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49화 (49/90)

< 괴물 배터리 -049- >

049.

“2군 경기인데도 관중 꽤 많네요. 어릴 때 2군 경기 보러 한 번 와봤을 때는 안 이랬는데. 이거 한 4백쯤 되나?”

“계속 이렇게 올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개막전인 데다가, 우리 처음 2군 입성하는 경기라서 그런 거지. 내일만 돼도 반 토막 날 걸.”

“그래요?”

“반 토막이라는 것도 우리 구장이 시설 좋아서 그런 거고. 다른 2군 구장은 옛날 학교 운동장처럼 흙바닥에 자갈도 굴러다녀. 관중이 적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한 명도 없이 경기할 때도 많다니까.”

“그리고 많이 와봤자 공짜관중인데 뭘. 동네 사람들이 설렁설렁 마실 나오는 기분으로 구경하는 정도지.”

퓨처스 리그 개막전. 생각보다 바글거리는 관중을 보고 긴장한 ‘신참’들에게 ‘프로 2군 유경험자’들이 이래저래 잡다한 썰을 풀어놓았다.

하지만 관중수에 비해서 개막식 행사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TV에서 보던 1군의 개막식 행사만큼 거창한 걸 기대한 게 아닌데도 그랬다.

기껏해야 현수막 아래에서 양 팀 선수들이 도열한 모습을 사진 몇 방 찍는 정도. 애국가와 기념 시구가 끝나고는 상대 울프즈 2군의 선공으로 경기가 바로 시작되었다.

“진환이 형 파이팅!”

“여기 좀 봐주세요!”

우리 팀의 선발투수는 김진환. 내가 예전에 토네이도즈 상대로 7이닝 노 히트를 했을 때의 상대투수였다.

그 친선경기에 나왔다는 자체가 후보급 선수라는 말인데, 1년 사이에 괄목할 만큼 성장했다. 개막전에 스타팅 피처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더 설명할 것이 없었다.

퍼억! 퍼억 따악!

“스트라이크 아웃!” “세이프!!” “세이프!”

하지만 공식경기 데뷔전이라는 부담감 때문인지. 김진환은 경기 초반에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했다.

볼넷까지는 없었지만, 스트라이크를 제대로 던지지 못해서 자꾸만 투구수가 늘어났다. 불리한 카운트에서 연타를 얻어맞으며 1, 2회에만 합쳐서 3실점을 해버렸다.

“최태웅이. 이병석이. 준비하고 있어 봐라.”

“예!”

3회. 김진환이 노 아웃에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주자를 내보내자, 등판할지도 모르는 찬스가 찾아왔다.

애초에 나는 전력투구가 드문지라, 금세 실전투입 가능할 정도로 예열이 끝났다. 드디어 데뷔 등판이라는 생각에 설레고 있는데 그라운드에 찬물이 쏟아졌다.

“아웃!” “아웃!”

풀 카운트에서 병살타.

급한 불을 끄고서 진정됐는지, 김진환이 다음 타자까지 깔끔하게 틀어막으며 위기를 탈출했던 것이다.

“……불펜이 또 이런 고충이 있었네.”

굳이 투수코치나 감독이 말해주지 않아도 등판이 보류됐다는 것쯤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구원투수는 경기 상황에 따라서 종일 몸만 풀다가 끝나는 적도 있다고 하더니만. 연습 투구라고 체력 소모가 없는 것도 아닌지라,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확실히 컨디션 조절이 어려울 법도 했다. 마무리 투수는 경기 후반에만 등판하니까 그나마 낫겠지만.

따악!

“오케이! 뛰어뛰어뛰어! 공 놓쳤다!”

“따라가자! 파이팅!”

개막전에는 결국 등판하지 못하고 끝났다. 그 뒤로 페이스를 되찾은 김진환이 7회까지 추가 실점 없이 던지고 내려와서 3대 4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실점까지는 안 했지만, 선발로 나간 강형석이 1~2회 연속으로 만루 위기를 자초했던 것이다.

“형석이 아무래도 5회 못 갈지도 모르겠다. 언제 갑자기 나가게 될지 모르니까, 분위기 봐가면서 천천히 어깨 풀고 있어.”

“예!”

당연히 나는 등판 기회가 왔다며 신나서 불펜으로 달려갔는데…….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이게 뭐임. 누구 놀리냐?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왜 골골거리다가 갑자기 괴력무쌍하고 난리인데?

“야야야, 표정관리 해라. 아주 썩어들어가네. 선발투수가 잘 던지면 응원은 못 할망정…….”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이건 야구의 세계화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 우리 현역 선수들이 뭘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인데요.”

“까고 있네. 데뷔 파투나서 똥 씹고 있는 게 훤히 보이는구만. 원래 패전처리는 안 나갈수록 좋은 거야. 몰라?”

“패전처리라뇨. 롱 릴리프랑 패전처리는 다르거든요?”

“다르긴. 불펜이 왜 오래 던지겠냐? 선발이 일찌감치 털렸으니까 그러지. 그게 패전처리 아니면 뭐야?”

