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50화 (50/90)

< 괴물 배터리 -050- >

050.

7점이나 뒤지는 경기의 6회.

입지가 확고한 주전이나, 작은 기회 하나가 절실한 후보나. 이런 상황에서 진심으로 역전을 꿈꾸지는 않는다. 절박함이 부족하다기보다, 현실적으로 될 만한 일이 아니라서다.

하지만 이건 점수가 벌어지면 선수들이 경기를 포기한다는 말이 아니었다.

야구는 개인 성적도 팀 성적 못잖게 중요한 스포츠. 승패가 넘어갔다 싶으면 대다수는 개인 성적이나 관리하자는 마음으로 플레이에 임한다.

승패에 관한 부담감이 줄어들면 평소보다 좋은 결과를 내는 선수도 많다. 그런 결과가 켜켜이 쌓이다 보면, 결과적으로 추격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퍼억!

“스트라이크!”

울프즈 2군 선수인 이철민도 그런 마인드로 타석에 섰지만, 바뀐 투수의 초구를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다.

‘뭐야, 이건?’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에 꽂히는 포심 패스트볼.

구속은 높게 쳐줘 봤자 120km나 될까?

오버핸드 투수라고는 볼 수 없는 구속에 순간적으로 변화구라 착각마저 했을 정도였다.

‘잘하면 되겠는데?’

토네이도즈에서도 경기가 넘어왔다고 보고 떨거지를 올려보낸 모양이다. 그렇다면 기회는 있다. 이 투수한테 3~4점쯤 따낸다면, 후반을 충분히 기약해볼 만도 했다. 그렇다면 일단은 출루에만 집중하고, 후속 타자들에게 최대한 많이 공을 보여줘야겠지. 거의 아마추어 수준의 공이지만, 별다른 정보도 없는 투수를 상대하려면…….

따악!

“큭!”

이철민이 순간적으로 침음성을 냈다.

2구.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으로 완만하게 떨어지는 슬로우볼.

최대한 많이 공을 봐둘 생각이었거늘. 아무리 그래도 너무 느슨한 공인지라,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스윙을 해버렸던 것이다.

“아웃!”

“젠장!”

2루수 땅볼이 나온 거야 그럴 수 있다지만. 지켜보기로 마음먹은 주제에 무심코 건드리고 만 자신의 플레이에 짜증이 치밀었다.

다음 타자인 황주성이 그의 옆으로 슬쩍 다가와서 물었다.

“무슨 공이었냐? 그냥 비리리 날아오던데.”

“두 번째가 아마도 체인지업이었지 싶은데요. 폼은 괜찮은데, 팔 휘두르는 속도가 조금 달랐어요. 미리 알고서 보면 반응할 수 있을 정도예요.”

“낙폭은 좀 어떻고?”

“글쎄요. 제가 움찔거리다가 빗맞힌 거지, 딱히 낙폭이 있어서 잘못 때린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게 인마. 처음 보는 투수인데 공을 몇 개 봤어야지.”

하지만 황주성의 핀잔은 누워서 침 뱉은 격이 되었다. 자신도 똥파리처럼 비리비리하게 날아오는 슬로우볼에 무심코 방망이를 낼 뻔했던 것이다.

“크……윽!”

“스트라이크!”

가까스로 스윙을 멈춘 순간, 짜증이 확 밀려왔다. 그대로 떨어져서 볼이 될 줄 알았는데 스트라이크 판정이 나왔기 때문이다.

솔직히 조금 빠졌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굳이 항의하지는 않았다. 저딴 투수를 상대하면서 판정 탓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싫어서였다.

‘그냥 보고 쳐도 될 것 같아. 스트라이크존이면 친다.’

2구.

‘……빠른 공! 인가?’

이철민의 조언과 달리, 폼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속 차이의 판단은 날아오는 공을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따악!

칠 만하다고 느껴서 휘두른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과 묵직한 충격이 찾아왔다. 스윙이 빨랐는지, 공이 방망이 끄트머리를 맞고 바닥에 처박혔던 것이다.

“아웃!”

“…….”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투수코치가 이리 와보라며 손짓했다. 잔소리를 들을까 싶었던 황주성은 살짝 주눅이 들어서 다가갔다.

“너, 지금 거 무슨 공이라고 생각하고 휘둘렀냐?”

“직구로 봤습니다.”

“폼이 다르디?”

“아, 아뇨. 폼은 그냥저냥 비슷했는데……. 초구랑 비교해서 훅 날아오길래요…….”

보아하니 투수코치는 분석을 위해서 타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잠시 생각하던 투수코치가 감독과 쑥덕거리다가 말했다.

“다들 주목. 저거 체인지업 구속이 2단이다.”

“2단이요?”

“철민이한테 처음 던진 초구는 118km. 2구는 85km다. 반대로 주성이한테 던진 초구는 74km. 2구는 86km. 무슨 말인지 알겠지?”

