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39화 (39/90)

< 괴물 배터리 -039- >

039.

[우측 담장! 우측 담장! 우측 담장!]

[우익수! 우익수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잡아냈습니다! 경기 종료! 이로써 가을야구를 향한 샤크즈의 염원은 내년으로 미뤄졌습니다!]

프로야구 12개 팀이 저마다 매직 넘버나 트래직 넘버를 줄여나가는 시기. 저 둘을 동시에 줄여나가던 샤크즈의 행진이 정규 시즌을 5경기 남겨놓고 멈춰섰다.

만년 꼴찌던 샤크즈 팬들로서는 좋은 의미에서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는 한 해였다. 물론, 선수들 입장에서는 피가 바작바작 마르는 한 해였지만.

“허, 다행이다. 박진효 저 시키 때문에 쓸데없이 가슴만 졸였잖아.”

“……저요? 제가 왜요?”

작년보다 월등한 성적이라지만, 결국은 트래직 넘버 0을 찍은 날이다. 시무룩해서 짐을 챙기던 박진효는 1선발인 한건우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왜는 뭐가 왜야? 니가 그저께 역전 홈런만 안 때렸으면 진작 깔끔하게 탈락했을 거 아냐.”

“그게 잘한 거지, 뭐가 문젭니까?”

“문제지. 나, 오키나와에 가족들이랑 온천여행 예약해놨단 말이야. 혹시 포시 붙어서 파토나는 줄 알고 쫄았잖아.”

“…….”

이게 과연 한 팀의 에이스 입에서 나와도 되는 소리란 말인가. 박진효는 저도 모르게 하늘을 우러러보았고, 주위의 선수들도 기막힌 듯이 쏘아붙였다.

“애한테 좋은 거 가르친다. 그게 할 소리냐, 새꺄?”

“애라니? 이렇게 시커멓게 가슴에 털난 애가 어딨어? 낼 모레면 서른이 다 돼가는데.”

“주접도 가지가지 떤다. 못해도 앞으로 3연승은 더 했어야 하는데, 그게 됐겠냐?”

“시끄러워, 새끼들아. 니들이 그러니까 우승 반지를 여태 못 끼우는 거야.”

고참급 선수들이 뒤섞여서 티격태격하고 있지만, 딱히 날이 섰다거나 신랄한 기색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중학생 꼬맹이들끼리 농담 따먹기를 하며 킬킬거리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한동안 투닥거리던 한건우가 비장한 표정으로 후배들 쪽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건 내가 선배라기보다 더 오래된 경험자로서 해주는 말인데 말이야. 니들 올해 겨울에 실컷 못 놀아두면 존나 후회할 거다.”

“……그건 또 왜요?”

“우리가 전력이 붙었잖아? 그러니까 큰 문제만 없으면 내년에도 포시 싸움쯤은 그럭저럭 할 거란 말이야. 그렇지?”

“뭐, 그렇겠죠.”

“봐봐. 우리가 최근 4년 동안 땅굴만 팠어. 그래서 포시에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지금은 팬들이 마냥 욕하지는 않는다고. 내년 기약하자면서 격려하고 응원하지.”

“예에……. 그것도 그렇죠.”

“그러니까! 올해가 마지막 자유인 거야!”

다들 뭔가 떨떠름해하는 가운데, 한건우가 장엄한 기백으로 무릎을 쳤다.

“내년부터 포시 떨어지고 가을에 놀러 다녀봐. 팬들한테 얼굴 팔리면 SNS에 뭐에 아주 그냥 난리가 날 거다. 이렇게 뺀질거리고 놀러 다니니까 탈락하는 거라면서. 시즌 끝나고 노는 게 죄도 아닌데!”

“……우리가 포시 탈락하는 건 아예 전제입니까?”

“아니 뭐, 그건 아닌데. 어차피 가을야구 들어가면 못 노니까. 노는 게 남는 거야. 똑같이 돈 받는데 우리는 일을 덜 하는 거잖아. 완전 개이득.”

“똑같긴 뭐가 똑같아요? 우승하면 수당도 나오고 보너스도 나오고 그러지.”

“우승 보너스라……. 훗, 오래 전에 일확천금의 보물이 있었다는 도시전설을 들어는 보았지…….”

몇몇이 쿵짝 맞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또 다른 몇몇이 ‘잘들 논다.’ 라는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쯔쯔쯔 혀를 차는 정도지, 정색하고 못마땅해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볼 때 우리가 우승하려면 한건우 저 새끼부터 갖다 팔아야 돼.”

“헐……. 세상에 1선발 에이스를 이렇게 괄시하는 팀이 또 어디 있어? 그래도 명색이 4년 연속 10승 투수인데, 나가면 뭐 뜯어먹고 살려고?”

