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45- >
045.
합동 트라이아웃의 3차 테스트는 사실 단순한 쇼케이스였다. 합격자끼리 경기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드는 선수에게 계약서를 내미는 것이다.
앞선 테스트도 그랬지만, 여기에는 이러면 붙고 저러면 떨어진다는 가이드라인 자체가 없었다.
홈런을 쳤어도 스카우트 눈에 뽀록으로 보였으면 외면받는다. 단순한 희생번트일 뿐이더라도 작전수행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여겨지면 뽑아 간다.
한 마디로, 모든 결과가 스카우트의 주관적인 평가에 달린 것이다.
관중석에는 다른 구단에서 나온 스카우트도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3개 구단이 뽑아 가고 남은 선수 중에 옥석이 없을까 기웃거려보는 것이다.
남의 트라이아웃에 빨대를 꽂는 셈이었지만, 특별한 제재는 없었다. 3개 구단도 다른 구단의 트라이아웃에 기웃거리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트라이아웃에서 즉시전력감을 기대하지는 않기에 베푸는 인심에 불과했지만.
1군 엔트리 턱걸이할 정도만 돼도 트라이아웃에서는 나름 월척으로 친다. 그래서 대부분 말단이 의무적으로 발걸음했을 뿐이지만…… 막상 현장에는 미묘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어? 안녕하십니까!”
“어이구, 어쩐 일로 여기까지 직접 오셨어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셨죠?”
스카우트들이 선글라스 좀 썼다고 강재황이나 박승덕을 못 알아볼 리는 만무하다. 알아보고 놀라서 인사를 건네는 한편, 다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눈독 들이는 선수라도 있으신가?’
‘여기까지 직접 행차를 다 하시고?’
박승덕은 내년에 2군 퓨처스 리그 입성이 확정된 토네이도즈의 감독이다. 2차 합격자쯤 되면 그럭저럭 2군에서 활약할 수도 있을 테니, 그가 여기에 스카우트 노릇을 하러 온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감독씩이나 되면서 노구(老驅)를 직접 움직였다는 게 의외일 뿐.
하지만 야인(野人)이자 토네이도즈 전(前) 감독인 강재황이 함께 있다면 얘기가 조금 달랐다. 그는 가끔 필이 꽂히면 라이벌 팀 선수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명색이 투수 조련사인데……. 그러면 투수려나?’
‘나 혼자서 이거 되려나?’
‘박 감독님이랑 같이 왔다면, 토네이도즈에서 침 발라볼 만한 선수라는 건데…….’
스카우트들 사이에는 그렇게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
공지한 시간이 되자, 직원들 몇 명이 우르르 나와서 선수들을 홍팀과 백팀으로 갈라놓았다.
“라인업은 이력서에 기입하신 포지션을 참고해서 편성했습니다. 스카우트분들의 요청에 따라서 교체 타이밍이 달라질 수 있고요.”
“경기 출장은 다 보장되는 겁니까? 사람이 좀 많은 것 같은데.”
“그야 물론입니다. 안 그러면 오늘 합격자분들이 모이는 의미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경기 자체를 12회로 진행합니다. 포수 이외에는 반드시 중간에 교체된다고 생각해주셔야 하고요.”
“포수는 왜요?”
“포수는 원래 자원이 적잖아요. 그래서 합격자 자체가 홍팀 백팀에 한 명씩밖에 없었습니다. 저쪽에서 투수분들 공 받아준 포수들은 다 구단 직원이에요.”
“아…….”
“특별히 뭐 다른 질문은 없으시죠? 궁금한 점이 생기면 더그아웃에 있는 직원에게 말씀해주시고. 어디까지나 테스트니까 부상당하지 않도록 유의해주시고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직원이 물러가자, 경기 준비로 그라운드가 잠시 부산스러워졌다. 나는 잠시 심호흡하면서 내가 속한 백팀 선수들을 빙 둘러보았다.
‘투수가 다 해서 6명이네. 그러면 한 사람당 2이닝씩 뛴다고 봐야 하나?’
이미 1, 2차 테스트로 구위를 점검한 뒤에 치르는 실전이라고 생각하면 썩 부족한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보통 투수들의 경우다.
내 구위만 보고서 높게 평가하는 스카우트는 있을 리 없었다. 기껏해야 오른팔로 전향한 지 얼마 안 됐다는 점에서 미래 가능성을 높게 쳐주는 정도겠지.
그러니 되도록 실전에서 인상을 남기고 싶었는데……. 2이닝밖에 안 된다면 설령 6타자를 모두 범퇴시킨다고 해도…….
