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51- >
051.
“아웃!” “아웃!”
8회도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온 최태웅이 벤치에 털썩 앉았다. 몇몇 선수들이 뽐내는 기색도 없는 그 모습에 나직이 감탄했다.
“가만 보면 쟤 던지는 거 은근히 용하단 말이야.”
“어, 야금야금 잘 막더라.”
“진짜 은근히 짠물이야. 실점하는 거 본 기억이 별로 안 나.”
사실, 그라운드 밖에서 보면 최태웅의 공은 정말로 시시했다. 120km도 안 되는 직구와 낙폭도 거의 없는 체인지업만 두 종류. 어떤 때에는 ‘이제 슬슬 맞을 때도 되지 않았나?’ 라면서 괜히 안달이 날 정도였다.
“코치님. 저, 어깨 풀고 있을까요?”
7회 말이 끝났을 때부터 꼼지락거리던 불펜 B조의 윤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투수코치는 그를 힐끗 보고서 애매한 얼굴로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태웅이로 하나 더 가도 될 것 같은데.”
“태웅이요? 그래도 쟤 벌써 3이닝째인데…….”
“이닝이 아니라, 투구수가 중요하지. 쟤, 22개 던지고 내려온 건 알아?”
“22개요……?”
순간적으로 윤형우의 말문이 턱 막혔다. 템포 빠르게 휙휙 지나간 줄은 알았으나, 저렇게 얼토당토않은 투구수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3이닝 동안 22구. 타자 한 명 당 공 2.44개. 무의미한 가정이지만, 단순계산으로는 공 66개에 9이닝을 완투해버린다는 말이 된다.
“최태웅이 저거. 운 하나는 기똥차단 말이야.”
“…….”
혀를 내두르며 물러가는 윤형우의 모습에 투수코치는 쓴웃음이 나왔다. 선수들은 아직도 최태웅의 느린 공에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껴서였다.
‘그러는 나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코치진은 처음에 최태웅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박승덕 감독의 연줄로 들어온 낙하산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물론 일일이 눈에 거슬려 하는 일은 없었다. 거의 자율훈련만 하느라 손도 안 가고, 모난 행동으로 분위기를 흐리는 것도 아니니까. 정 마음에 안 들면 없는 사람 취급해도 될 일이었다. 여기에 입단할 수준이 안 돼서 그렇지, 사실 오른팔 전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장래성 자체는 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습경기를 거치는 사이에 최태웅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달라졌다. 기록은 눈처럼 쌓이는 법이고, 코치진은 업무 때문에라도 선수의 기록을 체크해야만 한다. 그 비실비실하던 피칭이 겨우내 축적한 기록을 의식해버리면 도무지 예전 같은 눈으로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저놈이 진짜로 대단한 건 전력투구를 안 한다는 점이지.”
피칭은 원래 인체에 적합한 운동이 아니다. 투수가 시합을 뛰고 나면 근육에 염증이 생기거나 젖산이 쌓이고, 모세혈관이 터지며, 인대가 늘어난다.
프로야구의 일정상, 이러한 증상을 완벽하게 회복하고 다음 경기에 나가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시즌 중에는 데미지가 축적될 수밖에 없고, 이것이 투수의 어깨를 소모품이라 말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하지만 전력투구를 안 한다면 당연히 어깨의 부담이 적다. 그러면서 투구수까지 압도적으로 적다니. 지도자 입장에서는 선발이든 불펜이든, 아무데나 끼워 넣을 수 있는 만능키가 따로 없었다.
‘저놈 빠진 자리 메울 거 생각하니까 벌써 골치가 아프군.’
아무리 초라한 보직에 있어도, 뾰족한 송곳은 주머니를 뚫고 나오기 마련이다. 요즘은 5이닝 1실점 하는 에이스보다, 6~8이닝을 적당히 먹어주는 이닝 이터가 대우받는 시대. 스카우트들의 눈이 삐지 않고서야 저런 떡잎을 지나쳐갈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있는 동안에라도 알뜰하게 써먹어야지.’
지금까지의 성적이 정말로 운이었던 게 아닌 다음에야, 전반기 안에 이적 요청이 오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해도 좋았다. 토네이도즈는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창단된 팀이므로, 이적이 무산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따악!
“애매하다, 애매해! 움직이지 마! 터치 업!”
“오케이! 뛰어! 뛰어! 뛰어!”
그러는 사이에 큼지막한 희생 플라이로 추가점수가 났다.
10대 0.
누가 시키지 않아도, 최태웅은 캐치볼로 천천히 어깨를 데우고 있었다.