“10승이 문제가 아냐. 너 뺀질거리는 것 때문에 팀에 자율훈련하는 분위기가 안 생기잖아, 아무리해도.”

“형도 참. 그게 왜 내 탓입니까? 재능 없으면 알아서 남보다 더 굴러야지. 미성년자도 아니고, 언제까지 입에 떠먹여 줘요?”

“…….”

박진효는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자기 짐만 챙겨 더그아웃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데까지 오자 억지로 눌러 삼키고 있던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 돼지 같은 것들.”

여기서 나온 돼지는 ‘뚱보’가 아니라 ‘게으른 가축’이라는 의미의 멸칭이었다.

뭐가 어째? 올해가 마지막 자유?

농담으로 한 소리라는 것은 당연히 안다. 하지만 고배를 마신 당일에 저따위 농담이나 하는 분위기가 허용된다는 사실 자체가 프로로서 문제였다.

‘제까짓 게 재능은 무슨.’

겉으로 보이는 한건우의 재능은 분명히 대단했다.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패스트볼. 20-80 스케일에서 60점을 받고 있는 고속 슬라이더. 지옥에서라도 데리고 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

하지만 그 피지컬로 찍은 기록이래봐야 3.12의 평균자책점과 매년 턱걸이로 따내는 10승 남짓이다.

물론, 야구계에서 ‘겨우 3.12’이나 ‘겨우 10승’이라는 소리를 하고 다녔다간 따귀 맞기 좋다는 것쯤이야 안다.

그래도 이미 태양을 봐버린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매번 6이닝이나 간신히 채우고, 시즌 후반만 되면 헐떡거리는 돼지 따위. 저 피지컬로 저거밖에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 따름이었다.

‘태웅이가 저 피지컬을 갖고 우리 팀에 있었어봐. 고삐리만도 못한 직구 하나로 그렇게 사람 숨이 턱턱 막히게 하는데. 포스트 시즌이 문제야? 우리랑 붙는 팀마다 복불복 하는 기분에 피가 바작바작 마르게 될 텐데.’

박진효도 대다수 야구 선수들이 그렇듯이 초등학생 때에나 겨우 신동 소리를 들었던 몸이다. 모자란 피지컬을 타격감으로 커버한 케이스라, 한건우 같은 피지컬 괴물 타입을 보면 알게 모르게 속이 끓었다.

***

“그러고 보니까 울해 진효도 수고가 참 많았네. 중간에 쉬는 것도 하나 없었고. 힘들었지?”

“아닙니다. 할 만했습니다.”

“특별히 전 경기 출전이나…… 이런 기록 노리나?”

다음 날.

일찌감치 그라운드에 나와서 몸을 풀려는 박진효에게 감독이 직접 다가와 말했다. 시즌도 막바지고 하니까 그냥저냥 인사 한 마디씩 하는 줄 알았던 박진효는 살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특별히 신경은 안 쓰는데……. 왜 그러십니까?”

“오늘 보니까 재형이 몸 움직이는 게 팔팔하잖아. 자리 좀 바꿔서 돌려보려고 그러지.”

이제 남은 것은 순위와 관계없는 잔여경기다. 이럴 때에는 보통 시즌 내내 애쓴 주전보다 백업 멤버들 위주로 기용하며 테스트를 해보기 마련이다.

박진효도 백업으로 보낸 시간이 길기에 이런 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았다. 다만 의아한 것은…….

“재형이는 서드로 키우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냥 뭐 겸사겸사지. 자리야 옆으로 좀 짜면 나오는 거고, 포지션 레파토리 좀 늘려보고 싶은 애도 있고.”

“…….”

미심쩍어하는 시선을 느꼈는지 감독이 갑자기 쓴웃음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쯤 되면 다들 퍼질 때 됐어. 하나도 안 이상하고, 할 만큼 했어. 기록은 평생 남는다는 말도 몰라? 이럴 때 괜히 짜투리 게임 몇 개 뛰다가 3할 말아먹으면 너만 손해야. 이해하지?”

“감독님…….”

박진효는 그제야 알아듣고 안색을 굳혔다. 즉, 감독은 가까스로 3할에 턱걸이하고 있는 자신의 타율을 관리해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목소리를 낼 만한 짬이 아니라거나, 애초에 자기 의견을 물어보는 게 아닌 듯 했다거나, 백업 선수에게는 귀중한 기회라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한편으로 수많은 합리화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박진효는 장비를 챙겨서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디 벤치에 늘어져서 쉬기만 하지도 않았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그는 실내 연습장에서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따악! 따악! 따악!

첫 풀타임 시즌이었던 작년에 비한다면 올해의 타격은 여러모로 위축되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3할 근처는 나온 데다가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말도 있는지라 크게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순히 각 구단에서 박진효라는 타자에 대한 정보를 많이 획득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코치진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지만, 박진효는 자신의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했었는지 모르겠어…….’

