오는 똥볼인데 뭐. 그냥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면 때리면 되잖아. 왜 저걸 커트해?”

“맞아. 직구인지 체인지업인지, 폼 보면 대충 알아볼 수 있잖아.”

“패스트볼은 버리고. 빠른 체인지업인지 느린 체인지업인지 골라서 때려 보자고.”

“…….”

박현성은 선수들의 마음이 자신의 분석에서 완전히 떠난 것을 느꼈다. 애초에 그의 입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나마 투구 폼과 견제 폼에 대한 지적이 들어맞아서 다들 귀담아들었을 뿐이었다.

***

무득점으로 공수교대.

8회 말.

‘반응이 바뀌었네.’

글러브 안에서 포심 그립을 쥔 최태웅은 자신의 블러프가 맞아떨어졌다는 걸 알았다. 패스트볼을 아예 버리려는지, 쿨존이 압도적으로 넓어졌던 것이다.

하기야, 느린 직구와 빠른 직구를 구분하는 것보다는 느린 체인지업과 빠른 체인지업을 구분하는 편이 수월하니까.

실제로 자신이 던지는 공은 체인지업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니 지금의 대응은 굉장히 정석적이고 상식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퍼억! 퍼억!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엘리펀츠는 또다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강수철 상대로는 슬로우볼만 던져대던 놈이, 이번에는 집요하리만큼 패스트볼 일색의 투구를 해댔던 것이다.

“저 새끼, 뭐하는 놈이야?”

“계속 체인지업만 던지더니, 왜 갑자기 직구 남발인데?”

“우리 작전 새어나간 거 아니야?”

“사인도 아니고 말로 작전 고쳤는데 무슨 수로?”

“혹시 또 모르지. 독순술 같은 걸로 우리 작전 얘기하는 거 입술 읽었을지도.”

“얼씨구. 차라리 독심술을 한다고 하지?”

공격에서 농락당한 탓인지, 9회 초의 엘리펀츠는 내야 수비마저 흔들렸다. 토네이도즈는 실책 하나를 악착같이 물고 늘어져서 대거 4득점에 성공했다.

하지만 깨진 균형이 마지막 이닝에 반등의 불씨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아웃!”

“아웃!”

느린 공을 기다리면 빠른 공이 온다.

빠른 공을 기다리면 느린 공이 온다.

대부분의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지나가니, 버텨봤자 의미가 없다. 건드리는 것 자체는 어떻게든 되는데, 정확하게 읽지 못하면 미묘하게 타이밍이 어긋나서 빗맞은 타구가 된다.

이때쯤 돼서야 엘리펀츠는 왜 최태웅이 불펜 투수이면서도 규정 이닝을 다 채워 방어율 1위에 랭크되어 있는지 어렴풋이 느꼈다.

저 공은 단순히 밋밋한 것이 아니다. 밋밋해서 자꾸 건드리고 싶어진다는 점마저, 투수가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저 공을 정타로 날리려면 수 싸움으로는 안 된다. 운이 좋아서 내야를 빠져나가거나, 노리던 것과 다른 타이밍의 공이 와도 대처할 수 있을 만한 ‘실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애당초 2군에 죽치고 있을 리부터 없었다.

“…….”

9회 말 2아웃.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타석에, 박현성이 느릿느릿 걸어 들어왔다. 최태웅은 차가운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분석한 거 있으면 더 꺼내 봐라. 1군 올라가기 전에 미리 좀 고치게.”

포심 패스트볼 그립을 쥐자, 스트라이크존의 ‘위험 표시’가 미묘하게 넓어졌다. 그걸 보면 녀석은 다른 선수와 달리 패스트볼 노리기를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최태웅은 글러브 안에서 서클 체인지업으로 고쳐쥐고, 투수판을 밟았다.

따악! 따악! 따악!

“파울!” “파울!” “파울!”

시속 90km도 안 되는 공이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찌른다. 평범한 타자라면 치고 싶어서 안달이 날 법한 공인데도, 박현성은 집요하리만큼 파울존으로 날리는 데만 집중했다.

‘겉보기에만 밋밋할 뿐이야. 빠른 체인지업이니 느린 체인지업이니 뭉뚱그려서 말하지만, 공 하나하나마다 미묘하게 구속이 계속 바뀐다. 실제로 이걸 건드린 타자 중에 정타 때린 사람은 거의 없었어.’

따악! 따악!

“파울!” “파울!”

