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37- >
037.
“염증이 신경을 압박하는 상태입니다. 이때까지 통증은 없으셨고요?”
“네. 통증이라기보다는, 평범하게 운동한 뒤에 묵직하거나 근육이 땅긴다거나…… 그 정도 느낌이었는데요.”
“상당히 희귀한 케이스네요. 보통은 이 정도 상황이 되면 통증이 엄청날 텐데, 압박되는 신경에 따라서 반대로 아예 일시적인 마비 증상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우의 수로 따지자면 쉰에 하나 정도지만요.”
“심각한 건가요?”
“신경 압박이 계속되면 손상이 올 수도 있어요. 한 번 불었던 풍선은 쪼그라들어도 완전히 원래 모습으로는 안 돌아오죠? 환자분의 팔 상태가 그래요. 그래서 염증이 앞으로도 동일한 위치에 재발할 거고요. 염증만 가라앉으면 당장 완력을 쓰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게 오히려 문제입니다. 계속 과격한 운동을 하면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올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왼팔로 무리하지 말라는 말씀이신지…….”
“그렇죠. 야구처럼 무리한 운동은 절대로 금물입니다. 원래 인체공학적으로 ‘공을 던진다’라는 행위가 사람한테 걸맞은 움직임이 아니에요.”
좌완투수 최태웅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의사의 말에도 뜻밖에 큰 충격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올 것이 왔구나.’ 라는 느낌 정도?
선수 생활 쫑났다는 팔로 도대체 지금까지 몇 경기를 던졌는데. 상식적으로 이제 슬슬 터질 때도 됐지. 오히려 잘 버텨줬다고 칭찬을 해줘도 모자란 판국이었다.
혹시 ‘선택 불가’였던 이유가 이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당연히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이 초능력이 불친절했던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어야지. 이 초능력만 믿고 설치다가는 언젠가 훅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굳이 왼팔 써가면서 무리할 필요도 없을 것 같으니까.”
난 담담하게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도 살짝 아쉽네. 여차할 때만 왼팔로 바꾸는 게, 무슨 필살기나 비장의 무기 같아서 은근히 간지였는데.
이틀에 한 번씩 물리치료 받으러 가는 걸 빼면 내 일상에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아침에는 조깅을 했고, 낮에는 근처 헬스장이나 운동장 등지에서 지루한 트레이닝을 반복했다. 오른손에는 잠시도 쉬지 않고 악력기를 끼고 다녔다.
벼르고 벼르던 ‘양손잡이’ 특성을 어이없게 놓쳐서 망연자실한 마음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 하나 때문에 드러누워서 자포자기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미묘한 데가 있었다.
통합 트라이아웃까지 두 달.
우완 투구에 위력이 붙어가고 있는데, 입단 테스트까지는 받아봐도 괜찮지 싶었다. 어차피 지금 자포자기해서 때려치워 봤자 바로 복학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구위만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겠지만, 경기 형식의 실전 테스트도 있었다. 면접관 앞에서 마운드에 오를 수만 있다면 임팩트를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물론 장담은 못하지만…… 그러면 그때 가서야 비로소 어쩔 수 없는 게 되는 거지. 기왕 엎질러진 물이라면 두 달 정도는 더 비벼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 연승 가자! 연승!”
“1부 리그는 밟아봐야 어디 가서 야구 좀 한다고 떠들고 다닐 거 아니냐!”
“파이팅!”
이제는 포인트를 얻을 의미가 사라졌지만, 사회인 야구 경기에도 일단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양손잡이’는 놓쳤지만, 어쨌든 ‘철벽 내야’라는 새로운 무기를 손에 넣었으니, 익숙해지려면 실전에 써 먹어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혹시 저 사람인가? 방어율 0점대 양손잡이?’
‘에이 씨. 일진 사납네. 어차피 한 번 붙어봐야 할 거긴 하지만…….’
‘그런데 그 사람 맞긴 맞아? 글러브 평범한데? 양손잡이용 글러브 쓰는 거 아니었어?’
