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44- >
044.
“오늘 하루, 고생하셨습니다. 2차 테스트 결과는 이메일과 문자로 개별 통보됩니다. 합격자분들이 참가하실 3차 테스트는 실전형 쇼케이스라고 보시면 됩니다. 주말까지 컨디션 관리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할 도리를 다했기에 딱히 아쉬운 점도 없었다. 괜히 무리하다가 폭투난 것도 없고, 2차 테스트에서는 내가 모든 투수 가운데 가장 깔끔하게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다.
결과보다는 대결 과정을 면접관들이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결과가 아주 반영되지 않는 건 아니겠지.
그럴 거야. 그래야 해. 인간적으로 내가 떨어질 정도라면 일반인 중에서는 합격자 낼 마음이 없다는 뜻 아니겠냐?
“엄마. 그런데 나 어릴 적에 말이야…….”
다른 데는 자꾸만 이력서가 빠꾸를 먹는 바람에 시간이 붕 떠버렸다. 평소 같은 페이스로 훈련했다가는 3차 테스트에 악영향을 줄지도 모르고.
그래서 오랜만에 집에서 뒹굴거리다 보니까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생겼다.
“팔꿈치 다쳤던 거. 병원비는 어떻게 했어?”
“갑자기 병원비는 왜?”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가지고. 지금 생각해보니까 사진도 찍고 검사도 이것저것하고, 병원비 꽤 많이 나왔을 것 같은데……. 그 시절에는 협회에서 치료비 지원해준다거나 하는 것도 없었잖아.”
“글쎄, 어떻게 했더라……. 하도 오래돼서…….”
느닷없는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엄마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일단은 보험금이 조금 나왔지? 너, 본격적으로 야구 하고서부터 스포츠 보험 들어놨으니까.”
“음.”
“그리고 박현성이? 너한테 방망이 맞춘 그 학생 집안에서도 병원비 얼마 보태줬고.”
“뭐?”
애당초 목구멍에 간질거리는 위화감 때문에 꺼낸 말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나는 놀라서 입이 다 벌어졌다.
“원래 다 그래? 가해자 쪽에서 치료비 내주고?”
“경기 중에 그런 건데 가해자는 또 뭐니. 그냥 도의적인 차원에서 조금 보태주는 거지. 그런 식이면 너도 상대 팀 애들 맞힌 적 있잖아.”
“……기억 안 납니다. 증거와 영장을 가져오세요. 변호사가 올 때까지 묵비권 행사하겠습니다.”
젯. 그걸 걸고넘어지면, 솔직히 완전무죄인 투수가 세상에 어디 있나. 일부러 노린 적은 한 번도 없고, 초등학교 때는 연식구를 쓰는지라 어지간히 잘못 맞지 않으면 큰 부상도 없다. 기껏해야 파스 정도지.
“왜? 왼팔 때문에 연습하는데 뭐가 잘 안 되니? 갑자기 그때 생각나고, 화가 나고 그래?”
“아니 뭐. 화가 난다고 할 것까지는 없는데…….”
잠시 부루퉁하게 있었더니 엄마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평생 가슴에 담아두는 일은 누구나 한두 가지씩 있어. 하지만 거기에 얽매이면 안 되는 거야. 다음에는 더 조심하겠다, 더 잘하겠다. 그런 식으로 진취적으로 담아둬야지. 남한테 원한 품고 사는 것도 정말 못할 짓이야. 그 애만 해도 너한테 얼마나 미안해했는데.”
“미안해했다고? 그놈이?”
“그럼. 걔네 부모님이 앞길이 구만리 같은 너 야구 인생 막아놨다고 얼마나 미안해했는데. 걔도 병문안 몇 번 와서는 고개를 못 들고 죄송하다고만 하더라. 아들내미 다치게 한 놈인데도 엄마 마음이 다 안 될 정도로.”
“…….”
훈훈한 분위기에 초 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그건 도저히 동의 못하겠다. 그게 어떻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의 태도야? 잠깐 빡쳐서 사람 불구 좀 만들었기로서니 어떻게 감히 나한테 짜증을 낼 수 있느냐는 사이코패스였는데.
“혹시 내가 어릴 때라서 기억 안 난다고 막 던지는 거 아닌가 몰라.”
내가 어제 본 박현성과는 도저히 매칭되지 않는 이야기라서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한 번씩 인터넷에 검색도 돌려봤지만, 도움이 될 만한 얘기는 없었다.
하기야. 초딩 하나가 선수생명 끝장난 게 뭐 대수라고 인터넷에 나오겠어. 그때 이름 좀 날렸다고 해도 초등야구 관련자들 사이에서나 그랬을 뿐인데.
“그런데 시발. 만약에 나 엘리펀츠에서밖에 안 부르면 어떡하지? 그 새끼 후배 되는 건가? 동갑이면 그런 거 상관없으려나?”
