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36- >
036.
[새로운 특성을 선택해주세요.]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침내 이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마구 뛰었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이지만, 우왕좌왕하는 일까지는 없었다. 어떤 특성을 고를지는 오래전에 이미 결정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손잡이 : (선택 불가) 반대쪽 손으로도 원래 손과 동일한 위력의 공을 던질 수 있다. 같은 손 타자를 상대로는 피안타율이 특히 더 하락한다.]
내 왼팔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다. 당장은 오른팔보다 위력이 나오니까, 비장의 무기 같은 느낌으로 꺼내 쓰는 것뿐이다.
스피드나, 무브먼트나, 컨트롤이나. 모두 중요하지만, 일단 멀쩡한 팔이 있어야 뭐가 되지.
‘양손잡이’ 특성을 찍으면 내 오른팔은 단번에 왼팔만큼 강하고 섬세해진다. 우완으로 전향하는 것에 실패의 위험이 사라지는 것이다.
좌완이라는 메리트가 사라지겠지만, 그까짓 것쯤이야 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초능력이 생겼는데, 그런 불평 하면 벌 받는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
“응?”
자연스럽게 알림창에 손을 뻗었던 나는 당황해서 눈만 끔뻑거렸다. 양손잡이 특성 옆에서 뜬금없는 글자를 뒤늦게 발견했던 것이다.
‘……선택 불가? 아니 왜?’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명하니 있다가 갑자기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아니, 잠깐만, 타임.
시발, 이건 뭔가 좀 아니지 않냐?
뜬금포에도 정도가 있지! 갑자기 나한테 왜 이래?
[플레이어 상태로 인해 ‘양손잡이’ 특성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
무시하고 억지로 눌러봤더니만, 쐐기라도 박듯이 이런 메시지가 알림창에 나타났다.
그나마 한 가닥 남은 이성 덕분에 벤치에서 멀찌감치 떨어졌으니까 망정이지. 혼자 씩씩대면서 허공에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누가 봤다면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다.
“시발! 아니, 이런 게 어딨어? 사람 뒤통수 까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보고 뭘 어쩌라고!”
자고 일어나면 초능력이 없어져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종종 해봤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선택 불가’니 뭐니, 그딴 거 없었잖아?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건데!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냐!
[새로운 특성을 선택해주세요.]
“진정해라……. 천천히 생각하자…….”
일단은 라마즈 호흡법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 이건 임산부가 하는 건가? 아무튼.
느닷없이 ‘선택 불가’라니?
영문은 모르겠지만…… 안 되는 걸 어쩌겠어. 순 제멋대로라는 생각밖에 안 들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나한테 이런 초능력이 생긴 것부터가 ‘순 제멋대로’였다.
그 외에도 좋은 특성은 많다. 하나같이 나를 괴물 투수로 만들어줄 수 있는 그런 초능력이다.
애초에 내가 ‘양손잡이’를 터득하려고 한 이유가 뭔데. 오른팔에 입단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을 만한 스펙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입단 테스트를 통과할 만한 스펙이 붙기만 한다면 굳이 ‘양손잡이’가 될 필요는 없었다. ‘양손잡이’를 고르면 오른팔의 구속과 제구력과 손끝 감각으로 인한 변화구 습득능력 따위가 한 방에 해결되리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럼 구속 늘려주는 특성을 고를까? 공이 빠른 투수는 당장 미숙한 데가 있어도 기회를 보장해주는 편이니까. 프로 2군 시합에만 나갈 수 있으면 포인트는 얼마든지 긁어모을 수 있다.
……아니지, 아니지. ‘양손잡이’ 특성을 고를 수 없다는 건, 앞으로도 노력만으로 오른손을 길들여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반대손 전향에 실패하는 이유는 근력이 아니라 손끝의 미세감각 때문이라잖아.
그러면 제구력 관련 특성을 올릴까? 지금 나는 구속을 희생해서 제구를 잡은 상태니까. 초능력으로 제구를 잡을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구속을 10km는 올릴 수가 있다. 아직은 근력만 키워도 구속이 쑥쑥 오를 만한 단계이기도 하고.
