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54- >
054.
12개 구단을 통틀어도 1년에 한두 번 나올까 말까 한 트리플 플레이 진기록. 승계 주자를 포함한 무사 만루 상황의 무실점 극복. 고의사구를 제외하면 투구수 5개로 날름 빼먹은 쓰리 아웃. 대대적인 선수 교체 때문에 미묘하게 헝클어진 상대팀의 수비.
얼핏 보기에는 경사가 쏟아진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그 경사의 주인공이면서도 벤치로 돌아올 때까지 떫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읽힌 거지?”
“……예.”
감독님의 말투가 마치 ‘일단 물어보기는 해준다.’라는 듯 했기에 둘러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적어도 견제할 때의 폼이 도둑맞은 것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마침 어깨 풀어둔 애들도 더 있으니까.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복기는 경기 끝나고 해보고.”
“알겠습니다.”
나로서는 당연히 불만이 남았지만, 감독님이 딱히 의견을 물어본 것도 아닌데 반박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요새 야구판에서 수직적인 관계가 줄어들었다지만, 감독님이 지시하면 신인은 그냥 따라야 했다.
박기석을 상대할 때는 꽁꽁 얼어붙어 있던 우리 타선의 방망이도 점차 예열되기 시작했다.
이닝이 시작하자마자 큼지막한 2연타. 점수를 내지는 못했지만, 커트 공세까지 더해서 갓 올라온 불펜 투수가 숨이 턱까지 차게 만들었다.
그리고 8회 말.
‘선수 교체?’
2아웃에 박현성의 타석이 되자, 또다시 대타가 나왔다.
저쪽 사정을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익수 수비가 무난했던 만큼 의외의 교체였다. 이러면 진짜로 나를 상대할 목적으로만 타석에 한 번 세운 것 같잖아.
“수고하셨습니다!”
그날 경기는 9회 초에 막혔던 둑이 터진 것처럼 대거 3득점 하면서 토네이도즈의 승리로 돌아갔다. 무안타인 타자 몇몇을 제외하고는 다들 기분 좋게 흥얼거리면서 퇴근했다.
한편, 나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투수코치와 함께 비디오실에 틀어박혔다.
아예 사이드암으로 폼을 갈아엎어서 위기는 모면했지만, 몇 번이나 써먹을 수법이 아니었다. 어떤 버릇을 들킨 건지 파악해서 하루빨리 개선해야만 했다.
“진짜로 도둑맞은 게 맞기는 해? 솔직히 견제하는 폼이 엉성해서 티가 나기는 하지만……. 던지기도 전에 견제인지 투구인지 알아볼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보셨잖아요. 폼을 도둑맞은 게 아니면, 버릇 같은 걸 들킨 거겠죠. 미리 알고 뛴 게 아니라면 도루 스타트가 저 타이밍에 되는 건 말이 안돼요.”
세상에는 나 말고도 에이스급 주전이면서 견제를 못 하는 투수도 많다. 심하게는 은퇴할 때까지 견제사를 한 번도 못 잡아본 경우마저 있을 정도다.
물론, 그런 투수들은 나와 사정이 다르지. 적당한 구속이 나온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도루 억제가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나처럼 공 느린 투수가 폼까지 빼앗긴다면, 스코어링 포지션까지 자동 헌납하는 꼴이 된다.
더군다나 ‘투구 폼’과 관련된 문제는 ‘특성’으로도 커버가 안 된다. 내 초능력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야구 게임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투수의 폼이 구종에 따라서 바뀌는 게임 따위는 세상에 없다. 게임 캐릭터인 투수는 언제나 모든 구종을 동일한 투구 폼으로 뿌린다. 그러니까 당연히 투구 폼을 바로잡아주는 스킬 따위도 존재할 리 없었다.
초능력으로 위력을 높인다면 억제할 수 있겠지만, 투구 폼이 읽힌다면 두고두고 페널티가 된다. 이것만큼은 오롯이 내 노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다.
“설마 이건가?”
“어디 어디? 뭔데?”
비디오실에 틀어박힌 지 4시간 정도. 눈알이 빠지도록 영상을 돌려보던 내 손이 멈칫했다.
그런데 제대로 본 거 맞나? 나는 긴가민가하면서 천천히 비디오 기기를 조작했다.
“지금 이거는 견제구 던질 때고, 이쪽이 타자한테 던질 때거든요? 견제할 때는 왼발 각도가 살짝 치우쳤죠.”
