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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배터리-47화 (47/90)

< 괴물 배터리 -047- >

047.

“역시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송곳은 원래 주머니에 넣으면 삐져나온다고! 스카우트들이 죄다 소눈깔도 아닌데, 한두 명쯤은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설마 팀을 고를 기회가 올 줄 몰랐던 나는 얼렁뚱땅 자리를 피했다. 그대로 있다간 어디가 됐건 분위기에 휩쓸려서 결정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더니만, 집에서 천천히 읽어보라며 양쪽 모두 가계약서까지 건네주었다.

나름대로 알아보기야 했지만, 결국은 주워들은 풍월이지 내가 뭘 아나. 현역인 진효 형에게 상담했더니 자기가 더 들떠서 저렇게 연신 히죽거렸다.

“계약서 자체는 양쪽 다 표준이네.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없어. 최저 연봉인 것만 어떻게 좀 하면…….”

“연습생이 연봉 협상도 해? 계약할지 말지, 양자택일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보통은 그런데, 너는 데려가고 싶다는 팀이 둘이나 붙었잖아. 경쟁 붙이면 몇 푼쯤은 더 받지 않을까?”

“몇 푼 정도면 됐어. 어차피 도토리 키재기 수준일 것 같고. 데뷔해서 성적으로 조진 다음에 제대로 협상하면 되지.”

진효 형의 조언을 요약하면, 계약 내용 자체에는 우열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당연히 팀 자체의 장단점을 따져볼 수밖에 없었다.

“장단점이라……. 시설이나 팀 케미 같은 건 솔직히 나도 모르겠고……. 나보고 하나 꼽아달라면, 1군 데뷔할 기회에서 차이가 나지.”

“데뷔?”

“토네이도즈는 독립 구단이잖아. 네가 아무리 잘해도 올려줄 1군 팀 자체가 없다고. 다른 12개 구단에서 네 성적 보고 트레이드를 해가야 비로소 1군에 올라갈 수 있으니까. 절차가 하나 늘어나는 거지.”

“확실히……. 엘리펀츠에서 잘하면 그냥 평범하게 엘리펀츠 1군으로 올라가니까.”

“대신에 토네이도즈도 장점은 있어. 박승덕 감독님.”

“감독님이 왜?”

“박승덕 감독님이 직접 너 데리러 왔잖아. 실권자가 그만큼 눈독 들이고 있다는 거야. 당연히 출장 기회가 더 많지 않겠어?”

“……!”

분명히 진효 형의 말대로다. 맹점을 찌르는 의견에 나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엘리펀츠의 2군 감독도 스카우트처럼 나를 좋게 평가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선수 기용권을 가진 감독이 나를 시시하게 본다면 출장이 어려워진다. 내 진가는 시합에서나 보일 수 있으니, 악순환의 고리에 올라가고 마는 것이다.

내가 처한 문제 대부분은 시합에 나갈 수만 있으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특성을 새로 오픈할 때마다 포인트가 2배씩 필요하다지만, 그까짓 거야 풉. 사회인 야구에서 그토록 감질나게 긁어모은 포인트를 여기서는 갈퀴로 긁어모을 수 있다. 사회인 야구 1년보다 프로 2군에서의 3개월이 훨씬 많은 포인트를 안겨줄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선발로 꾸준히 출장했을 경우의 얘기지만.

“오케이. 조언 고마워 형. 참고가 됐어.”

남들 눈에야 고민의 여지가 있어 보이겠지만, 내게는 전혀 달랐다. 한순간이라도 두 팀을 저울 양쪽에 올려놓은 것이 멍청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마음의 결정까지 내린 판국에 꾸물거릴 게 뭐 있나. 나는 그 길로 인감도장까지 들고 토네이도즈 구단이 있는 남양주로 내려갔다. 이미 가계약서를 몇 번이나 검토한 뒤였기에 길게 얘기할 것도 없었다.

“이 부분은 입단하고 1년 동안은 숙소 생활을 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선수들과의 유대감 배양을 위한 의무사항이고, 이 기간은 숙소 내에서 이뤄지는 숙식 비용을 구단에서 부담합니다. 1년이 지난 뒤에도 숙소 생활을 원하신다면 숙식 비용은 연봉에서 공제되고요.”

“입소는 정확히 언제 들어가야 되는데요?”

“방 배정이야 어려운 게 아니니까, 내일 당장에라도 짐만 챙겨서 오시면 됩니다. 늦어도 비훈련기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입소하셔야 하고요.”

구단 직원에게 형식적인 절차로써 이런저런 구두설명을 받은 뒤에 도장을 찍었다.

