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55- >
055.
“어, 오셨어요?”
“충식 씨, 왔어?”
친근하게 걸어오는 스카우트들의 인사에 강충식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저들이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지만, 자기 일을 방해한 것도 사실이니 곱게 보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에라이. 하이에나 같은 새끼들. 그러게 진작에 물어왔어야 하는 건데.’
어제 있었던 엘리펀츠와 토네이도즈의 경기.
그도 명색이 스카우트인데, 최태웅이 폼을 도둑맞았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노리던 선수가 약점을 노출한 셈이었지만, 강충식은 쾌재를 불렀다.
투수가 폼을 도둑맞았다면, 당연히 그걸 빌미로 트레이드에서 몸값을 낮출 수 있다. 더군다나 폼을 훔친 상대가 마침 엘리펀츠였던지라, 강충식은 2군 감독으로부터 자세한 전말까지 들을 수 있었다.
“현성이 놈이 개인적으로 파악한 거야.”
“박현성이요?”
“최태웅이가 올라온다니까, 자기가 그놈 버릇 몇 개 안다고 그러더라고. 솔직히 말해서 별건 아니야. 발목이 어쩌고 머리 각도가 어쩌고 하는데, 얘기 들으면서 봐도 잘 모르겠더라고.”
확실히, 이런 경우는 종종 있다. 설명 들으면서 볼 때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데, 혼자 구별해보라면 갑자기 아리송해지는. 직접 발견한 사람만 알아보는 미묘한 버릇.
‘박현성이 그렇게 데이터 분석을 잘했나?’
박현성은 어릴 적에 신동 소리를 들었지만, 프로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평범한 2군 선수였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야구만 해 와서 막연하게 선수 생명을 연장할 뿐인 타입이라, 장래성도 없는 타입이었다.
‘좌우간, 실전에 지장이 생길 만큼 치명적인 버릇은 아니라는 거지.’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엘리펀츠 뿐. 다른 팀은 모두 최태웅에게 약점이 있다고 인식할 테니, 몸값 거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팀장의 조건은 충족한 셈이었다.
그래서 트레이드 요청만 하면 끝난다고 생각했거늘.
그 판단은 연투 능력 있는 이닝이터에 대한 현대 야구의 수요를 너무 얕잡아본 것이었다. 약점 노출을 ‘거품이 꺼졌다’라고 해석한 팀이 또 있었는지, 눈치로 보아 최소한 두 팀은 트레이드 경쟁에 뛰어든 듯했기 때문이다.
‘협상을 내가 하는 것도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같은 조건이면 엘리펀츠로 오지 않겠어? 트라이아웃은 우리랑 봤으면서 토네이도즈로 간 것도 그렇고, 약점 파악한 것도 우리 팀이니까.’
하여튼, 화살은 자신의 손을 떠났다. 억지로 그렇게 생각했더니, 마음이 가벼워지는 부분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토네이도즈의 스타팅 피처는 2선발인 강형석.
경기 초반의 영점을 항상 지적받던 것과 달리, 오늘은 1회부터 제법 안정적인 공을 쏘아내고 있었다.
상대 선발이 오늘따라 긁힌다고 느꼈는지, 엘리펀츠의 대응도 장기적이었다. 당장에 안타 하나를 때리기보다는 투구수를 소비시키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따악!
“오라이, 오라이!”
“계속 돌아!”
균형이 깨진 것은 6회 초였다. 주자를 계속 내보내면서도 꾸역꾸역 버티던 엘리펀츠 선발 한범근이 연속 안타로 살얼음을 깨트린 것이다.
“세이프!”
선취점으로 1대 0.
선발투수인 한범근이야 아쉽겠지만, 일찌감치 장기전을 기약한 걸 생각하면 모난 데도 없는 전개였다. 투구수를 생각하면 토네이도즈 선발도 슬슬 내려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엘리펀츠 벤치는 선취점을 빼앗겼더라도 그럭저럭 시나리오는 유지 중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도 7회 말 마운드에 투수가 올라오기 전까지였다.
“어? 뭐야?”
“최태웅이 나와?”
엘리펀츠 벤치는 물론이고, 멀찌감치서 지켜보던 전력분석원이나 스카우트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래 전도 아니고 바로 어제. 롱 릴리프로서 일찌감치 등판해놓고도, 폼을 도둑맞은 탓에 1이닝만 겨우 소화하고 내려간 상대였다.
이기든 지든 넉넉한 점수 차이에 올려서 상태를 체크하는 거라면 모를까. 1점짜리 살얼음판 리드에 올라온다는 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벌써 쿠세 찾아서 고친 건 아니겠지?”
“설마……. 나는 머리랑 왼발 각도가 쿠세라고 듣고서 봐도 알아보기 긴가민가할 정도였는데…….”
“하루아침에 찾아질 것 같으면 진작에 고쳤지.”
“혹시 쿠세 도둑맞은 거 자체를 눈치 못 했다거나? 쿠세 도둑맞은 것만 아니면 지금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타이밍이기는 하잖아.”
“그럴 리가. 눈치 못 했으면 애초에 왜 1이닝만 던지고 내려갔겠어? 저쪽 불펜 하루 이틀 혹사한 게 아니던데.”