***
선발진이 불펜에 과부하를 주리라는 박승덕 감독의 예측은 정확했다. 그 뒤로 한 달. 선발진이 6회 이상을 소화해준 경기가 6번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독립 구단이 퓨처스 리그에 입성했을 때와 비교하면 그리 참담한 결과도 아니었다.
독립 구단의 선수는 대부분 프로 문턱에서 좌절하거나 한 번 쫓겨난 적이 있는 리벤져. 아무리 절치부심했어도, 꾸준히 페넌트 레이스를 뛰어온 정식 구단 사이에서 헐떡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선발투수가 일찌감치 내려온 경기는 우선적으로 최태웅에게 떨어졌다.
“뭐야, 이건?”
“무슨 공이 이래? 몇 km짜리야?”
“최태웅? 뭐하던 놈이라고? 사회인 야구 출신?”
프로라고는 해도 2군. 전력분석팀에 그리 많은 인력이 배정되지는 않는다. 시즌 초반이라는 점이나 최태웅의 무명에 가까운 경력을 생각하면, 제대로 된 데이터가 있을 리 없었다.
상대 선수 입장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잡투수가 패전처리로 등판해서 120km도 안 되는 똥볼을 뿌리는 것이다. 경계심을 품으려야 품어지지가 않았으나…….
따악! 따악!
“아웃!”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큭!”
“에이 씨. 왜 또 삑사리가…….”
처음 5경기 가량은 데뷔전과 달리 1~2이닝씩만 던졌다. 중간에 토네이도즈 타선도 점수를 내면서 승리조로 마운드가 넘어갔기 때문이다. 투구수라고 해봐야 제일 많이 던진 게 19구. 얕보고 덤벼들었던 타자들이 위화감을 알아차리기에는 살짝 빠듯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경기수가 야금야금 쌓이자, 최태웅을 처음 상대하는 타자의 표정에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쌓인 기록은 때로 눈에 보이는 구위보다 많은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었다.
[일반 미션 ‘구원승리’를 달성했습니다.]
[일반 미션 ‘홀드’를 달성했습니다.]
[일반 미션 ‘홀드’를 달성했습니다.]
[일반 미션 ‘세이브’를 달성했습니다.]
[일반 미션 ‘구원승리’를 달성했습니다.]
선발투수가 무너지는 상황에 주로 나가는지라, 불펜 투수의 기록인 ‘홀드’나 ‘세이브’ 개수는 구색도 못 갖추었다. 조금 엉뚱하게도, 구원승만으로 다승 부문에서 공동 4위를 찍고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최태웅의 이름이 어떤 부문에서 압도적인 1위로 치고 올라왔다.
“27이닝 2실점? 이거 기록, 제대로 된 거 맞아?”
“불펜에서만 규정이닝을 채운 거야?”
“이닝 소화한 것만 보면 무지막지한데, 투구수보면 그렇게까지 또 혹사한 정도는 아니고…….”
평균자책점 순위는 원래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 중에서만 헤아린다. 안 그러면 원 아웃만 잡고 시즌 아웃된 투수가 부동의 1위를 차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뷔전 이후로는 조금씩 모자라던 규정 이닝을 달성하자, 단숨에 평균자책점 1위로 부상했다. 정규 시즌이 110경기에 불과한 2군에서는 이미 초반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시점이다. 반쯤 형식적인 분석만 하던 전력분석원들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장비를 들고 남양주 구장까지 달려왔다.
“빠른 체인지업하고 느린 체인지업이라…….”
“타이밍 흐트러뜨리기에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이런 성적을 찍을 정도가 되나?”
그러나 선수가 나름 승승장구하고 있는데도 전력분석원들이 무심코 지나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작정하고 파헤쳐봐도 왜 저런 성적이 나오는지 이해가 안 됐던 것이다.
저런 선수에 관한 분석은 아무래도 결과에 과정을 끼워 맞추는 식이 된다. ‘이러이러해서 좋은 성적을 낸다’가 아니라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데, 아마도 이러이러한 게 먹힌 거 아닐까?’가 되는 것이다.
엘리펀츠 스카우트인 강충식도 그 부분은 다를 게 없었다. 단지, 다른 전력분석원들보다 다소 필사적일 뿐이었다.
“분석능력이 있다는 거죠.”
“분석?”
“투구기록을 보면 거의 노골적입니다. 80퍼센트 이상의 공이 쿨존에 들어갑니다. 무턱대고 타이밍만 흐트러뜨리는 게 아니라, 그 타자가 약한 코스를 미리 알고 집요하게 노린다는 겁니다.”
