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31- >
031.
사회인 야구는 1개 리그가 10~20팀 정도로 꾸려진다. 대부분 주말에만 경기를 하므로, 포스트 시즌이 아니고서야 한 번 붙었던 팀과 다시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요컨대 매번 초면인 사람들과 경기한다는 건데, 근래 들어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쟤인가?’
‘맞는 것 같은데. 등번호 99.’
‘오, 진짜네. 양손잡이 글러브. 처음 봤어.’
‘신기하게 생겼네.’
말 거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를 힐끗거리는 시선이 꽤 노골적이었다. 그 이유가 뭔지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나 오늘 사회인 야구에서 양손잡이 투수 봄 ㅋㅋㅋ
-헐 ㅋㅋㅋㅋㅋ 별 게 다 있네.
시작은 인터넷 블로그의 조그만 포스팅이었다.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오늘 이런 투수랑 붙어봤다는 일기 수준의 게시물이었다. 야구 커뮤니티 몇 군데에도 링크되었지만, 큰 반응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경기 수가 늘어나자 조금씩 불이 붙기 시작했다. 0점대에서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는 내 평균자책점 때문이었다.
사실 선수 개개인의 격차가 큰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그렇게까지 희귀한 일도 아니지. 어느 리그는 평균자책점 1위가 1.00이고 2위가 4.84라고도 하던데, 뭘.
따로 보면 잠깐 관심을 갖고 말 일인데, 양투와 0점대 자책점이 합쳐지니 시너지가 일어났다. 우리 리그 홈페이지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규모의 사회인야구 커뮤니티에도 한 번씩 이름이 언급될 정도였다.
-원래부터 양손잡이래요?
└진짜는 왼손잡이고, 팔꿈치 부상 때문에 오른손으로 던지는 거래요. 그런데 그래도 왼손 공이 훨씬 빠르니까, 평소에는 오른손으로 던지다가 중요한 상황에만 왼손으로 던지는 모양이에요.
-나도 봤는데, 직구밖에 못 던지면서 뭐하러 왼팔 오른팔 바꿔 던지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ㅋㅋㅋㅋ
└꼭 좌우 놀이만 생각할 건 아니죠. 오른팔로 100개 던질 걸 좌우 30개 70개 나눠서 던지면 체력 관리되잖아요.
-동영상 봤는데 스피드 꽤 나오던데. 선출인데 속이는 거 아님?
└전국소년체전 우승자 팀 선발투수입니다. 오래된 뉴스이긴 한데 ‘경훈초’ ‘최태웅’ 검색해보면 나와요. 초6때 야구 접었으니까 선출은 아니에요.
-저 새끼 존나 얍삽함. 오른손으로 던지다가 선수 출신 타자한테만 왼손 씀.
└부상 때문에 많이 못 던질 뿐이고 왼손 공이 훨씬 빠르다는데, 당연한 선택 아닌가요? 오히려 저는 굉장히 지능적인 페이스 배분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동영상 봤는데, 어떻게 저 공으로 방어율이 0점대가 나오는 거지? 공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직구밖에 없다면서. 2점대라고 해도 살짝 납득이 될까 말까…….
└투수가 타자한테 아웃 잡는 데 필요한 게 구속이나 구질 같은 육체적인 스펙만은 아니죠. 야구 지능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어요? 볼 배합이나 위기관리능력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보는데요.
-내가 볼 때는 그냥 중2병. 타고난 양손잡이 같은 게 아니라, 왼손잡이가 오른손으로 던지는 것뿐. 그냥 저러면 멋있어 보일 것 같아서 컨셉질하는 거임.
└타고난 양손잡이가 아니라면 더더욱 대단한 부분 아닌가 싶네요. 반대손으로라도 경기에 나올 만큼 야구에 열정적이라는 의미 아닌가요?
└근데 이 사람은 원데 자꾸 여기저기 게시물 다니면서 실드 치고 다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최태웅 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됨미당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무슨 말씀이신지???? 지나가다 보니까 순 생트집 같아서 반박한 것뿐인데여. 마녀사냥 쩌네여. ㄷㄷㄷㄷ
시벌. 깜짝 놀랐네. 허구한 날 인터넷만 하는 잉여 새끼들이 쓸데없이 감만 좋아가지고.
……그런데 남이 쓴 댓글은 삭제 못 하나?
***
[일반 미션 ‘풀 카운트 삼진’을 달성했습니다.]
[5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날도 우리 팀은 평범하게 경기를 마쳤다. 경기 뒤에는 정리운동을 하고, 회식도 했다. 늦지 않게 귀가해서 씻고 누웠더니 저절로 신음이 터져나왔다.
“아이고, 감질나서 죽갔네…….”
체력적인 문제가 아니다. 깨작깨작 포인트를 긁어모으려니 정신적으로 진이 빠져서였다.