이번에는 박현성에 관해서 검색을 해보려고 하는데, 문자 메시지가 왔다. 뭔가 하고 열어본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벌떡 일어섰다.
[27번 최태웅 님. 2차 테스트에 합격하셨습니다.]
“그렇지! 당연히 이래야지!”
실전 피칭이라는 게 뭐냐? 얼마나 좋은 공을 던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결과를 잘 만들어내는지 보겠다는 거 아니겠어?
불펜에서는 강속구를 뻥뻥 쏴대면서, 실전 마운드에서는 볼넷 제조기나 배팅머신 소리를 듣는 투수가 세상에 어디 한둘인가. 그러니까 현역 프로를 셋씩이나 불러서 실전 형식으로 붙여본 거겠지.
가망이 없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렇다고 잘 되리라고 낙관하기에는 마음 속이 뭔가 허전했다.
한 마디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도 빨리 결과 발표가 나온 지라 들뜬 마음을…….
띠링.
“어? 또 뭐지?”
방에서 혼자 오두방정을 떨고 있는데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 추가 안내사항이라도 있나 싶어서 확인했더니, 이번에는 단체 채팅방의 메시지였다.
[‘날아오르라’ 경기일정 공지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거 정리해야 되는데.”
서류심사 단계에서 자꾸만 빠꾸를 먹어서 이쪽에는 미처 신경을 못 썼다. 애초에 트라이아웃 본다는 얘기 자체도 안 했고.
「그래? 주말경기 못나온다고?」
갑작스러운 나의 불참 통보에도 수재 형님은 그러려니 했다.
고작해야 사회인 야구. 투수가 경기 전에 며칠씩 몸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경기 당일에 갑자기 볼일이 생겨도 다른 사람이 마운드에 오르면 그만이다. 투수 볼 사람이 팀에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아예 팀에서 나와야 할지 모른다는 말에는 수재 형님도 조금 당혹스러워했다.
「트라이아웃? 프로 테스트를 본다고?」
“예. 2차 이미 통과했고요. 주말에 3차 테스트가 있어서 못 뛰는 거예요.”
「진짜로? 아니, 어, 음……. 추, 축하한다고 해야 하는 건가? 우와…….」
음, 이럴 줄 알았으면 프로 지망한다는 이야기를 진작 해둘 걸 그랬나?
이야기를 전해들은 다른 형들도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추억 만들기도 아니고, 진짜로 프로를 지망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모양이었다.
평일인데도 집 가까운 사람들 몇몇이 축하파티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시간을 냈다. 아직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닌데 무슨 호들갑인지 원.
“와, 그러면 진짜 프로 타자랑 붙어본 거야? 그래서 세 명을 다 잡았다고?”
“이 새끼, 본 사람 없다고 뻥카 치는 거 아냐?”
“에이, 왜 그래? 얘, 이래봬도 토네이도즈한테 노히트 딴 투수야?”
“토네이도즈는 프로가 아니잖아.”
“토네이도즈면 프로나 마찬가지지! 당장 내년에 퓨처스 합류하는데! 어차피 테스트에서 붙어봤다는 애들도 2군이라면서 뭘.”
당연한 얘기지만, 축하파티는 같이 밥 한 끼 먹으러 모일 구실에 불과했다. 축하는 무슨. 형들은 나를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하면서 이것저것 캐묻기에 바빴다.
게다가 ‘축하’라는 구실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칙칙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진짜로 프로될 생각이야? 밥 먹고 야구만 하겠다고?”
“아니 나는, 좀 더 신중히 생각하는 게 어떤가 싶기도 해서. 2부 리그쯤 되는 데서나 날고뛰는 거지……. 좀 미안한 말이지만, 프로에서 통할 만큼 공이 빠르고 그러지는 않잖아.”
“확실히 좀 그렇기는 하다. 2군은 어떨지 모르겠어도 1군에서 먹힐 만한 구속은 아니지.”
“솔직히 2군 붙박이 중에 보면, 프로로 성공 못 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지금까지 해온 게 야구밖에 없어서 미련처럼 붙어 있는 애들 많을 걸? 배운 게 야구밖에 없기도 하고, 최저연봉은 나오니까…….”
“진짜 어릴 때부터 야구만 해온 애들은 문득 정신 차리고 보면 빼도 박도 못하는 데까지 와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나는 네가 좀 허황된 길에 인생을 쏟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이것 참. 기분이 묘하구만.
진효 형이야 콩깍지가 씌었으니 말할 것도 없고. 사실 부모님도 이런 식으로 나의 성공 여부를 걱정해주지는 않았다. 돌아올 곳이 없도록 대학원서조차 안 넣겠다는 걸 용납하지 않았을 뿐이지.
“다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
“뭘 몰라?”
“저, 원래 왼손잡이잖아요. 그런데 테스트 볼 때는 오른손으로 던졌다고요. 본격적으로 연습한 지 꼴랑 몇 달밖에 안 되는 손으로.”
“……진짜?”