“데이터 야구를 한다는 거구만.”
“아마도 그렇겠죠. 그리고 눈에 띄는 플레이 중 하나가 번트 대응입니다. 번트 시도할 때 코스나 수비 반응을 보면, 거의 미리 읽고 있다고 봐도 될 정도죠.”
“센스나 데이터 활용능력도 있다는 거고.’
“투구수는 뭐,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숫자만 봐도 나오죠.”
강충식은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가라앉허서 담담하게 말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드러냈다간 분석이 객관적이지 않은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었다.
브리핑을 들은 김성식 팀장이 애매하게 미간을 좁히면서 말했다.
“확실히 연투 능력은 탐이 나는데……. 조금만 지켜보자.”
“지켜보자고요?”
“지금 이적해오려면 저 성적 그대로 몸값 줘야 하잖아.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좀 거품이야.”
키워서 쓸 선수를 굳이 이적해오는 팀은 없다. 이적을 시킨다면 보통은 즉시 전력감으로 쓸 생각이 있을 때였다.
강충식의 브리핑을 들어보면 당장에 데려와도 크게 무너질 것 같지는 않고, 연투 능력도 기대한 만큼은 유지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성적이 고스란히 실력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박 감독님이 쓰는 것만 봐도 알 거 아냐. 저 친구는 페이스 메이커야. 투수진 전체에 대한. 방어율 믿고 쓰는 게 아닐 텐데, 지금 성적대로 값 치르기에는 아까워.”
“그래 봤자 이적료가 억 단위 나올 것도 아니잖습니까!”
“이 친구야. 자기 돈 아니라고 그렇게 막 지르면 돼? 아낄 수 있는 건 아껴야지. 조만간 방어율 거품 꺼질 테니까, 그때 데리러 가보자는 거야.”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냉철한 밀당이기도 했으나, 강충식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방어율 거품이 꺼진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방어율 거품 꺼진다고 몸값 무조건 떨어지는 거 아닙니다! 저대로 두면 방어율 조금 올라가도 경쟁 붙어서 몸값 오히려 올라갈 겁니다! 아직 침 바른 팀 없을 때 데려와야 한다니까요?”
“경쟁은 아직 안 붙었지만, 거품은 꺼졌을 때. 그런 타이밍 정확하게 노리는 게 우리 일이고 실력이지. 그리고 사실 못 데려온다고 큰일 날 만한 선수도 아니잖아.”
“……!”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떠들었지만, 강충식은 씨알도 안 먹힌다는 것만 확인하고 물러났다. 팀장의 의견이 아주 틀려먹은 것도 아닌지라 논파하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였다.
“에이 씨. 그러게 트라이아웃 왔을 때 계약을 했어야 하는 건데……. 박 감독, 그 영감탱이는 상도덕도 없나? 남의 트라이아웃에 쳐들어와서 합격자를 빼 가고 자빠졌어. 그 새끼도 그래. 거기 갈 거면 우리 트라이아웃은 왜 치는데?”
강충식은 있는 대로 구시렁거리면서 수원으로 향했다. 마침 토네이도즈 전이기에 다시 한 번 훑어보려는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로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이놈은 갈수록 비싸진다. 조금씩이지만 구속도 늘어났고, 트라이아웃 때랑 비교하면 체인지업 폼도 많이 좋아졌어. 성공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팀 재테크 차원에서라도 꼭 데리고 와야 해…….’
스카우트가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인정받지 못한 선수의 자질을 미리 알아보았을 때다. 처음에는 강재황의 눈썰미에 편승했을 뿐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자신의 눈에도 어렴풋이 보이게 된 떡잎이 어떻게 개화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좀이 쑤셨다.
‘친한 척하면서 밥이라도 먹여둬 볼까? 지도 양심이 있으면 토네이도즈로 간 게 조금 미안하기는 하겠지. 이적 경쟁 붙어도 대강 비슷한 조건이면 선수 의견 물어볼 수도 있으니까……. 눈도장을 좀 찍어두면…….’
이런저런 구상을 하면서 구장으로 들어가던 강충식이 흠칫했다.
“어? 충식 씨, 오랜만이네요.”
“형님. 잘 지내셨어요?”
“요새 엘리펀츠 잘 나가던데요. 좋으시겠어요? 이호영이 충식 씨가 꽂은 거였잖아요.”
일찌감치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스카우트들이 한 마디씩 말을 걸어온다.
강충식은 가까스로 표정관리만 하면서 속으로만 오만가지 욕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