한 끗만 어긋나도 허무한 범타나 헛스윙이 나올지 모르는 외줄타기 커트. 투구수 하나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박현성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직구만 던져 봐. 130이든 110이든, 무슨 일이 있어도 친다.’

박현성이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그리고 16구째.

와인드업한 최태웅의 오른팔이 휘둘러지는 순간, 박현성의 눈이 부릅떠졌다.

‘직구! 빨라!’

끈질기게 기다려온 노림수에,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강수철을 상대로 던진 시속 130km대의 직구.

15개나 되는 슬로우볼을 본 직후라 터무니없이 빠르게 느껴졌지만, 벼르고 벼르던 공인 만큼 어떻게든 타이밍은 맞추었다.

이거 하나로 역전이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따악!

“……!”

공이 방망이에 맞는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정타에서는 절대로 날 수 없는 묵직한 반발력이 손끝을 덮쳐왔기 때문이다.

‘코스가…….’

스트라이크존에서 공 3개 정도 벗어나는 볼.

편집증적일 정도로 스트라이크존만 공략하는 투구 패턴 때문에, 이렇게까지 빠지는 공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배드볼을 타이밍만 바라보고 때렸으니, 똑바로 날아갈 리 없다. 높게 솟구친 플라이 타구가 내야도 빠져나가지 못한 채 유격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쓰리 아웃! 경기 종료!”

“와아아아!”

아웃 콜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함성이 쏟아졌다.

거봐, 패스트볼 노려도 안 되잖아, 라면서 어디선가 이죽거리는 목소리도 들려 왔다.

하지만 박현성의 귀에는 모든 소리가 아득히 멀게만 들렸다. 대신에, 학창 시절부터 따라다니던 낙인이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

-야구 그만하고 싶다고? 애초에 야구 시켜달라고 한 건 너였어! 지금까지 들어간 돈이 얼마인지 알기나 해?!

수많은 선수들이 그렇듯이. 박현성이 신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초등학교 때까지뿐이었다. 연습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닌데, 체격이 따라잡힌 것 하나만으로 후보들에게 주전 자리를 위협받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시합에 출장하지 못한 날. 박탈감에 사로잡혀서 야구를 그만두고 싶다고 칭얼댔더니, 곧바로 아버지의 노성과 따귀가 날아왔다.

-네가 사람 탈을 쓰고도 그럴 수가 있냐? 최태웅이라고 했지! 2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소리 듣던 친구 선수 생명을 말아먹어 놓고서!

-너 때문에 한 사람 인생이 뒤바뀌었는데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어?

-네가 여기서 야구를 그만두면 그 친구는 얼마나 비참할 것 같으냐? 학창 시절에 재미 삼아서 공놀이하던 놈 때문에 야구 인생이 날아간 게 되는데!

지금에 와서는 얼마나 황당한 억지인지 안다. 아버지는 단순히 채찍질할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걸. 최태웅이 아니었어도 어떤 핑계든 갖다붙였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실제로, 아버지가 습관적으로 써먹은 핑계는 최태웅이었다. 짜증스럽게도 그 이름은 자신에게 굉장히 효과적인 압박이기도 했다.

처절한 채찍질 덕분에 고등학교 때에는 뒤처지는 체격에도 불구하고 주전 자리를 지켰다. 대회 때마다 그럭저럭 활약해서 10라운드 턱걸이로 프로 지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프로의 벽이 두꺼웠던 건지, 재능의 한계였던 건지. 아무리 발버둥쳐도 2군에서조차 두각을 드러내기 어려웠다. 그나마 투수 분석하는 요령을 깨달은 덕분에 벤치 멤버로 붙어 있을 수 있는 정도였다.

피 마르고 기약 없는 현실은 죄책감을 무디게 만들었다. 아니, 자기 합리화에 더해서 오히려 최태웅에게 짜증을 전가하게 되기까지 했다.

‘부상 안 당했다고 그놈이 성공했으리라는 법이 있어? 누구는 어려서 신동 소리 안 들어봤냐고. 그놈도 야구 계속했으면 벽에 부딪혀서 시간만 허비했을지 모르잖아. 오히려 내 덕분에 일찌감치 평범한 인생 살게 된 거 아니야? 내가 아니었어도 부상으로 야구 못하게 됐을지 모르고! 일부러 그랬던 것도 아닌데! 피해자는 오히려 나 아니야? 쓸데없이 낙인 찍히는 바람에 이 길이 아니다 싶을 때 야구 그만두지도 못한 내가 피해자잖아!’