“페이스 메이커죠. 선발이 일찌감치 무너져도 뒤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보루. 저 같은 보직 없이 시즌 운영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패전처리가 꼭 질 때만 나가나? 대량 리드할 때도 나가거든요?”

나는 백업 포수인 선배의 핀잔을 부루퉁해서 받아쳤다. 이틀 연속으로 공치게 될지도 모르는지라, 나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은 이런 경험 자체도 처음이었다. 제주도에서도 대부분 구원으로만 뛰었지만, 경기마다 칼같이 등판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감독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꽤 그럴싸한 인선인 것 같기도 하네. 피칭 스타일 덕분에 나보다 손쉽게 어깨를 풀 수 있는 선수도 없었으니.

이건 단순히 어깨를 ‘빨리’ 푼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우완투수로 학생 야구를 한 적이 없기에 압도적으로 어깨의 소모가 적었다. 불펜진에 롱릴리프맨을 둘 거라면 나보다 적합한 투수도 없다는 말이었다.

“저기요. 아저씨도 토네이도즈 투수예요?”

경기 흐름에 따라서 연습 투구를 중단하고 캐치볼 정도만 하고 있는데 어디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봤더니 초등학생 꼬마 둘이 철망에 바짝 달라붙어서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구장의 시설이 괜찮은 편이라지만 불펜까지 따로 만들어져 있지는 않았다. 파울존 구석에 임시로 홈 플레이트와 마운드를 설치해놓은 것뿐이다 보니, 철망만 아니면 구경꾼과 악수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 선수지. 유니폼 입은 거 안 보여? 스파이크도 신고 있잖아.”

나도 어릴 적에 코앞을 지나가는 선수에게 말 붙였다가 무시당한 적이 있다. 지금에야 일일이 상대해주기 어려운 선수 입장도 이해되지만, 어린 마음에 서운했던 것까지는 어절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수 입장이고, 무명이다보니 귀찮아질 것도 없다. 꼬맹이들하고 말 몇 마디 섞어서 자그마한 추억을 심어주는 것도…….

“그런데 왜 그렇게 공이 느려요? 후보 선수예요?”

“야, 멍청아! 대놓고 그런 소리 하면 어떡해! 그러니까 2군에 있는 걸 텐데!”

“…….”

참자, 참자. 초당들이 하는 소리다. 꼬마들이 뭘 알겠냐.

나는 억지로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가 뭘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투수는 타자를 잡아내는 사람이지, 아웃을 잡아내는 사람이 아니에요. 공이 꼭 빠른 투수만 잘하는 게 아니…….”

“아저씨, 바보죠? 당연히 공이 빨라야 타자가 못 치죠!”

“글쎄, 공 빠른 게 다가 아니라니까? 사실 진짜로 중요한 건 제구력이야. 120km 정도만 돼도 프로 선수가 ‘아차’하는 사이에 놓칠 수가 있거든. 그러니까 최대한 모서리에 걸치도록 제구할 수만 있으면…….”

“에이, 그런 건 얍삽이잖아요. 우리 학교 야구부 에이스 형도 표적판 되게 못 맞추는데 공 빠르니까 맨날 시합 이겨요.”

“……야! 니가 나보다 야구 잘 알아? 그렇게 잘났으면 그놈 데려와 봐! 나보다 빠른가 보게!”

“아저씨, 바보죠? 프로가 당연히 초등학생보다 공이 빨라야죠. 초등학생이랑 어른이 내기하는 게 말이 돼요?”

결국에는 그날도 마지막까지 등판하지 못했다. 마수걸이 출장을 못한 선수는 여럿 있었지만, 이틀 연속으로 몸만 풀고 끝난 것은 나뿐이었다.

“야, 너네는 학교 안 가냐? 방학 아니잖아?”

“학교 끝나고 온 건데요?”

“우리 집 조오기예요.”

다음 날에는 아예 몸을 풀 기회도 안 왔다. 3선발인 조수현이 4회까지만 해도 1피안타 무실점의 위력투를 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저씨는 경기 왜 안 나가요?”

“아저씨 아니고 형이다. 형은 비장의 무기라서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에만 나가.”

“그저께도 8회까지 동점이었는데 아저씨 안 나갔잖아요. 그런 게 무슨 비장의 무기예요? 공도 느려 터졌으면서.”

“……너네 그저께도 왔었니? 공부 안 해? 누가 그렇게 야구만 쳐보고 다니래? 그래갖고 좋은 대학가겠어?”

나는 철망 너머에 아예 지정석을 차린 꼬마들과 투닥거리면서 한숨 쉬었다. 아예 나갈 일이 없는 경기라면 모르겠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경기를 지켜봐야 하니 감질나서 미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롱 릴리프 맨에 가장 적합한데, 정신적으로 버터내질 못하겠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아저씨. 진짜로 공이 느려도 좋은 야구선수가 될 수 있어요?”