“치우쳤다면 치우치기는 했는데……. 이거 가지고 폼을 읽혔다고 하기는 조금 힘들어. 견제 폼 분석할 때 제일 먼저 보는 부분이 발 각도인데. 그렇게 눈에 띌 정도면 우리도 진작에 발견했겠지. 그리고 지금 영상 말고 이거……. 여기서는 오히려 정면으로 치우쳤잖아.”
“그러면 이건 어때요? 고개 까딱거리는 각도. 견제구 던질 때는 오히려 머리 각도가 정면 쪽이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견제하는 거 안 들키려고 반쯤 무의식적으로 그랬던 것 같은데요.”
“그것도 조금 애매한데……. 한두 번 까딱거리는 것도 아니고…….”
“제 말은 이거 두 개를 같이 보시라는 거예요. 따로따로 보면 반반이라서 애매한데, 왼발이 치우치면서 머리 각도도 정면일 때는 100퍼센트 견제예요. 여기 데이터만 봐서는.”
“…….”
이렇게까지 설명을 듣고도 투수코치님은 뭔가 애매하다는 얼굴이었다. 하기야, 여기 모인 영상만 따지고 보면 100퍼센트인데 워낙에 샘플이 적으니까. 진짜로 엘리펀츠가 이걸 보고 도루했는지 어떤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진짜로 이게 버릇이면 고치기는 쉽겠지만……. 솔직히 좀 소름 돋는데? 도대체 어떤 새끼가 롱릴리프 폼을 이렇게까지 현미경 분석해? 솔직히 이렇게 듣고도 막상 실전에서 보면 긴가민가할 것 같은데.”
“그러게요…….”
전력분석원이건 선수 개인이건, 상대 팀에 대해서 분석한다면 당연히 선발투수가 최우선이다. 등판 순서를 예측할 수 있고 가장 마운드에 오래 서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불펜 A조나 마무리. 아무리 규정이닝까지 채운 평균자책점 1위라고 해도, 점수 차이가 클 때나 나오는 롱릴리프는 우선순위가 크게 밀린다.
그렇다고 물론 나에 대해서 분석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겠지만, 무슨 일이든 정도의 문제지.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라도 모든 선수를 이렇게 머리카락 개수까지 헤아리듯 훑어내지는 못한다.
“너, 누구랑 원한진 거 아니냐? 진짜로 이거 보고 알았다면 엄청 운이 좋은 거거나, 너 하나 타겟팅하고 작정하고 파헤친 건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투구 폼까지는 살펴볼 엄두도 안 났던지라 일단 나중으로 미루었다. 애초에 어떤 버릇이 읽혔는지 같은 건 보통 하루아침에 발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음 날. 경기 전에 가볍게 연습하고 있는데 감독님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봤다가 나는 뜻밖의 사람과 맞닥뜨렸다.
“아, 안녕하세요, 구단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그래요 최 선수. 요새 엄청나던데요? 홈페이지 기록실에 들어가 보면 투수 부문에 최 선수 얼굴이 제일 먼저 보여요. 평균자책점 1위라고. 최 선수 같은 사람한테 발판이 됐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다 뿌듯해요, 내가.”
산적처럼 수염이 덥수룩한 구단주를 이렇게 보는 것은 딱 세 번째였다. 스프링 캠프 직전에 했던 단체 회식하고 입단 기념식 행사 때. 입단식에서는 형식적인 덕담과 악수만 나눴고, 회식 때에도 멀찌감치서 얼굴만 조금 스쳐본 게 전부였다.
잡다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좀이 쑤셔서 꼼지락거렸다. 감독님이라면 또 몰라, 구단주가 나를 보고 싶어 할 만한 이유가 뭔지 짐작도 안 갔기 때문이다.
“아, 실은 말이에요. 어제 저녁에 최 선수한테 이적 요청이 들어왔거든요. 그래서 최 선수 생각은 어떤가 좀 물어나 보려고 이렇게 와봤어요.”
“……이적이라고요?”
마음의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훅 들어온 스트레이트.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눈만 끔뻑거렸다. 밥은 먹었어요? 라는 듯이 자연스러운 말투 때문인지 내가 뭘 잘못 알아들었나 싶기까지 했다.
“이적이라면…… 다른 팀하고 트레이드하는 그거요? 다른 팀에서 저를 달라고 했다고요?”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우리 팀에서 지금 최 선수가 제일 잘 던지고 있는데, 오히려 당연한 거잖아요.”