“…….”

“직구로 보고 휘둘렀다며? 아니야. 네가 휘두른 공도 체인지업이었어. 빠른 체인지업.”

인간이 느끼는 속도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똑같은 스피드라도 느린 공을 본 후에는 빠르게 느껴지고, 빠른 공을 본 후에는 느리게 느껴진다.

지금까지의 플레이로 보건대, 최태웅 투수는 그런 속도감의 차이를 적극 활용하는 중이었다. 중속 체인지업과 저속 체인지업의 12km라는 구속 차이는 오프스피드 피치로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런 건 보통 궁여지책이지. 패스트볼이랑 체인지업 속도를 벌리는 게 훨씬 효과적인데, 패스트볼 구속이 안 나오니까. 그래서 체인지업 두 종류를 쓰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 그냥 패스트볼만 노리면 되지 않을까요?”

“패스트볼에만 타이밍을 맞추고 있다가, 느리다 싶으면 버리고.”

“그러다가 갑자기 변화구 나오면?”

“지금까지는 다른 변화구 없었잖아. 데이터 없는 투수니까, 그 정도는 감수하고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해봐야지.”

“패스트볼이 저런데, 변화구가 있어 봤자죠.”

작전을 구상하는 사이에 세 번째 타자가 아웃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상대는 아마도 롱 릴리프. 아직 2~3이닝 정도는 기회가 있을 터였다.

7회 초.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토네이도즈의 마운드에는 최태웅이 그대로 올랐다.

퍼억! 퍼억!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계획대로 느린 공은 버리고 패스트볼만 기다리던 타자가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우연인지 수가 읽힌 건지. 홈런 레이스 때나 볼 법한 배팅볼이 스트라이크존의 애매한 코스를 콕콕 찔러왔던 것이다.

‘씨발. 장난하나…….’

작전이 없었다면 차라리 충동적으로라도 휘둘러봤을 법한 공이었다. 엉겁결에 투 스트라이크로 몰리자, 타자는 괜히 신경이 곤두섰다.

벤치에서 방침을 내줬다지만, 방금은 임기응변을 발휘했어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까 저 투수, 지금까지 전부 스트라이크만 던지지 않았나? 도대체 뭔 깡이래? 저따위 똥볼만 던지는 주제에. 이번에는 빠른 공일까 느린 공일까? 이번에도 느린 공이 스트라이크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커트해야…….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순간적으로 타자는 펄쩍 뛸 뻔했다. 기다리던 패스트볼이 온 것까지는 좋은데, 하필이면 가장 약점으로 꼽히는 몸쪽 높은 코스에 꽂혀왔던 것이다.

다급히 휘두른 방망이는 허무하게 바람만 갈랐다.

벤치로 돌아온 그가 굳은 표정으로 스피드건을 확인했다.

“방금 거 구속 몇이었어요?”

“방금? 119.”

“119km였다고요? 방금 게? 130중반은 되는 줄 알았는데…….”

투수코치는 얼이 빠진 타자를 흘낏 보면서 혀를 찼다.

‘저 새끼 볼 배합 좀 하는데?’

배터리 간에 아무런 사인도 없으니, 볼 배합이 오로지 투수의 작품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느린 공을 버리기로 했다지만, 저렇게 애매한 코스에 2구 연속으로 스트라이크가 되면 얘기가 다르다. 임기응변으로라도 대응하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서 신경이 쓰이고 만다. 무의식적으로 조금이라도 느린 공에 타이밍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마지막 공은 타자가 가장 까다로워하는 코스. 실제 구속보다 빠르고 날카롭게 느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이번 이닝에도 세 타자가 나가떨어지자, 선수들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옆에서 보기에는 정말로 별것도 없는 공이다. 하지만 그런 공이 6명이나 잡아먹었다면, 방심이나 우연이라며 핀잔 줄 단계도 지나간 셈이었다.

‘데이터 가지고 계산해서 배합한 건가? 아니면 직감적으로? 어느 쪽이든, 우연이 아니라면 만만치 않겠는데…….’

선발투수 상대로 까먹은 타율을 복구하겠다면서 기세등등하던 선수들이 주눅이 들었다. 그런 분위기는 수비에까지 여파를 가져왔다. 연속 피안타와 3루수의 송구 미스를 빌미로 2점이나 되는 추가 실점을 허락했던 것이다.

“차라리 느린 공을 노려볼까?”

“느린 공? 느린 거에 타이밍 맞추고 있다가 패스트볼 들어오는 게 훨씬 건드리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실제로 공이 날아오는 비중을 생각해보면 느린 공이 거의 다잖아?”

“말이 느린 공이지. 중속 저속 섞여서 들어오고 있는데…….”