도장이 반씩 찍힌 계약서를 나눠 가졌더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나처럼 어린 놈이 계약서에 도장 찍고 할 일이 언제 있었겠어.

이러면 끝난 건가……. 이걸로 내가 선수가 된 게 되는 건가……. 난생 처음 전철 타보는 것처럼 쭈뼛거리고 있으려니, 구단 직원이 빙긋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토네이도즈의 선수가 되신 걸 환영합니다. 앞으로 좋은 활약하시길 바랍니다.”

“아…….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제야 머릿속이 확 맑아졌다. 오랫동안 앓던 이가 자는 사이에 쏙 빠져버린 걸 뒤늦게 깨달은 기분이었다.

“계약을 했다고? 진짜로?”

“어머, 세상에…….”

집에 와서 얘기했더니, 부모님은 일단 반신반의했다. 하기야, 내가 프로 준비 어떻게 돼간다고 일일이 설명하고 다닌 적이 없으니까. 갑작스럽고 얼떨떨해서 실감이 안 나시는 것도…….

“혹시 이거, 선수 시켜줄 테니까 돈 내라고 하지 않든?”

“그런 거 아니거든?”

“이놈아! 네가 뭘 안다고 혼자 멋대로 도장을 찍고 그래?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진짜 사기꾼은 마른오징어에서도 엑기스를 짠다고! 땡전 한 푼 없다고 사기 안 당하는 게 아니라니까?”

“여보, 우리 인감은 어딨지? 이놈 모르게 숨겨놔야겠는데? 벌써 훔쳐간 건 아니지?”

“…….”

괜찮아. 난 이런 분위기 익숙해. 낯설지 않아. 감동의 물결 따위 기대하지 않았어. 웃자고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인감 잘 있나 확인하러 일어나신 게 당혹스러웠을 뿐이지. 얼마나 훈훈해. 아들이 다단계 같은 거에 빠진 거 아닐까 봐 걱정하시는 모습이.

계약서까지 들이밀고 나서야 ‘정말인가?’라는 분위기가 나왔다. 1년 이내로 프로 계약한다고 장담했거늘. 두 분의 반응을 보아하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젊으니까 후회 남기지 말라는 차원에서 원 없이 해보라고 했던 것뿐인데…….”

“…….”

“믿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이제 마냥 애비 손바닥에서 노는 얼라가 아니야. 다 컸어, 이놈이.”

나를 보는 부모님의 눈동자가 복잡한 빛을 띠었다.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어쩐지 서운하고 쓸쓸해 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애비가 해준 것도 없는데……. 콩나물도 아니고, 뭘 먹고 이렇게 쑥쑥 컸는지 원…….”

아버지가 내 머리 위에 손을 턱 얹고 쓰다듬었다. 어릴 적에는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움켜쥘 수도 있을 만큼 커다랗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왠지 거꾸로 내가 감싸 쥘 수 있을 만큼 작고 연약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계약금은 얼마나 되냐? 아버지한테 맡기면 이자 붙여서…….”

“연습생은 그딴 거 없거든요? 그동안 세뱃돈 적립한 것부터 배당하시죠. 복리로 준다메?”

신세 진 사람들에게 사흘쯤 인사하러 다닌 뒤에, 짐 챙겨서 다시 남양주 기숙사로 향했다.

집에서 딱히 할 일이 있어야지. 비훈련 기간이라고 해서 빈둥거리고 놀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기왕에 훈련할 거라면 동네 운동장을 전전하는 것보다 제대로 된 구단 설비를 이용하는 게 나을 테고.

“어, 최태웅 군. 얘기는 들었네. 그때 바로 와서 도장 찍었다고? 앞으로 잘 부탁하네. 이제부터 선수니까, 편하게 불러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감독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비훈련 기간이라기에 구장이 텅텅 비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라운드를 도는 선수가 예닐곱이나 되었다. 실내 연습장에는 그보다 배는 많은 선수들이 티배팅이니 섀도 피칭이니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감독님. 비훈련 기간 아니었어요? 연습하러 나온 선수들이 많네요. 다들 본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텐데.”

“자네도 집에 안 있고 연습하러 나왔잖아. 비훈련 기간이라는 게 구단 주도 하에 단체훈련하는 걸 금지하는 거지, 개개인이 자율적으로 훈련하겠다는 걸 어떻게 말리겠어?”

그러고 보니까 몇 년 전에 선수협이랑 한바탕 시끄러운 적이 있었지. 마무리 훈련이니 전지훈련이니 스프링캠프니 다 치르면 몸이 남아나지 않으니까 휴식기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그런데 2군 선수는 승격하기 위해서 겨울에도 훈련하고 싶은데, 무조건 훈련금지라고 하면 구단의 지원을 못 받으니까 오히려 빈익빈 부익부가 된다고.

