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53- >
053.
“내 참. 어이가 없네. 지가 무슨 사이어인이야? 한 번 깨지고 오니까 강해져 있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 어안이 벙벙했다.
상대와 초면이라면 단순하게 엄청난 강타자라고 생각하고 말기나 하겠지만, 이게 뭐야. 자고 일어났더니 타격 센스에 눈떴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그거도 정도가 있지.
내가 지금 느끼는 당혹감을 누구와 나눌 수 없다는 점도 답답했다. 공도 하나 안 던진 상황에서 ‘상대가 두 배로 강해졌다’ 라는 소리를 해봤자 미친놈 소리나 들을 테니까.
“동점에 무사 1루……. 거르기는 좀 그렇고.”
여러모로 얼떨떨했지만, 사실 눈앞이 깜깜하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스트라이크존 전체가 ‘위험 코스’인 사람하고도 셀 수 없이 붙어봤는데 뭘. 무엇보다 쿨존이 조금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돌다리도 일단은 두드려보고 건너야지.
초구는 볼.
타자를 흔들기에 딱 좋은, 몸에 바짝 붙는 높은 직구.
타다닷!
“……!”
릴리스하는 순간, 등 쪽에서 달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움찔하면서 일어나는 휘경 선배의 모습을 보고 나는 ‘아차!’ 했다.
부웅!
박현성으로부터 엉거주춤한 헛스윙을 끌어냈지마는…….
이 몸쪽 코스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타석에 서 있는 박현성의 몸이 자연스럽게 2루 송구를 방해했던 것이다.
“세이프!”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슬라이딩하기야 했지만, 선 채로 들어가도 됐을 정도로 여유로운 타이밍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욕지기가 났다.
“미친……. 방심했어…….”
이건 평범하게 도루를 돕기 위한 헛스윙이 아니다. 일부러 헛스윙할 마음이었다면 스트라이크존이 온통 쿨존으로 변하기 때문에 알아볼 수가 있다.
아마도 벤치에서 ‘런 앤 히트’ 작전이 나온 거겠지.
그러니까 주자는 도루에 가깝게 뛰었고, 박현성도 진심으로 공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칠 수 있는 코스가 아니라서 헛스윙이 됐고, 평범하게 단독 도루를 지원한 듯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씨발. 내가 왜 그랬지?”
허를 찔렸다면 찔린 것이기는 한데. 상대의 작전이 절묘했다기보다는 내가 너무 멍청했다. 접시물에 코라도 박고 싶을 정도였다.
일부러 발 빠른 주자로 교체까지 한 상황. 뛸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정도가 아니라, ‘안 뛸 거면 도대체 왜 교체했겠어?’라고까지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아무리 박현성의 스트라이크존에 정신이 팔렸다지만. 가뜩이나 120km도 안 나오는 공을 타자 몸쪽에 바짝 붙여서 던져주다니. 이건 자발적으로 2루까지 레드 카펫을 깔아준 거나 다름없는 짓거리였다.
“미안. 방금 건 내 실수야. 견제 사인 한 번쯤 냈어야 하는데 신경을 미처 못 썼네.”
“아뇨. 이게 왜 선배 탓입니까? 방금 같은 공으로 주자 잡을 수 있는 포수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내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는지, 휘경 선배가 곧바로 마운드로 올라왔다. 나름대로 철면피를 자랑하는 편이지만, 지금 저런 소리를 들으니까 양심이 쿡쿡 찔렸다.
“무사 2루에 설마 3루까지 뛰지는 않을 테니까, 일단은 평범하게 타자한테 집중하자. 견제 두어 번만 하고. 혹시라도 뛰면 그건 내가 어떻게든 잡아낼 테니까.”
“저, 선배. 그보다는…….”
“응? 왜?”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타자한테 집중할게요.”
거슬리는 게 있다면 적당히 빙 돌아가는 것이 내 스타일인지라. 마침 1루도 비었는데 박현성을 거르면 어떨까, 그렇게 제안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부터는 하위 타선으로 내려가는 타이밍. 병살 유도 차원에서 1루를 채우는 것도 엉뚱한 작전은 아니다.
하지만 데이터 상으로만 보면 박현성은 2군에서도 주전 자리를 꿰어차지 못한 쩌리였다.
박기석이 내려간 지금도 대다수 스카우트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들 앞에서 박현성 따위를 상대로 고의사구 하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 떠나서, 솔직히 짜증나잖아. 진효 형과 달리 저놈은 고의사구를 당하면 ‘풉. 내가 무섭냐?’라고 정신승리 할 듯한 기분이 들거든. 그 꼴은 내가 못 보겠다.
퍼억!
“세이프!”
퍼억!
“세이프!”