그나마 좀 철딱서니가 있어 보이던 까무잡잡한 얼굴의 꼬맹이가 불쑥 내게 물었다. 따분한 얼굴로 철망에 기대어 서 있던 나는 무심코 눈썹 사이를 좁혔다.

“너도 혹시 야구 하니?”

“아뇨. 저 말고 우리 형이 야구하는데요. 우리 형도 공이 느려요. 그래서 계속 후보 선수만 한대요.”

“……혹시 너희 형.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강제로 야구 시키고 그러는 거야?”

“아뇨. 우리 엄마 아빠는 형이 야구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러면 형이 하고 싶어서 하는 야구라고?”

“예. 그런데 아무리 연습해도 스피드가 안 나와서 시합에 안 내보내 준다고 막 우울해해요. 진짜로 공 느려도 야구 잘할 수 있는 거 맞아요?”

“…….”

되바라진 소리만 지껄이는 친구 놈과 달리, 까무잡잡한 꼬맹이의 눈빛은 똘망똘망했다. 철망이 뻔히 가로막고 있는데도 나는 무심결에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뻗었다가 쓴웃음만 지었다.

“말로만 잘할 수 있다고 해봤자 안 믿을 거지? 그러면 너 앞으로 여기서 경기 열릴 때마다 구경하러 와봐.”

“예? 왜요?”

“왜는 뭐가 왜야? 공 느려도 존나게 야구 잘할 수 있다는 거 보여주려고 그러지.”

“헐……. 아저씨, 야구 선수가 막 욕하고 그래도 돼요?”

“존나게가 무슨 욕씩이나…… 아, 아니다. 애들 앞에서 비속어 쓰면 안 되지. 정정. 형이 공 느려도 고추 나오게 야구 잘할 수 있다는 거 보여줄게. 오케이?”

따아악!

“우와아아아!”

그때, 더그아웃 쪽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꾸역꾸역 2사 만루까지 만들어내는가 싶더니, 그대로 우리 5번 타자가 홈런을 때려냈던 것이다.

이걸로 7대 0.

점수 차이가 까마득하게 벌어지자 상대 팀 더그아웃의 분위기가 참혹하게 가라앉았다.

“태웅아. 몸 풀어라. 다음 이닝에 너다.”

“……예!”

우리 선발투수인 조수현의 성적은 5이닝 무실점. 투구수도 61개. 완투마저 노려볼 수 있는 페이스였으나, 감독님은 시즌 초반부터 선발진의 체력을 비축해둘 생각인 듯했다. 우리 팀은 선발감이 부족하니까 시즌이 무르익으면 반드시 과부하가 생길 거라고 하셨던가?

애초에 요구받은 역할 자체가 이런 것이었기에 나는 곧 6회 초의 마운드에 올랐다.

연습투구 전에 간단하게 발로 마운드의 감촉을 확인하는데 정휘경 선배가 다가왔다. 선배는 갑자기 내 팔을 붙잡더니만 조금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어쭈구리? 깡 괜찮네. 생각보다 떨지도 않고.”

“새삼스럽게 무슨. 마운드 한두 번 올라와 보는 것도 아닌데 떨 게 뭐 있습니까?”

“그래도 지금 경기는 다르지. 2군이지만, 일단은 이게 프로 데뷔전인 거잖아. 거기다가 빨리 나오고 싶어서 벼르고 있기도 했고.”

선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기에 나는 묘한 쓴웃음을 지었다. 기념비적인 데뷔전에서 ‘진심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선수가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믿는 구석’이 너무 든든했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쿵쾅거리기야 하지만, 2군 무대 정도에서 진심으로 긴장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솔직히 나는 필사적으로 연습하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손에 넣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마운드를 다시 밟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평범한 사람인 척할 마음도 없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이 서민 코스프레를 해봤자 오히려 빈정만 상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초능력을 손에 넣고도 최고가 아닌 것은, 순수하게 발버둥치는 선수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볼 배합은 어떻게? 하던 대로 네가?”

“자신 있으시다면야 선배님한테 믿고 맡길 수도 있고요.”

그래도 투수가 연습할 때 호흡을 가장 많이 맞추는 상대는 포수인 법이다. 정휘경 선배와 나는 어느덧 이런 식으로 가볍게 주거니 받거니 할 정도의 사이도 되었다.

선배가 피식 웃으면서 내 가슴팍을 쳤다.

“싫어. 니 그 병신 같은 똥볼을 어떻게 리드하라고. 그냥 꼴리는 대로 던져. 어디로 날아오든 다 받아줄 테니까.”

“옛서. 그러면 오늘은…….”

나는 저녁 요리 메뉴라도 궁리하듯이 말꼬리를 흐리다가 말했다.

“오늘은 느린 공 비중을 좀 많게 갑니다. 몰라도 별로 상관은 없겠지만, 그렇게 알고 받으세요?”

“느린 공? 체인지업 위주로?”

선배는 살짝 의아하다는 얼굴이었지만 딱히 토 달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마운드를 발로 꾹꾹 밟으면서, 철망에 바짝 달라붙어 있는 꼬맹이들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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