“발에 공 맞았잖아. 계속 던지길래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는데, 몇 개 던지고 보니까 아팠던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네…….”
엘리펀츠 선수들은 투구연습하는 최태웅을 보면서 수군거렸지만, 이렇다 할 긴장감은 없었다.
하루아침에 투구 버릇을 찾아서 고치지는 못 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첫째. 설사 버릇을 찾아 고쳤다고 해도, 상황이 특별히 악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둘째였다.
토네이도즈와의 3연전 자체는 올 시즌 두 번째지만, 최태웅이 등판한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귀신 들린 듯한 투구를 한다는 것은 들었지만, 어제 던진 비실비실한 5구만 봐서는 솔직히 일부러 두려움을 갖는 것도 어려웠다.
“선수 교체!”
연습투구를 마치자, 벤치에 있던 박현성이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며 타석에 들어왔다.
낯두껍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노골적인 대응에 최태웅은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던 불안감 한 가지가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신의 폼을 그렇게 악착같이 뜯어 분석한 사람은 엘리펀츠의 전력분석팀이 아니라 박현성 개인이 분명했다.
“볼!” “볼!” “볼!” “볼!”
“베이스 온 볼스!”
4구째를 받는 순간, 포수인 정휘경의 표정이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고의사구라고 할 만한 공은 아니었지만, 딱히 제구가 흔들린 것도 아니었다.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노리는 공이 아슬아슬하게 빠져서 4연속 볼이 되었을 뿐이다.
‘오늘 심판 존이 넓은 편이기는 했어도……. 너무 넓게 보고 던지는 거 아닌가?’
걱정스러워져서 마운드를 보았더니, 최태웅이 괜찮다는 듯이 가슴을 팡팡 쳤다. 지금껏 남겨온 실적이 있는지라, 정휘경은 딱히 마운드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문제는 도루인데. 뛰겠지? 거의 100퍼센트?’
어제 박현성이 최태웅의 폼을 훔치는 타이밍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2루까지는 거의 자동문. 최태웅의 구속을 생각하면 피치아웃으로도 3루 도루를 막아낼 자신감이 없을 정도였다.
‘견제폼이 도둑맞았으면 소용없겠지만, 그래도 견제 한두 개쯤은 해둬야지.’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 하에, 정휘경은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여기서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볼 배합을 같이 하자는 것도 아니고 견제구 한두 개 던져보라는 사인일 뿐인데. 최태웅이 고개를 가로저었던 것이다.
‘어제 경기 끝나고 계속 비디오실에 있더니……. 진짜로 하룻밤 사이에 쿠세 찾아서 고친 거야?’
설마 폼을 도둑맞은 다음 날에 바로 등판할 줄은 몰랐던지라, 이야기를 나눠둔 게 없어서 답답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최태웅은 바보가 아니다. 나름대로 생각하는 게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면에 미트를 댔다.
퍼억!
“볼!”
타자의 바깥쪽. 포수가 벌떡 일어나서 받으면 자연스럽게 피치아웃이 되는 높은 코스에 포심패스트볼.
정휘경이 반사적으로 송구하는 시늉을 했다가 멈칫했다. 뻔히 정면으로 던진 공에, 리드 폭을 크게 벌리고 있던 박현성이 슬라이딩까지 해가며 1루로 귀루했던 것이다.
’독한 새끼. 하룻밤 사이에 그걸 또 찾아내?’
유니폼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내면서 박현성이 짜증스럽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선수의 버릇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반복 숙달 과정에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따라붙은 폼 자체의 특징과, 단순히 플레이 외적인 습관.
후자는 강속구를 던지기 전에 모자를 벗었다 쓴다거나, 코를 문지른다거나 하는 등의 버릇이다. 자각하기만 한다면 바로 고칠 수 있고, 거꾸로 상대를 속일 수마저 있다.
‘그래 봤자 도루 조금 억제하는 거지. 내가 찾은 게 이게 다가 아니거든?’
***
타석에서 볼 하나를 얻어낸 강수철은 박현성의 조언을 떠올리면서 신중하게 자세를 잡았다.
-최태웅이 잡아낸 아웃 카운트를 보면 대부분 타이밍 흐트러뜨려서 엇박자 낸 겁니다.
-단순히 3단 구속이 다가 아닙니다. 투구 분석표를 보면 자기 꼴리는 대로 던지는 게 아니라, 거의 철저하게 타자의 약점 코스만 찌르고 있어요.
최근 2년 정도, 박현성이 데이터 분석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걸 감안해도 최태웅에 대한 분석은 집요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체인지업하고 패스트볼 폼이 어중간하게 구분이 잘 돼서 오히려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타자들이 체인지업 날아오면 체인지업을 치려고 하고, 패스트볼 날아오면 패스트볼을 치려는 경향이 있어요.
-이 정도로 약점만 집요하게 찌르면 패스트볼만 던져도 치기 힘듭니다. 다들 3단 구속 때문에 허를 찔려서 그런데, 구속에 완급을 줘서 치기 어려운 게 아니에요. 약점 코스만 집요하게 찔러와서 치기 어려운 거죠.