“트레이드 같은 건 보통 프런트끼리 합의해서 정하는 거 아닙니까? 왜 저한테 직접…….”
“그거야 다른 팀은 트레이드가 전력구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그런 거죠. 우리야 거의 무조건 현금 트레이드고, 1군으로 이적 보내면 경기에서 붙을 일도 없는데 싫다는 팀에 억지로 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독립 구단이 다들 그런 건 아니고, 내 개인적인 방침이에요.”
“1군에 갈 수 있는데, 마음에 안 드는 팀이라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보통은 없죠. 그리고 최 선수 경우는 좋으냐 싫으냐를 물어보려는 게 아니라, 오퍼가 세 팀에서 들어와서 그래요. 엘리펀츠, 샤크즈, 재규어즈. 어차피 조건은 다 비슷비슷하니까, 기왕이면 최 선수 요망을 반영할 생각입니다.”
“세 팀에서 저를…….”
뭐냐, 이건. 투구 폼 하나 읽혔다고 어제 휘둘린 것 때문에 기분이 꿀꿀하던 차에 이런 소식이라니. 너무 극단적인 반전인 탓에 오히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엘리펀츠는 내가 처음으로 본 트라이아웃에서 나를 눈여겨보고 합격시켰던 팀. 굳이 말하자면 내가 뒤통수를 치고 토네이도즈로 왔다고도 할 수 있는지라, 내심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샤크즈는 진효 형이 있는 팀. 내가 낯가림 때문에 실력 발휘를 못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마음 붙일 사람이 있으면 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재규어즈는 특별히 의식해본 적 없는 팀이지만, 그건 프로 선수 대부분이 그렇지. 선발 방어율이 12개 구단 중에서 꼴찌라는 걸 생각하면 어떤 의도로 나를 트레이드 하려고 하는지 대강 짐작도 되었다. 내 이닝 소화능력으로 그나마 자기 몫 하고 있는 불펜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고 싶은 거겠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많은 등판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팀이다.
저마다 일장일단이 있는지라 고민하고 있는데, 감독님이 불쑥 말했다.
“등판 기회는 여기하고 별 차이 없을 거다. 그러니까 비슷한 조건이라면 엘리펀츠를 추천하고 싶은데…….”
“엘리펀츠요? 거긴 왜요?”
“왜기는. 셋 다 남부 리그니까 그렇지. 시합 일정 보면 다음 주랑 다다음 주에 샤크즈랑 재규어즈가 엘리펀츠랑 붙을 건데……. 자네 버릇 털렸잖아? 당연히 그 분석 자료가 1군에도 올라갈 거 아닌가.”
“……!”
FA 때 일부러 천적이 있는 리그를 피하는 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이런 식으로 비슷한 이야기가 나한테 적용되고 보니 기분이 떨떠름해졌다. 쫄려서 도망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왜 이 타이밍에?’
구단주님 말대로. 지금 내가 찍고 있는 성적이라면 언제 트레이드 요청이 와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이지? 처음으로 약점이라고 할 만한 걸 노출한 어제 경기 이후에 세 팀이나 한꺼번에?
어제 경기에 스카우트가 한두 명 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오퍼 넣을 마음이 뚝 떨어졌다고 해도 될 만한 상황 아닌가?
“……저, 죄송하지만 그거 급한 겁니까?”
“음? 급하냐니?”
“지금 당장 답변드려야 하는 건지…….”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트레이드야 뭐 전화 한 통화에 뚝딱 끝나기도 하고, 일주일씩 질질 끌기도 하고, 보통은 그러니까.”
“그러면 일단 오늘내일 엘리펀츠 전까지는 끝난 다음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
내가 뜬금없이 던진 말에 두 사람이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나는 괜히 부아가 치밀어서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말했다.
“약점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어디 제값 받겠어요? 헐값에 팔려가서 똥 치우고 괄시나 받죠. 아마도 지금 타이밍이면 후려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꺼번에 오퍼 넣은 모양인데, 두 경기면 잘못 짚었다는 거 보여줄 수 있습니다.”
약점 조금 털렸다고 2군에서도 헐떡거릴 정도라면 1군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기왕이면 완전무장을 하고 가야지.
짧으면 한 경기. 길어봐야 세 경기.
그거면 새롭게 무장하기에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