아니면, ‘매의 눈’처럼 전반적인 피칭에 영향을 주는 특수능력은 어떻지? 그것도 아니면…….
“야, 태웅이. 뭔데 여기 혼자 짱박혀 있어? 누가 보면 한국 시리즈 7차전 끝내기 맞은 줄 알겠네.”
“……!”
갑자기 누가 어깨를 치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돌아봤더니 기훈이 형이 벌써 짐을 반쯤 챙겨놓고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에요. 잠깐 뭐 좀 생각하느라…….”
-띠링-
그때, 머릿속에서 전자음 같은 것이 울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생각하기도 전에 알림창을 빼곡하게 채웠던 특성 목록이 스르륵 사라졌다.
[플레이어가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작위로 특성이 부여됩니다.]
[플레이어에게 ‘철벽 내야’ 특성이 부여됩니다.]
…………헐.
세상에 뭐 이런 개 같은 뒤통수가 다 있냐.
씨발.
***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어려운 걸음 해주셨는데, 감사 표시로 저희가 대접하겠습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우리 선수들 트레이닝 일정에 식단 조절도 다 포함된 거라서요. 오늘 좋은 경기 했습니다.”
말이야 저렇게 하면서도, 토네이도즈 사람들의 낯빛은 완전히 거무죽죽해져 있었다.
아무리 초반에 방심했다지만. 아무리 7회뿐이라지만. 아무리 잘 맞은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날아갔다지만.
아마추어 투수에게 노히트라니?
신분만 아마추어고 은거고수급 스펙이라도 뽐냈다면 또 모를까. 2군에서도 평균에 못 미치는 직구뿐인 투수에게 이런 결과라니? 이건 특타가 아니라, 비상대책을 세워야 하는 레벨의 대참사였다.
나를 묘하게 노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시발, 꺼져. 내가 알 게 뭐냐. 니들만 엿 먹은 거 아니거든?
“이야……. 아무리 그래도 퍼펙트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는데……. 프로가 대단하기는 하네.”
“토네이도즈가 아직 프로는 아니지.”
“에이, 그래도 올해 성적 생각하면 내년에는 퓨처스 리그 무조건이지.”
“오늘 거기 투수 이름이 김진환이었나? 아따, 그 친구 잘 던지드만.”
“아우, 그냥 톡 갖다 대보려고만 하는데도 맞출 수가 없어. 내가 볼 때는 조만간 걔 대성할 거야.”
“지랄. 니깟 거 아웃 잡았다고 대성할 재목이냐?”
우리 팀이라고 ‘토네이도즈 상대로 비겼다!’라며 들뜨지는 않았다. 나만 밥값했고, 타자들은 철저하게 양민학살 당했는데 무슨.
그렇다고 토네이도즈처럼 다들 죽상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지는 게 당연한 게임에서 무승부를 찍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색다른 경험 했다는 식으로 킬킬거리는 가운데, 난 혼자 구석에 짱박혀 우울하게 맥주잔을 기울였다.
“이 세상은 똥이야……. 똥이라고…….”
“이 새끼는 혼자 왜 저래? 취했나?”
“똥이라고, 똥이야……. 이히히히…….”
사람 뒤통수를 까도 이렇게 찌질하게 깔 수가 있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문제없었는데 갑자기 ‘선택 불가’라니? 자다가 성질 뻗쳐서 이불 뻥뻥 차게 생겼네.
[철벽 내야 : 타구가 땅볼이 될 확률이 상승한다. 땅볼 타구가 야수 근처로 향할 확률이 소폭 상승한다.]
물론, 랜덤으로 골라진 이 특성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매의 눈’도 따지고 보면 ‘타자의 강점과 약점을 간파한다.’라는 설명뿐인데 신기에 가까운 위력을 뽐내고 있으니까.
2군에 턱걸이로라도 들어간 다음에 이 특성을 얻었다면 정말 큰 재산이겠지. 저 특성의 설명을 정리하자면 대놓고 ‘땅볼 잘 나오게 해줌’이라는 거잖아.
다만 문제는…….
