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38- >
038.
까앙!
“빠졌다! 뛰어, 뛰어!”
“아웃!”
3회쯤 되었더니, 새로운 특성인 ‘철벽 내야’에 관해서 그럭저럭 감이 오기 시작했다.
탈삼진이 하나, 뜬공이 둘. 땅볼이 여섯… 아니, 내야를 뚫는 안타 2개도 땅볼에 포함하면 여덟인가?
확실히 평소보다 땅볼 비중이 늘어났다.
그렇다고 ‘우와!’하고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타구가 땅볼이 될 확률’이 늘어난 정도지.
‘어쨌든 방망이에 맞아야 타구가 되니까, 아예 헛스윙을 해버리면 두 번째 특성은 의미가 없네.’
내가 생각하기에는 ‘확률’이라는 표현이 관건이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타구를 우격다짐으로 땅볼이 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닌 셈이었다.
‘이건 좀 고렙 때나 쓸 만한 특성이네.’
이 특성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일단 내야 수비가 받쳐줘야 했다. 땅볼 타구가 야수 근처로 향할 확률이 소폭 상승하면 뭐하나. 내야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팀이라면 오히려 독이 되게 생겼는데.
“입단 테스트에는 도움 안 돼도, 프로 시합에서는 쓸만하겠네. 투구수 절약하기에도……. 응?”
벤치에서 땀을 식히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눈이 번쩍 뜨였던 것이다.
“투구수 절약?”
확실히 그렇지. 맞혀서 잡으면 그만큼 투구수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땅볼이 많으면 그만큼 병살 확률도 올라가고, 이닝도 오래 소화할 수가 있다. 경기 시간이 빨라지는 것쯤이야 덤이고.
‘일부러 타자가 맞히기 쉽게 주면 어떻게 되지?’
보통의 투수라면 일부러 얻어맞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타자가 ‘내가 노린 공이 아니야.’하고 흘려보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타자가 집중하는 코스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실제로 배팅볼 훈련 때는 일부러 핫존에 던져서 타자들의 타격감을 끌어올려 주기도 했고.
‘핫존’에 던졌으니까 안타가 될까?
‘철벽 내야’의 특성대로 땅볼 아웃이 될까?
“……이게 무슨 한국 시리즈도 아니고. 궁금하면 직접 해보면 되지.”
흥미로운 아이디어 하나를 건진 나는 들뜬 얼굴로 마운드에 올라갔다. 근소한 점수 차이인지라 상대 타자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기백이 상당했다.
까앙! 까앙!
“뛰어! 뛰어! 뛰어!”
일단 내 예상은 절반쯤 맞았다.
타자가 잔뜩 벼르는 코스(핫존)에 직구를 넣어줬더니, 득달같이 방망이를 휘둘러댔던 것이다.
하지만…….
“계속 뛰어! 빠졌어! 빠졌어! 계속 가!”
“세이프!”
2루 베이스 근처에서 일어난 흙먼지가 바람을 타고 날려서 야수들이 일제히 콜록거렸다. 덕분에 나는 눈살 찌푸리는 표정을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교집합이 또 있었구나. 참내.”
정답은 3번.
땅볼이지만 내야를 뚫는 안타.
하기야, 땅볼이 무조건 아웃이 되리라는 법은 없지. ‘모든’ 땅볼이 야수 근처로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 야수 정면이라고 다 쉽게 잡아내는 것도 아니니까. 그 이전에 모든 타구가 땅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아웃!”
“쓰리 아웃! 체인지!”
일단 평소 같은 피칭으로 후속 타자를 돌려세운 나는 벤치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했다.
‘다른 방법은 없으려나?’
원한 건 아니라지만 비싼 포인트와 맞바꿔서 생겨난 특성인데. ‘양손잡이’를 놓친 게 억울해서라도 이 특성은 국물까지 우려내서 사용해줘야겠다.
지금 이대로라면 평범하게 땅볼 아웃의 확률이 늘어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만 해도 물론 엄청나지만, 내 성에는 차지 않았다.
‘철벽 내야’로 투구수를 줄이려면 상대가 방망이를 휘두르고 싶어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핫존에 공을 던지면 평범하게 안타가 된다.
‘……만약 쿨존에 일부러 느린 공을 던지면?’
이번에는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쿨존’은 다시 말해서 의식의 ‘사각(死角)’.