휘경 성배는 3루 도루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3루 도루할 생각이 없었어도, 막상 내 느린 공을 보면 용기가 날지 모르는 일이다.
혹시 나올지 모르는 작전도 억제할 겸, 타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질 것도 기대해볼 겸, 다섯 번이나 2루 견제를 한 뒤에 공을 꽉 움켜쥐었다.
그나마 보이는 약점 코스.
무릎 위를 살짝 지나가는 몸쪽 패스트볼.
따악!
“……!”
총알 같은 타구가 마운드로 쏘아져 왔다.
나를 위협할 만한 강습 타구는 아니었다. 내버려 둔다면 내 다리 옆을 스쳐서 중견수 앞까지 굴러갈 만한 공!
퍼억!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투구 자세가 덜 끝난 상태에서 억지로 타구에 발을 뻗었던 것이다.
“큭……!”
타구가 내 발을 맞고 굴절되자, 2루수가 급하게 반응하다가 다리가 꼬여서 철퍼덕 넘어졌다.
두 주자가 질주하는 사이에, 1루수가 베이스를 버리고 나와서 공을 낚아챘다.
어차피 베이스를 커버해야 하는 나도 자빠져서 1루가 빈 상황. 그럴 바에는 2루 주자의 추가 진루라도 억제하겠다는 판단 같았다.
“세이프!”
“세이프!”
노 아웃에 1, 3루.
주자가 모두 살았지만, 애초에 안타성 타구였던 걸 생각하면 무난한 결과였다. 내가 발을 대지 않았거나 1루수의 대응이 느렸다면 주자가 아예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야야야! 최태웅! 발 괜찮아?”
“이 새꺄! 투수가 위험하게 뭐하는 거야?”
투수인 내가 타구에 맞은 지라, 잠시 경기가 중단되었다. 발바닥으로 건드린 거라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나도 머릿속이 조금 복잡한지라 파스를 뿌린다느니 연습투구를 해본다느니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어째 뭔가 찜찜한데…….’
물론, 내야안타 하나 맞았다고 흔들리지는 않는다. 쿨존에 던진 공이 안타가 된 경우가 처음도 아니고, 진환 선배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3루 주자가 홈에 들어가도 내 자책점 아닌데 뭘. 안타를 친 상대가 상대인지라 기분이 더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엘리펀츠가 원래 이렇게 타격이 좋았나?”
잡생각을 그럭저럭 떨쳐냈다고 생각했는데, 뒤이어 들어온 타자를 보고서 나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이번 타자의 스트라이크존도 온통 불그죽죽한 빛깔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금 상대한 박현성이나, 군대 시절에 상대한 진효 형만큼은 아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래. 3할 7푼 1리로 퓨처스 리그 타율 1위 먹고 있는 재규어즈 이태일의 스트라이크존이 딱 저런 느낌이었지.
‘내 기억으로는 분명히 2할 후반대 정도였는데……. 이거 무슨 상성 문제인가?’
찜찜해, 찜찜해, 찜찜해. 어떤 식으로 찜찜하느냐 하면, 화장실이 정전으로 컴컴해져서 똥이 제대로 닦였는지 휴지를 확인할 수가 없는 듯한 찜찜함이다.
그렇지만 약점 코스가 뻔히 보이는 것도 사실이라, 멀뚱멀뚱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하고서 다리를…….
타다닥!
“뛴다!”
“……!”
공을 던지는 순간이 아니다.
투수판을 밟은 뒤에, 다리를 들어 올린 뒤도 아니다.
마치 내가 정면으로 던지리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1루 주자인 박현성이 질주했다.
‘미친……!’
리드 폭이 좁아서 견제구를 안 던졌을 뿐. 아까와는 달리 3루 주자와 1루 주자를 모두 신경 쓰고 있었던지라 더욱 당혹스러웠다.
놀라서 급하게 궤도를 비튼 것이, 운 좋게도 기막힌 피치 아웃 코스로 날아갔다. 휘경 선배가 번개 같은 동작으로 받아서 송구하려고 했으나─ 팔을 휘두르기 직전에 움찔했다.
“세이프!”
“……!”
선 채로 유유히 2루에 들어간 박현성을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서 눈만 끔뻑거렸다.
휘경 선배가 2루 송구를 못한 것은 딱히 실수랄 것도 없었다. 틀림없이 놓치는 타이밍이기도 했지만, 3루 주자도 도발하듯이 홈으로 돌진할 낌새를 보였기 때문이다.
“저 새끼…….”
나는 그제야 아까부터 느껴지던 끈적끈적한 불쾌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뜀박질은 도루 타이밍을 잘 잡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뭔가 모션을 취하기도 전에 이미 스타트를 끊은 거였으니까.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미리 알고 있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버릇을 읽혔어.’