“투수들! 잠깐만 모여봅시다! 사인 맞춰봐야 할 거 아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고 있는데 한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봤더니 키가 2미터는 될 것 같은 건장한 체구의 포수가 투수진 쪽에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내가 미트질은 그냥 그래도 블로킹은 기가 막히니까 공 던질 때 부담 없이 팍팍 뿌리쇼. 특별히 사인 많이 내췄으면 하는 공 있으면 미리 말씀하시고.”
포수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 아저씨도 붙임성 있게 투수진을 상대했다. 아니, 붙임성이 있다기보다는 호탕한 느낌이랄까? 포수 평가에서 투수에 대한 영향력은 빼놓을 수 없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는 포크랑 슬라이더 있습니다.”
“저는 커브랑 슬라이더요.”
“저는 체인지업이랑…….”
“오케이, 오케이. 한 명씩 말하쇼. 트라이아웃에서 사인 훔치고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심플하게 갑시다. 직구는 이거, 커브는 이거, 슬라이더는…….”
투수진과 포수가 사인 맞춰보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나는 기분이 살짝 어색해졌다.
생각해보면 나는 저렇게 포수와 세세하게 사인을 나눠본 적이 없구나. 피치아웃이나 번트 대비 같은 거라면 몰라도…… 포심 패스트볼밖에 없으니, 사인 교환 자체가 거의 불필요했지.
초등학교 때에는 포수인 찬희가 별다른 사인 없이 미트를 원하는 코스에 갖다 대는 것만으로 리드했다. 군대나 사회인 야구에서는 내 마음대로 던진 공을 포수가 따라가서 잡았고.
‘나중에 변화구 늘어나면 피곤하겠네. 공 하나 던질 때마다 언제 저러고 있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색하게 서성거리고 있으려니, 포수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자네는 뭐뭐 던지나? 특별히 신경 써줄 거 있고?”
“아뇨. 저는 포심이랑 체인지업만 있습니다. 제구는 괜찮은 편이니까 신경 쓰실 거 별로 없을 거예요.”
“직구랑 체인지업밖에 없다고? 무슨 쌀보리 게임이야? 이 친구, 패기가 아주 장군감인데!”
포수가 ‘으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비웃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감탄한 기색이라서 내가 다 괜히 멋쩍어질 지경이었다. 설마 만화 주인공 중에 직구만 던지는 100마일 투수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직구랑 체인지업 비율은 어느 정도로 섞어주면 되나? 그래도 역시 직구가 7할은 돼야…….”
“아 참. 그거 말인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포수의 말을 끊었다.
“어차피 직구랑 체인지업이면, 갑자기 뭐가 날아와도 잡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인 교환 같은 건 안 했으면 좋겠어요.”
“뭐라고?”
“솔직히 구위가 좀 애매해서요. 평소에도 볼 배합으로 먹고살았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쓰기에는 까다로운 패턴을 쓰거든요. 어차피 보고 잡아도 되는 공이니까, 사인 교환은 없이 그냥 제가 직접 배합했으면…….”
거기까지 말했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보다 한 뼘은 위에 달린 눈이 게슴츠레하게 나를 쏘아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거 봐. 자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예?”
“이거 실전 아니야. 트라이아웃이지. 자네한테만 테스트인 거 아니고, 나한테도 테스트라고. 알아?”
“……”
그게 뭐 어쨌다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종잡을 수 없어서 눈만 끔뻑거리려니, 거구의 포수가 조금 아니꼽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투수는 폼이나, 구속이나, 구질이나, 견제나, 제구력이나, 무브먼트나……. 이런 거 보고 평가하지?”
“예에. 뭐 그렇죠…….”
“그러면 포수는 뭘 볼 거 같나? 미트질이나, 도루저지나, 블로킹이나, 볼 배합 능력. 이런 게 포수 평가하는 포인트라고. 아나?”
“…….”
“실전에서야 아무나 볼 배합해도 되지. 그런데 여기서 볼 배합은 포수 평가항목이야. 자네는 투수라서 공만 좋으면 홈런 맞아도 상관없지만, 볼배합 문제로 얻어맞으면 나는 평가가 깎인다고. 알아듣나?”
……이게 그렇게 되는 거였나? 처음 듣는 소리라서 얼떨떨했으나, 일리가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러면 아저씨가 볼 배합하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라는 게 문제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요. 어쨌든 안 맞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제 공은 제가 더 잘 배합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좋은 결과 나오면 아저씨한테도 좋은 거…….”
“뭐가 어째?”
포수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산에서 곰하고 맞닥뜨린 듯한 기분에 나는 간담이 다 서늘해졌다.