“사람이 좀 멀리 내다보고 할 줄을 알아야지. 지금 잠깐 눈앞에서 비리비리하다고 영영 쓸모없는 게 아니에요. 면접관들이 호구인가? 포텐셜! 응? 그만큼 장래성을 봤으니까 투자한 거 아니냐고요.”
“으음?”
“듣고 보니까 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사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저들처럼 걱정부터 하는 것이 당연하기는 했다.
‘믿는 구석’이 있기야 하지만, 남들이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겠나. 더군다나 내 공이 누가 봐도 프로급이라며 혀를 내두를 만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인 야구에서조차 ‘왜 저런 공으로 저만한 성적이 나오지?’라며 의문이나 사고 있지.
“그러면 우리 이거 태웅이 뜨기 전에 사인이라도 좀 받아놔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러네. 쟤, 나중에 뜨고 나면 왠지 우리 모르는 척 할 거 같아.”
“쟤가 무시하기 전에 우리 다 같이 인증샷이라도 한 번 찍어놔야 되는 거 아니야?”
괜한 오지랖이기야 했지만, 악의는 아니기에 딱히 기분이 나쁠 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무를 만한 결정은 아니라는 걸 느껴서인지 형들도 금세 웃으면서 덕담을 한마디씩 던졌다.
“말 나온 김에 야. 태웅아, 내 차 트렁크에 공 한 박스 있거든? 그거 좀 가져와라. 편의점에서 네임펜도 하나 사오고. 사인볼 좀 돌리자.”
“……제가 사인할 공을, 제가 가지러 가야 돼요?”
“그럼 이 나이에, 우리가 가리? 고기값 너도 낼래? 오늘 먹은 거 다들 뿜빠이 할까?”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치사하게시리 인간들이. 먹는 거 가지고. 내가 모이자고 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이 새끼 글씨 되게 못 쓰네? 이게 사인이냐? 발로 해도 이거보다는 낫겠다.”
“나중에 연습할 거니까 대충 가져가요! 나중에나 메이저리그라도 가면 이런 게 훨씬 희소성 있어져요.”
“야! 여기다 내 이름을 쓰면 어떡해?”
“……그게 왜요?”
“내 이름을 써놓으면 나중에 팔 수가 없잖아! 빨리, 내 이름 빼고 다시 사인해.”
“…….”
***
일요일.
공지한 시간까지 2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잠실구장에 참가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본가가 지방이라서 아예 어제 올라와 숙소를 잡았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유롭게 몸 풀면서 마음을 추스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직원들은 그보다도 빨리 나와서 영상장비 체크나 그라운드 정비를 했다. 각 구단의 스카우트들도 일찍 나와서 합격자들의 데이터를 미리 한 번씩 더 검토하고 있었다.
“어? 최태웅이? 이 친구 붙었었네.”
“최태웅? 그 오른팔 전향? 2단 체인지업?”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강충식은 찔끔했다.
“합격자 다음 날에 바로 나왔잖아. 그런데 그걸 이제 봤어?”
“일반인 참가잖아요. 그래서 신경 자체를 안 썼죠.”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나도 보고서 그냥 신기하다고 잠깐 생각하고 말았거든.”
“뭐가 신기해요?”
“나 점수 별로 안 줬거든. 그런데 붙었길래 너나 충식이 형이 얼마나 준 건가, 싶었지.”
“어, 나도 점수 별로 안 줬는데? 그럼 충식이 형이 점수 왕창 몰아준 거예요?”
두 스카우트의 시선이 강충식에게로 향했다.
강충식은 서류를 살피는 척하면서 뻔뻔스럽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냐. 나, 그 친구처럼 벼락치기로 넘어가 보려는 타입 싫어하는 거 알잖아.”
“하긴, 그것도 그렇죠.”
“우리야 점수만 매기지, 점수대로 합격자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팀장급 중에 누가 뽑았나 보지. 이력서만 보면 꽤 맛깔나게 보일 수도 있잖아. 실제로 삼자 범퇴도 시켰고.”
둘러댄 말에 설득력이 있었는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충식은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내심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적으로야 형 동생 하는 사이지만, 공적으로는 경쟁업체의 직원이다. 고작 비선출 투수일 뿐이지만, 자신만 눈치챈 일을 일부러 말해줄 필요까지는 없었다.
‘박 감독님이랑 강 감독님이 눈독 들이는 것 같아서 일단 침 바르고 봤다는 소리를 어떻게 해?’
그리고 사실 레전드급 감독 둘이 최태웅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헛다리일지도 몰랐다. 사적으로 얘기 나누는 모습을 본 것도 아니고. 단지, 프로 계약을 제안한 것도 아니니 헛다리짚은 것이라도 별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헛다리가 아닐 가능성도 커졌고.’
강충식이 곁눈질로 저 멀리 관중석 쪽을 힐끗 보았다.
그곳에는 선글라스를 낀 노인 둘이 괜찮은 자리를 찾아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