경기 상대가 나를 알아보고 수군대는 것쯤은 이제 낯선 일도 아니었다. 이런 잔재미도 얼마 안 남았으니 즐겨둬야지.
“플레이!”
새로운 특성을 얻고 처음 들여다보는 스트라이크존은 평범한 느낌이었다.
핫존과 쿨존의 비중이 적당히 반반쯤.
처음 붙는 상대이다 보니, 이게 어떤 상태인지를 잘 모르겠다. ‘철벽 내야’ 효과로 쿨존이 이미 넓어진 건가? 아니면 ‘매의 눈’에 보이는 스트라이크존과는 별개로 타격 이후에 별개 효과가 적용되는 건가?
퍼억!
“스트라이크!”
허를 찌르는 한복판 포심 패스트볼에 타자가 움찔했다.
이 초구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타자가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매의 눈’을 쓰면서 느낀 건데,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이 오히려 약점 코스로 표시되는 경우도 제법 많았다. 가장 치기 쉬운 코스라서 오히려 가끔 의식에서 멀어진다고 해야 할까? 아니, 순간적으로 방심한다는 표현이 더 알맞겠지.
‘못 치는 것’이 아니라 ‘방심한 것’이기 때문에, 밋밋한 공으로 한복판을 찌르면 대다수 타자는 눈에 띄게 동요한다. 내가 최근에 즐겨 쓰게 된 볼배합 중 하나였다.
까앙!
엉거주춤하게 휘두른 스윙이 공 윗부분을 힘껏 후려친다.
거의 제자리에서 땅볼 타구를 받아낸 1루수가 직접 베이스를 밟으며 깔끔하게 처리했다.
“원 아웃!”
으음. 그런데 ‘철벽 내야’라.
땅볼 확률이 올라가고, 공이 야수 근처로 날아갈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아직은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는데.
***
강재황은 최근에 제자가 소개한 아마추어 투수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소개받았다고 해봐야 친선경기를 한 차례 주선했을 뿐이고, 사실은 안면도 트지 못한 사이였지만.
퍼억!
“스트라이크!”
밋밋한 포심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존을 꿰뚫는다.
힘이 바짝 들어서 타석에 섰던 타자가 암담한 얼굴로 매섭게 혀를 찼다.
“또 스트라이크?”
“저 새끼는 어떻게 공 하나를 안 빼냐…….”
투수가 스트라이크만 던지는 것은 타자에게도 썩 나쁜 일이 아니다. 어쨌든 배트를 휘두르면 맞을 만한 코스로 공이 날아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때린 공이 페어존에 순순히 떨어졌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처럼 빗맞는 타구만 쏟아진다면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꿰뚫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힐 따름이었다.
까앙!
“큭…….”
스윙을 유발하는 높은 코스.
타자가 필사적으로 질주한 보람도 없게, 높이 쳐올린 공은 유격수의 글러브로 유유히 빨려 들어갔다.
“도대체 뭔 배짱으로 저기다 던지지? 깡으로 윽박지를 만한 구위도 아니잖아.”
“제구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 기본적으로는 코너워크 하는데, 가끔 완전히 이상한 데다가 던져.”
“나도 나도. 공 들어오는 게 이상해 뭔가.”
“잡았다, 싶은 좆같은 타이밍에만 그러던데…….”
상대 팀인 ‘호랑이 기운’의 벤치 위. 선수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한 명당에 자리 잡은 강재황은 무심코 공감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거는 구위 믿고 한 번씩 윽박질러볼 때에나 던져볼 코스인디…….’
문제는 아무리 봐도 그렇게 자신만만해할 위력의 포심 패스트볼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회인 야구 2부 수준으로 치자면 구속은 겨우 평균 이상. 볼끝은 오히려 밋밋하다고 평가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아니, 컨디션 난조인지 오늘은 명백히 평소보다 구속마저 떨어지고 있었다.
까앙! 까앙!
“아웃!” “아웃!”
후속 타자 2명이 연달아 아웃되면서 공수가 바뀐다.
5이닝 무실점.
