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52- >
052.
퍼억!
135km/h라는 숫자가 스피드건에 떡 하니 찍혔다.
지금껏 던진 공 중에 최고 구속이었으나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실전이었다면 포수가 펄쩍 뛰어서 받았을 정도로 큼직하게 빠진 공이었기 때문이다.
“스피드는 많이 올라왔는데…….”
“거, 묘하네……. 130km만 넘어 가면 갑자기 이렇게 제구가 확 무너진단 말이야…….”
옆에서 지켜보던 투수코치님이나 감독님도 묘하게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130km/h라면 여전히 느리지만 프로급이라고 불러주지 못할 것도 없는 구속이다. 내가 저 정도 구속으로만 경기운용을 한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겠지.
“이게 연습을 해도 통 안 늘더라고요. 벽에 가로막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나라고 뭐 빠른 공을 싫어서 안 던지겠나. 같은 조건이라면 당연히 조금이라도 빠른 공이 낫지. 하지만 갈수록 왜 반대손 전향에 성공한 투수가 그리 적은지 알 것 같았다. 구속이야 근력이 향상될수록 조금씩 따라오는데, 손끝 감각은 도무지 그게 안 됐던 것이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무한정 연습하면 되기야 하겠지. 그런데 현대 야구인이 모두 알다시피 어깨는 소모품이다. 효율이 나쁘다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오프 스피드 피치를 갈고 닦는 것도 방법이지─ 요새는 그런 식으로 반쯤 자포자기하고 있기도 했다. 당장 성적이 안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120km 중반까지는 스피드를 한 번 내봤으면 좋겠는데…….”
감독님이 입가를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자네 스타일상 컨트롤을 우선하는 건 알겠는데, 120 초중반쯤에서는 꾸역꾸역 4분할도 되잖나. 어차피 볼 배합을 보면 철저하게 코너 워크를 노리는 것도 아닌데…….”
“맞는 말씀이기는 한데. 제가 개인적으로 조금 안정이 안 돼서요…….”
방목하겠다고 했던 감독님이 먼저 조언해오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놀랐다. 나도 내심으로는 공감하는 의견인지라, 대꾸할 말이 궁색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모든 투수가 제구력을 강조하지만, 사첼 페이지처럼 껌 종이도 명중시킬 수준은 과하다고 본다. 상하 좌우를 구분해서 던질 정도만 되면 수 싸움의 전제조건은 충족한 셈이니까.
하지만 내가 ‘매의 눈’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4분할 제구로는 모자라다. 아무리 연습해도 제구력이 안 붙으니, 구속을 줄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완만한 거부의 낌새를 느꼈는지 감독님이 쓰게 웃었다.
“내가 괜한 소리 했네. 잘 먹히는 스타일을 지금 당장 손댈 필요는 없지. 벽에 부딪히면 그때 바꿔봐도 그만인 것을.”
“으음. 죄송합니다.”
나는 머쓱해서 사과하는 한편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감독님의 눈빛이 묘하게 구체적인 우려를 띠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마이 볼! 마이 볼!”
“으랏차! 허이짜!”
실내에서 연습하다가 나왔더니, 사방에서 요란한 기합소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노크를 다이빙 캐치로 잡아내는가 하면, 사방에서 배트가 붕붕 바람을 갈랐다. 이게 뭔 서커스래?
“으이구. 가식적인 인간들……. 언제부터 그렇게 악다구니 쓰면서 연습했다고들 그러시나.”
저쪽 테이블석에 노트북 펼치고 앉은 사람들을 봤더니 어찌 된 영문인지 대강 감이 왔다. 대여섯 명이나 되는데, 전력분석원 말고 스카우트도 한둘쯤은 있겠지. 우리에게는 저들의 평가가 곧 1군에서 뻗어오는 동아줄이었다.
“그래서 너는? 진짜로 신경 안 쓰인다고?”
휘경 선배가 아니꼽다는 눈빛으로 쏘아본다. 나는 일부러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시험은 원래 평소 실력으로 보는 겁니다. 어차피 제 소문 듣고 온 사람들일 건데, 오버할 필요가 뭐 있어요. 평소 모습만 그대로 보여주면 됐지.”