‘날아오르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팀이 선수 출신을 3명씩 꽉꽉 채워 넣은 것은 아니었다. 왼손으로 던진다고 해서 무조건 삼진을 따는 것도 아니니, 1게임에 버는 포인트는 평균 20점 정도에 불과했다.
특성 하나를 새로 열려면 아직도 500여 포인트가 더 필요하다. 단순 계산으로는 25경기인데, ‘날아오르라’의 경기만 뛰어서는 올해 안에 달성 불가능한 수치다.
물론, 그에 대한 대책은 충분히 강구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태웅이라고 합니다.”
“음. 최태웅 씨?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혹시 인터넷에서 보신 거 아닌가요? 제가 양투좌타인 것 때문에 인터넷에 누가 찍어가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양투? 아, 그분이구나! 인터넷에서 한 번 봤어요. 그럼 한 번 던져보시겠어요?”
리그 하나만 뛰는 걸로 모자란다면 여러 개를 동시에 뛰면 그만이지.
어차피 사회인 야구는 일정이 띄엄띄엄이라서 여러 개의 리그를 동시에 뛸 수도 있었다. 경기 날짜가 겹치지 않게 조금만 신경 쓰면 된다.
하지만…….
“네. 잘 봤습니다. 오늘은 돌아가 보시는 게 좋겠네요. 결과는 저희끼리 의논한 뒤에 통보하도록할게요.”
“…….”
면접관의 덤덤한 목소리에 난 무심코 혀를 찼다.
또 탈락이구만. 이 짓도 네 번이나 했더니, 목소리만 들어도 결과를 미리 알 것 같았다.
‘즉시 전력으로 써달라는 조건이 그렇게 무리인가?’
솔직히 말해서 입단 자체는 무리가 없다고 본다. 언제 개인 사정이 생길지 모르는 사회인 야구의 특성상, 벤치는 두꺼울수록 좋기 때문이다.
문제는 ‘선발투수로 곧장 기용해줄 것’이라는 내 조건이었다.
뭐 그딴 패기가 다 있느냐 싶겠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구원투수로 깨작깨작 나가서는 올해 안에 포인트를 못 모을 테니까. 내년까지 내다볼 것 같으면 애초에 두 팀이나 뛸 필요도 없고.
그런데 일단 ‘즉시 전력감인 선발투수’가 필요한 팀을 찾는 것부터 어려웠다.
수소문해서 찾아낸 팀에서는 날 원치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위력만 보면, 나는 1~2부 리그에서 절실하게 원할 정도는 또 아니기 때문이다.
평균자책점을 내세워보기도 했지만, 안 통했다.
아마추어 리그에서 누가 그런 걸 따지나. 실제로 시범 피칭을 해 보이면 ‘풉, 그 공으로 0점대 방어율?’ 이라며 리그 수준 자체를 비웃었다.
배알이 꼴리지만 어쩌냐. 솔직히 나한테 ‘매의 눈’이 없었다면 틀린 평가도 아닌걸. 내가 저쪽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반응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탓에 물고 늘어질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저 조건을 빼기도 뭐했다. 경기에 나가지 못하면, 나로서는 정말로 입단하는 의미가 없거든.
이것 때문에 인터넷에서 잉여스러운 짓거리해가면서 인지도 높이려고 해본 건데, 안 통하네.
“결과가 안 좋아도 상관없으니까, 연락할 때 부담 갖지 말아 주세요. 대신 이것도 인연이니까, 만약에 떨어지면 연습경기나 한판 해주세요. 여기 명함이요.”
꿩이 없으면 치킨이라도 뜯어야지.
아무리 공적인 일이라도 남을 퇴짜놓을 때는 심리적인 부담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이런 소소한 부탁을 하면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내가 ‘날아오르라’ 팀에 주선한 친선경기만 해도 벌써 두 개째였다.
절대로 ‘니들이 감히 나를 잘라?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는 생각으로 시합에서 복수하려는 거 아니다.
나 같은 인격자가 그런 찌질한 짓을 하겠냐.
으드득.
***
“스트라이크 아웃!”
“게임 세트! 오늘 경기는 1대 0으로 ‘날아오르라’ 팀의 승리입니다!”
여느 때처럼 무난한 경기라고 생각했는데, 끝나자마자 선수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라톤이라도 뛰었다고 생각할 만큼 핼쓱한 얼굴들이었다.
완투한 나도 멀쩡한데 왜들 저런대?
“야, 최태웅! 앞으로 이렇게 빡센 게임 물어오지 마!”
“……왜요? 쎈 팀이랑 붙으면 좋지 않아요?”
“이빨이 안 박히잖아, 이빨이! 적당히 비슷한 수준에서 치고받아야 재미가 있는 거지! 이게 뭐냐고!”
“1대 0으로 이겼으면 박빙이잖아요. 그러면 충분히 치고받은 거 아닌가?”