패스트볼조차 시속 120km 이하. 주자 견제능력은 기껏해야 중급 정도. 이런 투수가 폼까지 도둑맞았다면, 포수 실력과 상관없이 2루는 자동문이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라면 주자를 견제할 때만이 아니라 투구할 때의 폼도 읽혔다. 짧은 시간 동안에 박현성의 타격 능력이 올라갔다기보다는, 나 하나를 현미경처럼 분석했다는 쪽이 설득력 있었다.
‘투구 폼은 그렇다고 쳐도……. 프로 올라와서 나 주자 견제한 적이 거의 없는데. 도대체 견제 폼은 어떻게 파악한 거야?’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점도 있었다. 저놈이 간파한 내 버릇이 뭔지는 모르겠어도, 한두 마디 설명으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눈에 띄는 건 아닌 듯하다는 것이다.
눈에 확 띄는 버릇이라면 지금 타자도 스트라이크존이 훨씬 견고해졌겠지. 이건 기껏해야 구질이 뭔지 짐작할 만한 힌트를 알고 있다, 그 정도의 느낌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내 버릇을 간파한 것은 엘리펀츠의 전력분석원이 아니라, 박현성 개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뒤질라고, 진짜. 가해자인 주제에 왜 엄한 사람한테 억하심정 품고 스토커질을 하고 자빠졌어?
“……?!”
한동안 씨근거리던 내가 사인을 내자, 휘경 선배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차하면 마운드로 다시 한 번 올라오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고의사구?
스카우트가 보고 있으면 뭐. 어차피 평가 깎을 사람이 있다면 방금 보여준 플레이에서 깎았을 거다. 하지만 세상에 실제로 숫자로 만들어낸 성적보다 객관적인 지표는 없다. 굳이 그 사람들 눈에 들려고 안달 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볼!”
“볼!”
“볼!”
“볼!”
“베이스 온 볼스!”
무사 만루.
내 짐작대로, 이어서 들어온 타자의 스트라이크존도 무난한 편이었다. 원정 오기 전에 체크한 타율을 토대로 생각하면 살짝 힌트를 가지고 있는 정도.
퍼억!
“스트라이크!”
배짱 좋게 와인드업까지 해가면서 뿌린 초구에 타자가 움찔했다. 아무런 반응도 못 한 것은 설마한복판에 느린 직구가 날아을 줄 몰라서 얼어붙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폼이…….”
“사이드 암?”
“뭐야, 저 새끼?”
여기저기서 어이없다는 듯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마운드까지 들려 왔다.
왜들 이래, 아마추어처럼. 인터넷도 안 보냐? 메이저리거 김승현도 경기 중에 갑자기 다른 투수 폼으로 던진 적 있고. 임청범도 한 이닝에 언더핸드로 던졌다가 사이드로 던졌다가 한 적 있는 거 모르나.
나한테 무슨 버릇이 있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어쩌겠어. 폼 자체를 갈아버리는 수밖에. 여러 번 써먹을 방법은 아니지만서도.
퍼억!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리자, 타자의 얼굴에 명백한 당혹감이 어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이 들어온 것보다도 허둥대고 있었다. 그야, 나름대로 내 버릇을 알고서 신나 있었는데 갑자기 무용지물이 된 셈이니까. 당황할 법도 하지.
따악!
“나이스! 노 바운드!”
“3루로!”
3구째. 흐리멍덩한 스윙에 얻어걸린 타구가 내 글러브 안으로 쏙 빨려들어 왔다.
노 바운드였지만, 애매한 타구라서 주자들이 일제히 스타트를 끊은 상황.
홈으로 돌진하려던 3루 주자는 엉거주춤하게 포스아웃 당하고, 3루수가 숨 돌릴 틈도 없이 2루에까지 공을 뿌렸다.
“아웃!”
“……!”
2루 주자가 허겁지겁 귀루했으나, 종이 한 장 차이로 유격수 글러브에 공이 빨려 들어간다.
주먹을 불끈 뻗는 2루심의 제스쳐에, 그라운드는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한순간.
얼마 안 되는 관중들이 천둥 같은 함성을 내지르고, 내 시야가 연속으로 떠오른 알림창에 가로 막혔다.
[일반 미션 ‘위기 탈출’을 달성했습니다.]
[위기 탈출 : 무사만루 상황을 무실점으로 극복한다.]
[70포인트의 보상이 지급됩니다.]
[스페셜 미션 ‘삼중살’을 달성했습니다.]
[삼중살 : 한 번의 플레이에 3아웃을 잡아낸다.]
[300포인트의 보상이 지급됩니다.]
[현재까지 누적된 포인트는 3465입니다.]
내 피지컬이 떨어지는 걸 나름대로 약점이랍시고 분석한 모양인데. 그 분석, 얼마나 오래가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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