“패전처리 주제에 까고 있네. 저기가 퍽이나 너 보러 왔겠다. 당연히 엘리펀츠 쪽에 박기석이 재활 잘 됐나 체크하러 온 거지.”
“아, 패전처리 아니라고요! 지금 제 성적을 보고도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옵니까? 롱 릴리프! 페이스 메이커!”
나는 울컥해서 언성을 높였다.
“14승으로 다승왕 두 번 먹어본 게 뭐 대수라고. 그리고 승수는 원래 투수 평가하는 데 있어서 의미 있는 지표가 아니에요. 우리나라에서 9승한 투수가 메이저에서 14승 찍은 거 보면 모르나? 투수는 누가 뭐래도 방어율이죠. 뭐, 딱히 제가 방어율 1등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고요. 흠흠.”
“지랄. 오늘 경기 빵꾸나면 규정이닝 깨져서 랭크도 빠지는 주제에.”
“까짓 거 오늘 뛰면 되죠.”
“엿장수 맘대로?”
“이건 저만 아는 징크스인데요. 사실, 진환 선배가 짝수 날에는 조금 헐떡거리더라고요. 저 요새 사흘쯤 쉬었으니까, 5회 정도만 소화하고 내려와도 제 차례가 올지도…… 컥!”
음험하게 속닥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휘경 선배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눈짓하는 쪽을 보았더니, 진환 선배가 싸늘한 표정으로 러닝해 지나가고 있었다. 선발투수들은 원래 경기 직전에 신경이 예민해지는 법이라 나는 찔끔했다.
“……휴, 못 들었겠죠?”
“들렸으면 넌 뒤졌지. 진환이, 박기석이랑 고등학교 동창이라서 오늘은 특히 좀 날카로울걸.”
“어,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는 진환이가 에이스였어. 드래프트픽도 높았고. 그런데 데뷔하고 난 뒤에 이렇게 뒤집힌 거라, 신경 좀 쓰일 거야.”
“그래요?”
으음. 나야 ‘잘나가는 동기’라고 할 만한 선수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어떤 심리일지 대강 짐작은 간다. 대등하게 부대껴 놀던 동기나 동갑내기 친구가 혼자만 앞서 나가고 있으면 이래저래 심란하지. 자꾸 의식도 되고.
생각해보면 투수와 타자인 동기 사이에 유달리 천적관계가 많은 것도 비슷한 원리 아닐까 싶다. 한쪽이 다른 쪽을 의식해서 철저하게 분석한다면, 다른 상대보다는 손쉽게 공략하게 될 테니까.
하여튼. 여느 때보다 열띤 훈련시간이 지나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토네이도즈의 선공.
아까야 괜히 쎈 척해봤지만, TV에서나 보던 스타 선수가 코앞에서 공을 던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마운드의 흙을 꾹꾹 눌러 밟는 박기석의 모습에 나는 괜히 발가락이 꼬물거렸다.
퍼억! 퍼억! 퍼억!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아웃!”
1군 다승왕 출신과의 대결.
수많은 스카우트와 전력분석원의 관전.
여러모로 사기를 돋울 만한 조건이었으나, 우리 타선은 힘도 못 쓰고 1회를 헌납했다. 스트라이크존 체크를 우선하는 직구 위주의 피칭인데도 타자들은 연달아 헛방망이질했다.
“……시발, 장난 아닌데?”
“재활하고 온 거 맞아? 경기 안 뛴 지 1년 반쯤된 거 아니었어?”
“재활하고 온 놈이 왜 구속이 더 빨라졌어? 약 빨았나?”
하지만 1, 2, 3번 타자의 주눅이 팀 전체의 기선제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뒤이어 마운드에 오른 김진환 선배도 위력적인 강속구로 상위 타선을 돌려세웠던 것이다.
“아웃!”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아이구야. 이거 왠지 투수전으로 갈 분위기인데.
아무리 한 팀이라고 해도, 자기가 출장하지 못하는 경기에는 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양쪽 모두 점수가 안 나면 내 등판기회도 없어지는지라 괜히 시무룩…….