사각지대에 공이 날아오면 대다수 타자는 허를 찔려서 멀뚱히 지켜보고 만다.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휘두르지만, 여기서 타자의 실력과 운에 따라 ‘헛스윙’이 될지 ‘타격’이 될지가 갈린다.
경험에 따르면, 내 공을 잘 때리는 타자는 대개 배트 스피드나 반사신경이 좋았다. 단순히 신체 능력이 뛰어나서 허를 찔리고도 대응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 공이 빨라지면 헛스윙이 늘어나겠지.
반대로 지금보다 느려지면 컨택이 늘어날 테고.
“쓰리 아웃! 체인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5회 마운드에 오르는 나와 달리, 상대 타자에게서는 명백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실제로야 시간 여유가 있지만, 보통 사회인 야구에서 5회는 후반 중의 후반이다. 그새 또 점수 차이가 벌어져 압박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내 공은 항상 허를 찌르는 코스로만 날아가는데, 머릿속이 복잡하기까지.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사냥감이자 실험체인 셈이었다.
퍼억!
“스트라이크!”
몸쪽… 딱히 날카로울 것도 없는 코스로 날아온 직구에 타자가 화들짝 놀랐다. 감전돼서 경련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격렬한 몸짓이었다.
“……뭐야, 저거?”
“잘못 본 거 아니지? 확 느렸지?”
“변화구였나? 제대로 못 봐가지고…….”
“체인지업 같은데?”
양 벤치에서도 순간적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토당토않게 느린 공 하나가 쑥 들어왔으니 일단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체인지업은 무슨. 그거야 빠른 공이랑 느린 공을 똑같은 폼으로 던져서 타자 속이는 거지. 그런 고난도 스킬을 무슨 재주로 하루아침에 뚝딱 써먹겠냐.
“스트라이크!”
“……!”
하지만 혼란스러워하던 타자의 눈빛은 2구째를 보고 나서 싹 바뀌었다. 폼에서 힘이 빠진 걸 보고, 이게 체인지업 따위가 아니라 그냥 느리게 던진 공이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나, 이런 씹새끼가. 누굴…….”
잠시 배터박스에서 나온 타자가 씨근덕거리면서 홈 플레이트 주위를 빙빙 돌았다.
뭐뭐뭐. 노려보면 어쩔 건데? 내가 뭐 죄라도 지었냐?
꼭 있더라. 마음에 안 드는 공 오면 시비 걸 듯 인상 쓰는 사람이. 까놓고 말해서 똥볼 던져줬으면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정 꼬우면………… 스포츠맨답게 평화적으로 해결해야죠. 팔뚝에 문신이 멋지시네요, 형님. 비싼 데서 하셨나 보네.
까앙!
“……아웃!”
타자가 세 번째 공을 힘껏 때렸으나, 타구는 바닥을 난폭하게 찧고서 2루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내 저의를 단단히 오해한 모양인지, 상대 팀 선수들의 표정이 묘하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까앙!
“빠졌다! 빠졌다!”
“세이프!”
특별한 구질이 아니란 걸 안 후속 타자는 비리비리한 공에 곧바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빠른 타구가 유격수와 3루수 사이로 빠져나가자, 난 가볍게 혀를 찼다.
“이것도 쉽게 되는 건 아니구만…….”
하기야 ‘매의 눈’이라고 용가리 통뼈가 아니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았다. 아무리 약점 코스라지만, 보고도 칠 수 있을 정도의 공으로 쉽게 아웃 카운트를 따게 해주지는 않으려는가 보다.
그럼 어쩐다?
빠른 공을 던지면 타자가 움찔거리느라 쉽게 휘두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느린 공을 던지면 쿨존이라도 그대로 안타가 나오고.
그렇다면…….
까앙! 까앙!
“아웃!”
“아웃!”
국이 짜면 물을 더 부으면 되지.
조금 더 빠른 공을 쿨존에 뿌렸더니, 이번에는 후속 타자들이 각각 2구와 초구를 치고 쉽게 나가떨어졌다.
내 아이디어가 통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덕분에 6회 마운드에 오르는 내 발걸음은 강아지처럼 살랑거리기까지 했다.
까앙! 까앙! 까앙!
“아웃!”
“아웃!”
“아웃!”