최태웅이 던지는 배팅볼은 신기할 정도로 사각지대만을 푹푹 찌르고 들어왔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때릴 만한 스피드였던지라, 답답한 와중에도 꾸역꾸역 날려 보냈다.

조금 웃기게 표현하자면 10배 중력 속에서 수련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 감각을 어떻게든 몸에 새기려고 끙끙거렸더니, 다른 투수의 공들은 휘두르는 족족 방망이에 맞아 나갔다.

그 감각의 관성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새삼 한계가 느껴졌다. 마치 잠에서 깨면 꿈 내용이 흐릿해지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걔는 트라이아웃 준비 잘 돼가나…….”

왠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기분이라 땀을 닦으면서 앉았더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애초에 최태웅에게 야구 바람을 불어 넣은 것은 자신이었다. 트라이아웃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에도, 응원한다고야 했지만 마음이 미묘했다. 설마 대학 진학까지 미루고 대뜸 올해 안에 프로가 되겠다고 선언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다음 날 아침, 박진효는 어차피 라인업에서도 빠진 김에 최태웅이 매일 훈련하는 운동장에 들러 보았다. 약속 없이 반쯤은 마실 기분으로 나온 거였는데, 운 좋게도 한쪽 구석에서 피칭 중인 최태웅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헤이, 싸부! 훈련은 잘 돼가…….”

파앙!

“…….”

파앙!

고무로 된 표적판에 묵직한 공이 날아가 박힌다. 야외인데도 요란하게 울리는 고무판 소리에 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벌써 이렇게 빨라졌어?’

사실 프로 선수인 박진효가 감탄할 만한 스피드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수준 있는 고교 야구부의 후보 선수 정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공을 던지는 팔이 오른쪽이라는 점이었다.

‘이거 거의 왼팔로 던지던 수준인데?’

투수가 반대팔로 전향할 때, 그나마 따라잡기 쉬운 부분이 구속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근력으로 커버되는 영역이 크기 때문이다.

“어, 진효 형?”

잠시 숨 돌리듯이 스트레칭하던 최태웅이 먼저 이쪽을 발견하곤 놀란 눈을 했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여길 다 오고? 짤렸어?”

“짤리기는, 마. 세상에 3할 타자 짜르는 미친 구단 본 적 있어? 수고했다고 하루 휴가 받은 거지.”

“맞다. 형 타율 3할 턱걸이였지? 보나 마나 타율 관리하려고 빠진 거지 뭘.”

“…….”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 으스스할 정도로 정곡을 푹 찔러온다. 부정하기도 긍정하기도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라 박진효의 볼살이 어색하게 경련했다.

“그, 그나저나 아까 보니까 구속 많이 늘었더라.”

“구속이 붙으면 뭐해, 제구가 돼야지.”

“표적판에 쏘는 거 보니까 잘 들어가던데 뭘. 사실은 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 세상에 너처럼 9분할될 정도로 속도 줄여서 던지는 사람도 없어. 까놓고 말해서 프로 중에도 위아래나 좌우만 구분하는 투수가 얼마나 많은데.”

“그거야 나는……. 아, 아니다.”

최태웅이 무심코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박진효는 의아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싱긋 웃어 보였다.

“아무튼 다행이다. 빠른 데는 이번 주쯤부터 트라이아웃 모집할지도 모르는데, 타이밍 맞게 구속 잘 끌어올린 모양이라서…….”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 가슴에 손을 얹고?”

최태웅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느 때처럼 뚱한 말투일 뿐인데도 목소리에서 묘한 한기가 느껴진다. 반사적으로 대답하려 던 박진효는 말문이 막혀서 잠시 침묵했다.

“……지금 상태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경력까지 같이 어필하면 임팩트가 있을 거야.”

“경력? 내가 무슨 경력이 있다고? 끽해 봐야 초딩 때 전국체전이랑…….”

“그래, 그거. 그거밖에 경력이 없다는 거.”

박진효는 팔짱을 끼고서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성인된 다음에 오른팔로 전향해서, 벌써 지금처럼 던지게 됐다는 거. 어차피 이력서에 들어가는 내용이라도 계속 떠들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알아들을 때까지.”

“…….”

비죽거리던 최태웅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도 이런 식으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력서에 뭔가 더할 거 없는지만 찾았는데,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경력이 없는 게 오히려 임팩트라…….”

제법 그럴싸하게 느껴졌는지 최태웅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웬일로 형이 이렇게 쓸모 있는 소리를 다 해? 나는 다른 쪽으로 임팩트 줄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쪽?”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형 마침 잘 왔네. 안 그래도 시험해보고 싶은 참이었는데.”

의기양양한 얼굴로 씨익 웃으면서, 최태웅은 왼손에 글러브를 끼었다.

“오랜만에 한 판 붙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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