아니지. 생각해보니까 오늘까지 쉬면 4일 휴식이잖아. 감독님이 분명히 5선발 겸 롱 릴리프로 쓴다고 하셨잖아? 잘하면 아예 선발등판 기회 한 번쯤 떨어지지 않을까?
퍼억! 퍼억! 퍼억!
“세이프!”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경기는 예상대로 살얼음판 같은 투수전으로 흘러갔다.
5회까지 0대 0.
정수만 보면 대등한 맞대결이지만, 세부적인 부분이 조금 벌어졌다.
“저기 불펜 준비하는데요?”
“오랜만에 나온 거니까, 슬슬 들어갈 때도 됐지. 오히려 나는 60구 정도에서 끊을 줄 알았는데, 80구까지 가네.”
6이닝 무실점. 3피안타 79구.
박기석의 완투급 페이스에 비해, 진환 선배는 볼 낭비가 많았다.
5회까지 2피안타 무실점을 해놓고도 볼넷 남발. 투구수는 96개. 살얼음 같은 균형이 곧 깨질 듯해서 그런지, 감독님은 불펜을 4회 말부터 예열하고 있었다.
“볼! 베이스 온 볼스!”
“……!”
6회 말. 풀 카운트에서 선두 타자에게 볼넷.
정말 아슬아슬한 코스였던지라, 진환 선배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그러다가 벤치 쪽을 힐끗 보고는 체념한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감독님과 내가 나란히 마운드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수고했다. 너, 올 시즌 중에서 제일 잘 던졌어. 오늘 던진 감각 기억하면서 페이스 조절만 좀 하면, 너도 앞으로 쭉쭉 올라갈 수 있을 거야.”
“……예. 감사합니다.”
당연하게도 안 내려가겠다느니 어쩌느니 버티는 일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공을 건네는 진환 선배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휘경 선배한테 들은 말이 없다면 오늘따라 유난스럽다고만 생각하고 말았을 거다.
천천히 연습투구를 하는 사이에 엘리펀츠 벤치에서도 주자를 교체했다. 5번 타자를 교체하기는 조금 이르다는 생각도 들지만, 0대 0에서 평균자책점 1위인 롱 릴리프가 올라왔으니까. 승계 주자로 점수를 어떻게든 내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
“응? 대타?”
나뿐만 아니라 포수인 휘경 선배도 잠깐 얼떨떨했다. 엘리펀츠 스타일을 생각하면 지금은 틀림없이 보내기 번트 타이밍일 텐데. 주자를 2루에 보내두지도 않은 채로 타자까지 바뀌었던 것이다.
“……박현성?”
내 입장에서 당혹스러운 점은 심지어 그 타자가 낯설지도 않다는 점이었다.
‘매의 눈’ 덕분에 소홀한 경향이 있다지만, 나도 기본적인 데이터쯤은 훑어본다. 박현성이 2군에서도 외야 백업이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3연전에서 붙을 기회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2군에서도 백업이라니, 속으로나 조금 꼬시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혹시 저 친구가 너 아냐?”
“선수로서 아느냐 모르느냐 물어보시는 거라면……. 글쎄요. 시합에서는 초딩 때 한 번 만나봤을 뿐인데요.”
“맞다, 너 사회인 야구 출신이었지. 그러면 대체 뭐지?”
상대에 대해서 잘 아는 선수가 있다면, 성적이 다소 떨어져도 대타나 원 포인트 릴리프로 내보내는 경우가 있다. 휘경 선배가 물어본 건 그런 의미겠지. 달리 말하자면, 휘경 선배 눈에도 묘한 수로 보이기는 한다는 뜻이었다.
어리둥절했지만, 무슨 꿍꿍이인지 알 때까지 토론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 휘경 선배는 자리로 갔고, 나도 마운드에서 발 빠른 주자를 시선으로 힐끗 견제했다.
그리고 정면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흠짓했다.
“……뭐야?”
2군에서도 백업밖에 안 되는 박현성. 그런 놈의 핫존이 트라이아웃 때 본 것보다 명백히 2배 가까이 넓어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