적당히 휘두르고 싶어질 만한 공을 쿨존에 꽂는다─ 라는 내 생각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기가 막히게도 이번 이닝은 아예 공 3개로 삼자범퇴를 시켰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빡친 상대 투수가 팀원들에게 씩씩거리는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6회까지 42구라……. 매덕스 뺨다구를 좌우 왕복으로 때리게 생겼네, 아주 그냥.”
애초에 난 투구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상대의 약점 코스가 훤히 보이는지라 빼는 공을 던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 위주로만 던졌더니 볼넷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 됐고.
그러다 보니, 신경 안 쓰고 던진 초반 3이닝도 투구수는 많지 않았다. 거기에 마지막 3구 삼자범퇴까지 곁들였더니 6이닝 42구라는 호러급 기록이 나온 것이다.
다만, ‘적당히 휘두르고 싶어질 만한 공’의 기준이 문제네. 어느 타자한테는 120km일 수도 있고, 어느 타자한테는 140km일 수도 있는 법이니까.
“쓰리 아웃! 체인지!”
그늘에서 한참 동안 땀을 식히고 일어났더니, 우리 팀 점수판의 숫자가 3에서 7로 변해 있었다. 내가 한 이닝만 더 틀어막으면 콜드 게임 요건이 성립하는 것이다.
앉아서 쉴 틈도 없게 한다고 투수가 씩씩거리더니만, 기어이 집중력이 끊어진 모양이다. 중간에 투수교체까지 하고도 이미 기울어진 흐름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자자자, 끝내자! 3개 남았다!”
“최태웅! 파이팅!”
팀원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콜드 게임에 마침표를 찍고자 마운드에 섰다. 처음부터 승패에 신경을 안 쓴 게임인지라 승리를 앞두고도 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대 타자의 표정이 아까와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이었지만, 그래서 뭐? 이제 와서 콜드 게임에 흠집을 내기란 무리라고……
까앙! 까앙! 까앙!
“파울!”
“파울!”
“파울!”
……어라?
3구가 파울 존으로 굴러가는 순간, 내 눈살이 찌푸려졌다. 야수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 모양이지만, 투구수 아끼는 연습 중인 나는 곧바로 위화감을 느꼈다.
까앙! 까앙!
“파울!”
“파울!”
“아니, 이 아저씨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타자가 일부러 자꾸 커트만 한다는 걸 모를 리는 없었다. 3구쯤 계속되자, 우리 야수들도 낌새를 느꼈는지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콜드 게임이 코앞인데, 이게 뭔 꼬장이람.
설마 이제 와서 나를 강판시키려는 건 아닐 테고.
이미 겨울 똥파리처럼 비리비리한 공을 주고 있는데, 노리는 공이 올 때까지 커트하는 건 더더욱 아니겠지.
“또 이런 약점이 있었네…….”
휘두르고 싶어질 만한 공을 던져주는 만큼, 배트로 공을 맞히기는 쉽다. 타자가 안타 칠 생각 없이 파울만 남발하면 나만 힘을 빼는 꼴이 된다.
그 사실을 깨달았더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이렇게 전력투구를 하면 그만이지만서도.
투구수를 줄이는 의미는 많이 퇴색된다.
다시 생각해보니, 프로에서 노리고 쓸 만한 수법은 또 아닌 것 같네. 쿨존에다가 전력투구를 해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국에, 휘두르고 싶어질 만한 공을 준다?
‘이거 제대로 써먹으려면, 땅볼 유도할 만한 변화구 하나 연습해야겠는데…….’
우완으로 전향하고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사실은 바로 변화구였다. 아무래도 쓰는 손이 아니라서 그런지 스핀을 먹이는 감각이 영 어색했던 것이다. 구속이나 제구는 폼으로 어떻게든 커버가 되는데 말이지.
원래는 어정쩡한 버릇이 붙지 않도록 ‘양손잡이’가 된 뒤부터 연습하려고 했다. 그런데 뒤통수를 맞는 바람에 어영부영 여기까지 온 거고.
‘맞혀 잡는 공 중에 손끝 감각이 덜 중요한 변화구가 뭐가 있으려나…….’
덤덤하게 생각하면서, 나는 마지막 타자 상대로 천천히 와인드업을 했다.
***
‘날아오르라’ 7 : 0 ‘호랑이 기운’
7회 콜드게임
승리투수 최태웅 (완봉)
결승점 이기훈 (1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