거의 이닝 당 하나에 가깝게 주자를 내보냈지만, 스코어링 포지션까지 밟게 하는 일은 없었다. 스트라이크존을 적극 공략하는, 충분히 철벽 같다고 할 만한 피칭이었다.
까앙! 까앙!
“뛰어! 뛰어! 오케이! 2루까지!”
그에 비하면 ‘날아오르라’ 의 공격은 지극히 평범했다.
최태웅 투수와 비교하면 비슷한 구속이지만, 구위나 볼끝은 오히려 한 수 위. 두어 종류쯤 되는 공을 배합하여 스트라이크존에 욱여넣으면, 타자들은 집중해서 받아친다.
대량 실점도, 철벽 수비도 없이, 한 이닝 걸러 한 점씩 실점하는 평범한 사회인 야구의 모습이었다.
“세이프!”
“오케이! 3점!”
가까스로 그 이닝을 틀어막고 내려가는 상대 투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투구수가 많은 편도 아니었으나, 어차피 여기는 사회인 야구다. 늘 보던 프로 선수의 체력과 비교하는 것도 냉담한 일이었다.
까앙!
“아웃!”
최태웅은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상대 투수보다 훨씬 밋밋한 포심 패스트볼로 가뿐하게 1루 땅볼을 잡아냈다.
평범한 장면이지만, 상대 투수의 피칭과 연이어서 보면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저럴 수 있을 만한 공이 아닌데…….’
물론, 운이 좋다거나 상대 실력이 형편없을 뿐이라고 치부할 단계는 지나갔다. 실제로 최태웅은 토네이도즈와의 경기에서도 7이닝 노히트 피칭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까지 야구를 봐온 역사가 있는데, 이상한 것은 이상한 것이다. 저번에도 어렴풋이 느낀 바지만, 최태웅의 피칭에서는 뭔가 작위적인 느낌이 났다. 운이 좋아서 밋밋한 공이 빗맞은 장면만 모아놓은 듯하다고 할까?
까앙!
“흐음…….”
초구에 유격수 땅볼로 나가떨어지는 타자를 보면서 강재황은 문득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번하고는 뭔가 다른 것도 같은디…….”
직감적으로 느낀 문제인지라, 위화감의 정체가 뭔지는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반대 팔로 던지고 있어서 그런 걸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해볼 뿐이었다.
까앙!
“아웃!”
어이없게도 이번 이닝에는 마지막 타자까지도 초구를 치고 나가떨어졌다. 공 3개로 아웃 카운트 3개를 가져갔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삼진이 두 개밖에 없구먼. 동영상으로 봐도 이닝마다 삼진 하나씩 꼬박꼬박 먹드니만.”
방금 느낀 위화감이 그거였나? 강재황이 애매하게 납득하고 넘어가려는데 갑자기 벤치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작작 좀 해라, 이것들아! 나 지금 막 앉았다! 어떻게 꼴랑 공 3개에 나가 떨어지냐? 숨 좀 돌리자고!”
“미, 미안…….”
“왜 이렇게 플레이에 배려가 없어, 배려가? 게임 시작하고 나 5분을 앉아 있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뻥뻥 잘 때리는 것도 아니고. 좀 물고 늘어지란 말이야!”
공격이 너무 빨리 끝나서 불만스러웠는지, ‘호랑이 기운’ 쪽 투수가 벌게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강재황은 팀원에게 성질 부리는 투수의 모습에 이맛살을 찌푸렸다가…… 별안간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볼도 거의 안 던졌는데. 지금 투구수가 몇 개지?’
그제야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낀 게 무엇이었는지 벼락처럼 떠올랐다. 강재황은 아연한 얼굴로 눈만 끔뻑거리다가, 황급히 녹화 중이던 캠코더를 돌려보기 시작했다.
1회에 2구, 3구, 2구, 2구. 2회에는 3구, 4구….”
최태웅의 피칭 장면만 빠르게 넘기면서 정신없이 투구수를 헤아린다. 그리고 마지막 3아웃까지 센 강재황은 말문이 막혀서 한동안 입술만 뻐금거렸다.
6이닝 4피안타 무실점.
투구수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