그래서 나온 타협책이 ‘자발적인 참여’였을 거다. 자발적으로 훈련하겠다고 나오는 선수만 구단에서 지원해주는 걸로.

“그런데 이거, 사단장이 내무실에 와서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하라고 하는 거랑 똑같은 것 같은데…….”

“응? 뭐라고 했나?”

“아, 아뇨. 혼잣말입니다.”

박승덕 감독님이 나타나자 선수들이 하나둘씩 꾸벅 인사를 했다. 오리 새끼처럼 졸졸졸 뒤따르는 나를 보고 ‘누구지?’ 하며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번에 새 식구가 된 최태웅이다. 투수고, 내가 알기로는 거의 막내일 거야. 너무 데리고 놀지 말고 잘 지내봐라.”

“안녕하십니까! 최태웅입니다!”

허리를 숙이면서 우렁차게 인사했더니, 자기 훈련에 매진해 있던 사람들도 이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몇몇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혹시 이 친구……. 걔 아닙니까? 저번 친선경기.”

“어? 잠깐만. 그러고 보니…….”

“진짜로 걔네? 사회인 야구 노히터!”

“우와, 진짜? 애가 걔야?”

“난리 났네, 난리 났어. 투수 TO 하나 줄어드는 거 아니야?”

대놓고 떫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란해하는 사람도 있고,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이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까지는 기억 못 하지만, 표정만 봐도 누가 그때 경기에 나온 선수들인지 알겠구만.

흔히 주워들은 것처럼, 경쟁자 늘어났다며 신경질적으로 견제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무슨 친목 동아리처럼 누가 살갑게 맞이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건성으로 인사 한두 마디씩 나누고서, 선수들은 자율 연습으로 돌아갔다.

그야 뭐, 툭툭 시비 거는 것보다야 낫지만……. 이런 분위기도 은근히 부담스러운데. 얼굴만 잠깐 비추고 사라지는 사람이 하도 많으니까 일일이 친해질 마음이 없다, 뭐 이런 느낌이잖아.

“나도 정신 차려야지.”

박승덕 감독님이 나를 직접 눈독 들였으니까 출장 기회가 보장된 편일 거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절대적으로 장담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 사람들이 다 비훈련 기간에 자율적으로 훈련하러 나온 거라면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다. 설렁설렁하다가 ‘괘씸죄’로 출장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면 무슨 꼴이야.

“감독님.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신참들이 다 그렇듯이, 구체적인 지시가 없으니까 뭘 하면 좋을지 몰라서 조금 막막했다. 낯도 설고 그런데, 갑자기 혼자 그라운드 나가서 뛰기도 뭐하잖아.

그런데 여기서 감독님의 반응이 또 묘했다. 살살 손짓해 선수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지더니, 애매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던 것이다.

“비훈련 기간이라고 했잖아. 저기 있는 사람들은 다 자기 마음대로 훈련하는 거야. 구단은 설비만 제공해줄 뿐이지. 나나 코치들이 지시를 하면 규정 위반이야.”

“……그러면 저, 그냥 가서 평소에 훈련하던 것처럼 하면 되나요? 혼자?”

“일단은 그렇지. 마침 코치진이 출근했을 때 개인적으로 물어보는 게 있으면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뭔가 좀 깐깐하시구만. 여기에 뭐, 강제로 훈련시키는 거냐, 자율적으로 훈련하는 거 맞느냐, 감시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1차선 도로에 자동차 한 대도 없는데 꿋꿋하게 신호등 기다렸다가 건너는 타입이신가?

“사실은 말이야. 나중에 단체훈련 때가 돼도 자네는 조금 특별대우를 해볼 생각이야.”

“특별대우요?”

“자네 훈련에는 일절 터치를 안 할 거야. 투구폼이 됐건, 변화구 그립이 됐건. 자네가 먼저 뭘 물어본다면 당연히 성심껏 지도해줄 테지만. 절대로 우리 쪽에서 뭔가 먼저 강요하는 일은 없을 거야.”

“……?”

내가 멍청해서 지금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어법인지 비유법인지, 누구라도 지금 감독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는 못할 테니까.

감독님이 묘하게 난감한 기색으로 웃었다.

“센스라고 불러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자네한테 뭔가 있다는 건 인정했어. 그런데 어떻게 타자를 잡아내는지는 아직도 모르겠거든. 자고로 잘 모르는 물건에는 함부로 손대는 게 아니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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