“순전히 투수 빨이잖아! 피 말라 죽는 줄 알았다!”
까다롭긴. 이런 경기도, 저런 경기도 있는 거지.
그래도 돌이켜보면 팀원들이 투덜거릴 만큼 살얼음판 경기이기는 했다. 선수 출신 이외의 타자를 상대할 때는 체력 낭비할 마음이 없어서 적당히 던졌더니 종종 출루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오늘 좋은 경기 했습니다.”
수재 형님이 싱긋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상대 주장은 잠시 미묘한 쓴웃음을 지었다가 굳게 맞잡았다.
“예. 덕분에 좋은 경기 했습니다. 방심한 것까지는 아닌데……. 선출 없다는 말에 마음 놓고 있다가 한 방에 훅 갔네요. 나중에 설욕할 기회 주시겠죠?”
“어유, 물론입니다. 솔직히 오늘 저희가 이긴 건 운빨이고요. 다음에는 한 수 배워가야죠.”
수재 형님은 패자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저희는 어차피 경기 뛴 날마다 회식하거든요.”
“시간이야 괜찮기는 한데…….”
“에이, 그러면 같이 하시죠? 당연히 저희 팀에서 한턱 내겠습니다. 저기에 가족분도 같이 오셔도 되고요.”
“네?”
상대 주장이 어리둥절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운동장 바깥. 펜스 너머에서 한 20대 여자가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었다. 어깨에는 무슨 방송국 VJ들이 쓰는 것 같은 큼지막한 카메라를 짊어진 채였다.
그러고 보니 경기 시작할 때부터 계속 촬영하던데. 나도 당연히 누구 가족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누군지 모르겠는데요. 누구 저 아가씨 알아?”
“글쎄요…….”
상대 주장이 갸웃거리면서 돌아보았지만, 모두가 어리둥절해할 따름이었다. 우리 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난 촬영하길래 당연히 누구 가족인 줄 알았는데? 생판 남이 뭐 하러 비디오를 찍어가? 뭐에 쓰려고?”
“정찰 나온 거 아니야? 적 팀에서?”
“사회인 야구하면서 누가 정찰씩이나 하냐? 까놓고 말해서 너. 다음 주에 붙을 팀 동영상 있으면 분석해서 공략 세울 수나 있어?”
“내가 못한다고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1부 리그에서는 매니저가 종종 정찰도 해간다고 그러잖아.”
“아, 그러면 저쪽 팀 찍으러 온 거려나?”
뜻밖의 이슈였지만 관심은 금세 식었다. 진짜로 정찰하러 온 거래도 이런 일로 초상권이 어쩌니 하면서 따질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는 공식전이 열렸다.
상대 팀의 순위와 라인업을 본 나는 가볍게 투덜댔다.
“선수 출신이 4번 하나네. 시발, 그러니까 꼴찌지. 오늘은 포인트 먹기도 글렀네.”
이래서 내가 레벨업 하는 게임을 싫어한다. 경험치 쌓는답시고 노가다하는 게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거든.
안 되겠어. 올해 안에 뭔가 결과를 보이려면, 하루빨리 선발 보장받을 수 있는 새 팀을 찾아야겠다.
“스트라이크 아웃!”
[일반 미션 ‘삼구 삼진’을 달성했습니다.]
[5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무패 행진 중인 우리 팀과 꼴찌를 달리는 상대팀의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타자들의 컨택 자체는 많았지만, 내야를 빠져나가는 타구는 거의 없었다. 반면에 우리 타자들은 미친 듯이 몰아쳐서 콜드 게임 사정권까지 몰아쳤다.
“야, 저기 봐봐.”
흥이 안 나서 벤치에 앉아 하품이나 하고 있는데 기훈이 형이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 저 여자는…….”
얼굴이나 옷차림은 모르겠지만, 대포처럼 커다란 카메라를 보니 바로 기억이 살아났다. 저번에 친선경기를 관중석에서 촬영하던 그 여자 같았다.
“그때 상대 팀이 아니라 우리를 정찰하러 왔던 건가 보네. 친선경기 일정을 어떻게 알았지?”
“우리를 정찰한다고?”
“오오, 시발. 쩌는데? 우리도 이제 네임드인 거야?”
나도 초등학교 때 겪어봐서 안다. 다른 사람에게 마크당한다는 것은 짜증나면서도 묘하게 설레는 일이지.
“아웃!”
“공수 교대!”
우리 팀 공격이 끝나고, 선수들이 주섬주섬 글러브를 챙겨 일어났다.
나는 느릿느릿 마운드로 올라가서 펜스 너머의 ‘스파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대포 같은 렌즈가 정확히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래. 실컷 정탐해 가라.
과연 내 피칭을 관찰해서 뭘 알아낼 수 있을지.
솔직히 내가 더 궁금하니까.
목표까지 남은 포인트.
460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