-중속 체인지업하고 저속 체인지업은 폼 구별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기왕 노릴 거라면 확실하게 패스트볼만 노려야 됩니다.
패스트볼 구속이 110km 중후반쯤 된다고 했던가.
익숙하지 않은 스피드라서 오히려 정타를 때리기 어려운 구석도 있지만…….
따악! 따악! 퍼억!
“파울!” “파울!” “볼!”
-대부분 스트라이크인데다가 느린 공이라서. 타자들이 투구수를 늘리려는 생각 자체를 안 해요. 치기 어려운 공이라는 걸 인정하고, 그나마 폼 단계에서 읽을 수 있는 패스트볼 하나로 노림수를 좁혀야 해요.
처음부터 120km 이하의 공을 머릿속에 그려놓는다면 대응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나머지 공은 안타로 만들려니까 자꾸만 타이밍이 엇갈리는 거지, 파울존으로 날릴 것만 생각하면 정말 무한정 버틸 수도 있었다.
따악! 따악! 따악!
“파울!” “파울!” “파울!”
풀 카운트 이후에만 9번째 파울 타구.
있는 대로 정신을 집중하는 와중에도 강수철은 확실히 똥볼 투수가 아닌 건 맞다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기록적인 투구 수가 나왔는데도 직구는 하나도 안 온다. 이쪽의 노림수를 읽고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수를 읽으면 읽은 대로, 풀 카운트이기 때문에 똥볼 같은 체인지업을 스트라이크존에 넣어야 한다. 느린 공을 유인구가 아니라 카운트 잡는 용도로 던지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정신력과 배짱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가끔 커트로 버티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럴 때 이 새끼가 써먹는 꼼수가 있는데요…….
최태웅이 팔을 휘두르는 순간.
하얀 공이 시야에서 휙 사라졌다.
강수철은 순간적으로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으나─.
콰아앙!
“파울!”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약 올리는가 싶을 정도로 흐물흐물하게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포물선에 반사적으로 방망이가 튀어 나갔다.
-이퓨스 알죠? 연예인 시구하는 것처럼 머리 위로 붕 던져서 30~40km 정도로 톡 떨어지는 거. 이 새끼는 꼼수가 뼛속까지 틀어박혀 있어서, 투구수가 늘어나면 허를 찌른답시고 한 번씩 이런 것도 던져요. 머릿속에 담아둬야 해요.
박현성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음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뻔했다.
이래봬도 130~150km 짜리 공이 난무하는 프로야구계에서 보낸 세월이 몇 년인데. 4미터는 족히 될 법한 포물선을 그리면서 떨어지는 30~40km 짜리 공은 맹점이라는 말 정도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큰일 날 뻔했네.’
강수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도대체 왜 저런 투수가 0점대 평균자책점을 지키고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지만…… 지금의 승부가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제구력 귀신이라고 불리는 투수도 타자 몸에 스치는 위협구를 던질 때에는 심리적인 부담 때문에 흐트러지는 것처럼. 100km도 안 되는 스트라이크를 ‘어려운 공’이라고 인정하고 커트만 하는 것도 상당한 정신력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이제 꼼수도 바닥났을 것 같은데. 어떡할래?’
설마 이퓨스까지 걷어낼 줄은 몰랐는지, 투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같은 이퓨스는 한 타자에게 두 번 쓸 수 있는 공이 아니었으므로 낭패감이 들 법도 했다.
깊게 심호흡한 끝에, 최태웅이 다시 투수판을 밟았다.
‘패스트볼!’
채찍처럼 날카롭게 휘둘러지는 스윙에 강수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안 그래도 패스트볼과 슬로우볼의 폼이 차이가 나는데, 슬로우볼을 15개나 보고 난 직후다. 강수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태껏 벼르던 타이밍에 방망이를──
퍼억!
“스트라이크!”
“……!”
방망이가 요란한 파공성을 냈다.
격렬한 스윙 탓에 발레 선수처럼 제자리에서 빙 돌아버린 강순철이 어이없다는 듯 눈만 끔뻑거렸다.
“뭐야 이거?”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이 전광판 쪽으로 향했다.
“132km? 120km도 안 나오는 거 아니었어?”
최태웅은 1루에서 얼떨떨하게 서 있는 박현성을 보고서 피식 웃었다.
‘명청한 놈. 너한테 직접 써먹기까지 했던 수법인데, 그걸 내가 결정구로 생각하고 있겠냐.’
130km가 넘는 공은 제구가 안 되지만, 어떻게든 스트라이크존에 욱여넣을 정도는 된다. 상대는 100km도 안 되는 슬로우볼을 15개나 지켜본 상태. 그 정도로 슬로우볼에 눈이 익어버리 면, 130km 짜리 공도 140km 중후반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이것은 웬만한 마음의 준비로 커버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다. 실제로 저만한 완급 차이에 대응할 만한 피지컬이 있어야만 해결되는 문제다.
어깨를 으쓱하는 최태웅의 눈앞에 홀로그램 알림창이 나타났다.
[일반 미션 ‘투구 수 테러 진압’을 달성했습니다.]
[200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