그러던 어느 날, 트라이아웃 현장에 그놈이 나타났다. 근 10년 전에 한 번 본 얼굴을 한눈에 알아봤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놀랍고 경악스러웠다. 최태웅도 자신을 알아보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누구 때문에 대역죄인 취급 받으면서 이제까지 지긋지긋한 야구를 계속했는데. 이제 와서 저놈이 다시 야구를 하면, 지금껏 발악해온 내 지난 시간은 뭐가 되는 건가?

짜증이 치밀면서도, 최태웅이 프로에 들어오기를 바랐다. 그리고 프로의 벽에 부딪혀서 ‘어차피 안 되는 놈이었다’ 라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토네이도즈에 입단한 최태웅은 퓨처스리그를 씹어먹었다. 오른팔로 느려터진 공을 던지면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평균자책점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최태웅의 활약을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러면 자신은 뭐가 되나. 오른팔로 전향하고서도 저 정도라면, 자신이 입힌 왼팔 부상만 아니라면 야구계를 씹어먹는 역사적인 천재라도 됐을 것 같지 않은가.

그래서는 안 된다. 배알이 꼴려서 지켜볼 수가 없다. 저놈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릴 적에 신동 소리를 듣다가 프로의 벽 앞에서 고꾸라지는 엑스트라여야만 했다. 왼팔 부상과는 상관없이 어차피 안 될 놈이어야 했다.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봤더니 확실히 몇 가지 약점과 버릇이 눈에 띄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분석을 했으면 진작 1군에 올라갔으리란 생각도 들었지만, 의미 없는 망상이었다. 이건 최태웅 한 사람만을 작정하고 파헤쳤기에 가능한 발견. 정규 시즌에서 만날 수십 명의 투수를 모두 이렇게 해부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침내 최태웅과 붙게 된 어제.

자신의 현미경 분석이 효과를 발휘했다. 어제는 괴상망측한 수법으로 위기를 넘겼으나, 그 한순간에만 통하는 꼼수일 뿐이었다.

다른 팀의 전력분석원도 바보가 아니니, 보고 따라 하는 정도는 될 테지. 그러면 최태웅의 성적도 금세 곤두박질칠 터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

[일반 미션 ‘투구 수 테러 진압’을 달성했습니다.]

[200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일반 미션 ‘세이브’를 달성했습니다.]

[30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일반 미션 ‘한 바퀴’를 달성했습니다.]

[50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현재까지 누적된 포인트는 3945입니다J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는 순간, 새하얀 알림창이 정신없이 시야에 쏟아져 나왔다. 나는 괜히 흥분해서 숨까지 조금 거칠어졌다.

‘이거 진짜 대박인데…….’

설마 이번 경기에만 ‘투구 수 테러 진압’을 두 번이나 찍을 줄은 몰랐다. 이걸로만 400포인트. 박현성이 열받는 놈이지만 이거 하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스카우트들이 앉은 쪽을 힐끗 보았더니, 몇몇이 요란하게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만큼 했으면 약점이 있다는 평가도 어느 정도 사그라졌겠지.

게다가 약점이 있다고 평가해도 이제는 별로 상관없었다. 고작 55포인트 남았는데 뭘. 이쯤은 한 경기만 더 뛰어도 충분히 모을 수 있다.

오늘 경기 덕분에 다음 특성으로 뭘 골라야 약점이 확실하게 극복될지도 알았다. 이번에는 저번 같은 실수가 없도록 2안, 3안도 머릿속에 확실하게 담아두었다.

“…….”

좋은 일 뿐이라 실실거리면서 뒷정리를 하려고 움직이다가 움찔했다. 묘하게 창백한 안색을 한 박현성이 내 앞에 버티고 서 있어서였다.

“……뭐야. 할 말 있어요?”

아까 잠깐 투구 수 테러를 해줘서 감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말이 그렇다는 거고. 친근하게 인사를 나눌 사이도 아닌 지라 저절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조금 뜻밖인 것은 박현성의 얼굴이었다. 저번처럼 이죽거리고 나올 줄 알았는데,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울상을 짓고 있는 것 같다면…… 기분 탓이려나.

“오른팔로도 야구 잘해서 좋겠네. 이럴 거면 애초에 야구 관둘 필요도 없었겠구만.”

“……뭐?”

“니 똥 굵다고, 새꺄. 혼자 다 해 처먹어라.”

“……?”

일방적으로 쏘아붙이고 돌아서는 박현성의 뒷모습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눈만 끔뻑거렸다.

저건 진짜 어디서 튀어나온 또라이 새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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