강속구 투수가 긁히는 날에는 대책도 없다. 노림수를 좁히라거나, 투구수를 늘려서 일찌감치 내려오게 하라거나. 교과서에 나올 법한 뻔한 소리를 반복하는 게 고작이 다.

하지만 2이닝을 씹혀버린 지금에 와서 봐도, 저 최태웅은 언제든지 두들겨 눕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보니 다들 위축된 와중에도 ‘이런 건 어떨까? 저런 건 어떨까?’라며 입을 다물지 않았다.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8회 초. 선두타자로 나온 김우혁이 홈 플레이트를 뒤덮을 기세로 바짝 붙어서 섰다. 포수 정휘경이 그런 김우혁을 힐끗 보았다.

‘김우혁. 작년에 바깥쪽 타율이 .206 .218 .157였지.’

이 약점은 짧은 팔다리로 인한 것이라 쉽게 극복하기 어렵다. 전력분석팀이 가져다준 시범경기와 스프링캠프 성적을 봐도 김우혁의 바깥쪽 타율은 여전히 낮았다.

하지만 김우혁이 가끔 이렇게 부상 위험을 무릅쓰고 바짝 달라붙는 경우는 얘기가 달랐다. 몸에 맞아서라도 나가겠다는 깡다구가 집중력을 높여주는 건지. 위축된 투수의 스트라이크존이 좁아져서인지. 일시적이나마 타율이 껑충 뛰어오르곤 했던 것이다.

‘작년 6월에 2타석 연속으로 공 맞은 다음부터는 이거 잘 안 했는데…….’

9점 차이나 나는 상황에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최태웅 정도의 구속이라면 맞아도 덜 아프다고 생각했나 보지.

‘다들 3단 구속에만 정신 팔려서 눈치 못 챈 모양인데…….’

김우혁이 자세를 잡자, 최태웅도 투수판을 밟았다.

퍼억!

“스트라이크!”

몸쪽 높은 공.

시속 7~80km 정도나 될 슬로우 볼.

타자의 팔꿈치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코스.

지금까지와는 달리, 정휘경의 미트가 기다리고 있다가 공을 잡아챘다. 마치 이번 공은 그리로 오리라는 걸 미리 알았던 것처럼.

‘최태웅이 저거. 피안타율이 2할 5푼도 안 되는 쿨존에만 골라서 던지고 있어. 직구만 던져도 피안타율 2할 초반쯤 끊을지 몰라.’

전지훈련 때부터 그랬다. 나중에 분석해보면, 최태웅이 던진 공은 대부분 타자가 가장 약한 코스였다.

그럼에도 정휘경 이외에 눈치챈 사람이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옛다, 먹어라.’라는 듯한 한가운데 허술한 공을 쏴주기 때문이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것은 오히려 그런 공치고 얻어맞은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다고 해도 믿어질 지경이었다.

퍼억!

“스트라이크!”

자로 잰 듯이 똑같은 코스에, 시속 80km짜리 슬로우볼이 날아와 꽂힌다.

김우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스트라이크존에 너무 바짝 붙은지라, 이건 물리적으로 타자가 칠 수 없는 코스였다. 그런데도 김우혁이 물러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타자 몸에 맞을지도 모르는 공을 던지는 것은 투수에게도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 이렇게까지 아슬아슬한 공을 몇 번이나 던질 수 있는 투수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 물러나?

정휘경은 투수와 타자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치킨 게임을 하자는 건가……. 나라면 여기서 똑같은 거 하나 더 던져서, 눈 멀쩡히 뜬 채로 루킹 삼진 먹여줄 텐데. 최태웅이 제구력이라면 충분하지.’

하지만 정휘경이 자기 생각을 사인으로 내는 일은 없었다. ‘나라면 이렇게 리드했을 텐데.’라면서 최태웅의 볼 배합과 비교하는 것이 겨울 동안 생긴 소소한 취미였을 뿐이다.

3구.

“……!”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는 순간. 김우혁이 뒤로 크게 백 스텝 했다.

이번에도 몸쪽 높은 코스에 똑같은 공이 을 것을 예상했으나─.

부웅!

“크윽!”

엉거주춤한 자세로 김우혁의 허리가 홱 돌았다.

몸쪽. 뒤로 뛰지 않았다면 갈비뼈를 정통으로 맞았을 자리에 120km짜리 패스트볼이 공이 휙 지나갔던 것이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예상하던 몸쪽 코스와 비슷하기는 했던지라. 김우혁은 나자빠지면서도 스윙을 멈출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요란하게 엉덩방아를 찧은 그가 끙끙거리며 험악하게 마운드를 노려보았다.

‘설마. 얘가 몸쪽 공 노리고 스텝 할 걸 읽은 거야?’

똑같은 코스에 다시 던지려다가 제구 미스가 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정휘경은 코앞에서 타자와 투수의 기세를 직접 체감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지금 플레이의 전부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저놈은 정체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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