“자네 말대로, 자네가 나보다 볼 배합 잘한다고 치면. 나는 자네한테 업혀서 스카우트 눈도장 받게 되는 건가? 덕분에 평가 올라갔으니까 고맙다고 자네한테 엎드려서 절하면 되는 거고?”
“아, 아뇨, 그건…….”
“헛소리하지 말고, 상식대로 해. 공만 좋으면 그만인 투수랑 볼 배합 잘못되면 평가 깎이는 포수. 둘 중에 어느 쪽이 볼 배합하는 게 맞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잠깐만요? 아저씨? 아저씨!”
나는 당황해서 포수 아저씨를 불렀지만, 더 이상 얘기할 수가 없었다. 백팀 선수들이 1회 수비를 위해 하나둘씩 그라운드로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생각도 못 해봤는데…….”
더그아웃에 남겨진 나는 난감해서 뒤통수를 긁었다.
저 포수 아저씨 말은 알아듣겠고, 공감도 한다. 이런 경우라면 포수가 볼 배합 하는 게 맞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투수의 경우지.
‘공만 좋으면’이라는 전제에 내가 안 속하는데…….
“플레이!”
얼떨떨해 있는 사이에 평가전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올라간 투수는 나와 달리 포수의 사인에 아무런 불만도 없어 보였다. 고개도 한 번 젓지 않고 모범생처럼 위력적인 공을 뿌려댔다.
따악! 따악! 퍼억!
“볼!” “아웃!” “스트라이크!” “세이프!”
때로는 아웃. 때로는 세이프.
나름대로 치열한 투타 대결이 벌어졌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라운드의 광경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눈치 봐가면서 던지는 수밖에 없으려나…….’
포수를 설득할 엄두는 안 나니, 결국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애초에 포수가 요구한 코스에 정확하게 공을 꽂아넣는 투수가 얼마나 된다고. 대충 요구한 코스에서 가장 가까운 쿨존에 쑤셔 넣으면 되겠지. 쿨존에 꽂아넣기만 하면 체인지업을 요구하든 직구를 요구하든 상관없으니까.
퍼억! 따악! 따악!
“세이프!” “세이프!” “스트라이크 아웃!”
경기는 한 이닝에 한두 점씩 나오는 적당한 타격전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기든 지든 상관없는 경기인 탓에, 타격전인데도 잠깐 한눈을 팔 때마다 이닝이 휙휙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최태웅 씨? 다음 이닝에 바로 등판하실게요. 준비하고 있어주세요.”
5회 초. 점수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7대 5로 뒤지는 상황에서 드디어 내 순서가 찾아왔다.
한바탕 투닥거린 것 때문인지. 포수는 나와 말도 섞지 않고 곧바로 홈 플레이트 뒤에 앉았다.
나도 살짝 부루퉁했지만, 포수가 요구한 코스를 보고는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오, 왠지 느낌이 좋은데.’
몸쪽 높은 코스. 가장 선명한 ‘파란색’ 코스에 포수의 미트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굳이 리드를 가지고 포수와 기싸움 할 필요도 없게 된다.
“스트라이크!”
마스크 때문에 표정은 안 보이지만, 포수 아저씨의 몸짓이 흡족한 것처럼 느껴졌다. 저 아저씨 입장에서는 내가 숙이고 들어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 그렇지.”
2구째의 주문은 바깥쪽 낮은 코스.
모범적인 볼 배합이지만, 문제가 있었다. 타자가 예측을 했는지, 핫존이 바깥쪽 코스에만 잔뜩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리드 좀 잘 하지. 쓸데없이 눈치 보이게 하네.”
웬만하면 제구 미스인 척 하겠는데, 포수가 요구한 코스와 쿨존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고민하지는 않았다. 포수의 사정을 봐주다가 내가 엿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아리랑 볼을 배합해서 결과를 내는 게 최태웅이라는 투수인데. 그 볼 배합 능력까지 포함한 것이 최태웅이라는 투수의 스펙인 건데.
나도 볼 배합을 남한테 맡기면, 평가가 깎이거든!
퍼억!
“스트라이크!”
정반대 코스로 날아오는 공에 흠칫하면서도 포수는 문제없이 잡아냈다. 시속 120km도 안 되는 직구였으니, 프로를 지망하는 포수라면 저 정도 재주는 당연히 보여줘야 할 일이다.
“…….”
마스크를 벗고 일어난 포수가 잠시 나를 험악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나는 시크하게 비웃으면서 그 눈빛을 똑바로 마주보…… 려고 했는데, 아저씨 인상이 너무 더러워서 못하겠다.
왜왜왜 뭐. 꼬우면 그냥 빠트려 보시지.
생각해보니 내가 갑(甲)인데, 괜히 고민했네.
지가 안 잡으면 어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