“이래갖고 어떻게 테스트를 통과하지?”
오른팔로 왼팔 정도의 구속을 내면 입단 테스트에 턱걸이로나마 붙으리라 봤다. 선발이든 구원이든 실전에 나갈 수만 있다면 게임은 끝난 거고.
하지만 지금 상태로 테스트에 지원했다간…….
-부상 때문에 우투로 전향했습니다. 구속도 느리고 변화구도 없지만, 아웃 카운트는 잘 잡습니다. 테스트에서는 제 진가를 알아보실 수 없을 겁니다. 일단 뽑아놓고 실전 투입을 해보시면 얼마든지 증명을 해보이겠…….
-네, 알겠습니다. 다음 분이요.
시발. 돌아버리겠네.
이렇게 되면 ‘양손잡이’ 특성을 얻어서 튼튼한 오른팔로 프로에 입성한다는 플랜은 끝이다. 정말 순수하게 내 노력만으로 오른팔 전향을 해야 한다는 거다.
“1차에 붙어서 실전 테스트 나갈 자격만 얻으면 어떻게든 될 텐데……. 빡시게 훈련하면 그때까지 구속이 더 붙을 것도 같고……. 여차하면 테스트를 왼팔로 보는 것도…….”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려? 오늘 MVP가?”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고 있으려니, 수재 형님이 싱긋 웃으면서 내 옆에 와 앉았다. 난 어색하게 표정 관리를 하면서 말했다.
“MVP는요 무슨. 뽀록으로 한판 먹은 건데요.”
“그놈의 뽀록이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 그러잖아. 뽀록도 겹치면 실력인 거지.”
수재 형님이 내 빈 잔에 맥주병올 기울였다. 난 ‘어이구 어이구’하면서 양손으로 공손하게 잔을 받았다.
“나는 너만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구속이 나보다 확 빠른 것도 아닌데, 왜 네가 던질 때만 타자들이 그렇게 맥을 못 추냐?”
“요령이죠, 요령. 구위로 찍어누르는 게 아니라, 타자가 그 타이밍에 못 칠 만한 코스에 던지는 거예요. 순전히 감이라서 뭐라고 설명하기는 좀…….”
“워야. 그게 더 무섭잖아. 백안이야, 사륜안이야?”
“사륜안? 그게 뭐예요?”
“그런 게 있어.”
솔직히 요새 누가 나한테 노하우 같은 걸 물어보면 양심이 콕콕 찔린다. 남들은 상상도 못할 로또를 맞아놓고서 천부적인 재능인 척 하는 건데, 어떻게 안 찔릴까.
“연습은 잘 돼가고? 요새 보니까 구속이 많이 늘어난 것 같던데.”
“그냥 그래요. 일정 수준까지는 확 올라왔는데, 아무래도 반대손이다 보니까 감이 영 둔하네요. 어릴 적에 왼손으로 처음 배울 때만큼 효율도 안 나오고…….”
“혼자서 연습해서 그런 건 아니고? 어디 특별히 야구교실 같은 데도 안 다닌다며.”
“그런 것도 없다고는 못하겠는데. 선수반은 가격도 좀 비싸고. 당장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아서요. 그리고 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방향성도 있고.”
“그러면 혹시 말이야…….”
쨍그랑.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한데 모여들었다. 내가 수재 형님 잔에 맥주를 따르다가 병을 떨어뜨린 것이다.
“아, 죄송해요. 안 젖으셨어요?”
“괜찮아, 괜찮아. 별로 흘리지도 않았는데 뭘.”
“휴지, 휴지…….”
그래도 병은 안 깨져서 다행이네. 난 휴지랑 물수건으로 테이블에 흐른 맥주를 숙숙 닦아내고서 다시 수재 형님 잔에 맥주병을 기울였다.
쨍그랑.
이번에는 다른 테이블 사람들까지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았다. 누가 연달아서 뭘 떨어뜨리니까 무슨 싸움이라도 났나? 하는 얼굴들이었다.
‘잠깐만…….’
갑자기 주위의 소리가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맥주병을 쥐었던 왼손을 한동안 망연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