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28화 (28/90)

< 괴물 배터리 -028- >

028.

스포츠에서 한 번 꺾인 기세를 되돌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긴장이 끊긴 순간에 지금껏 운동 상태를 유지하던 호르몬 분비가 급격히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십팔사사’ 팀에게 있어서 전 이닝의 더블 스틸은 양날의 검이었다. 실패한 순간, 팀 전체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기 때문이다.

까아앙!

“돌아! 돌아! 계속 뛰어!”

“돌아보지 마! 홈까지 뛰어!”

공격에서의 찬물은, 10회 말의 수비에까지 명백하게 영향을 미쳤다.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기 후반.

주자를 둘이나 깔고 시작하는 승부치기.

40대의 강대만 투수가 경기 내내 뿜어냈던 괴력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그저 불가항력일 뿐이었다.

“세이프!”

“이야아아아아아아아!”

“끝내기!”

주자가 홈을 밟는 순간, ‘날아오르라’ 벤치에서는 폭탄과도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로서는 정말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벼랑 끝에서의 회생이었다. 이번 시즌, 같은 리그의 팀들에게 있어서 ‘십팔사사’는 천재지변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광란의 환호를 내지르는 ‘날아오르라’와 달리, ‘십팔사사’ 선수들은 망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승격이 결정되어 있다지만, 시즌 내내 누려온 패왕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 그걸 막판에 이르러 짓밟혔으니 속이 부글거릴 만도 했다.

프로들이 보면 같잖겠지만, 원래 호랑이 없는 굴에서는 여우가 왕 노릇을 하는 거 아니겠냐.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게임 했습니다.”

마무리 인사 때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저쪽 선수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우, 살벌해라. 왜 저러는지 대강 짐작은 가는데, 면전에서 이러니까 살짝 쫄리네.

“사실은 제가 왼팔로 많이 못 던져요. 어릴 적에 다친 게 있어서요. 그래서 오른손으로 한 건데, 혹시 건방진 짓거리 한 걸로 오해하지 않아주시면 좋겠어요.”

“……왼팔이 부상이라고?”

“네. 중요할 때에는 한 번씩 쓰는데, 너무 자주 쓰면 통증이 올라오거든요. 오늘은 저희 팀한테 절실한 경기라서 그랬어요.”

내가 인사하면서 불쑥 꺼낸 말에, 상대 선수들은 못 믿겠다기보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굳이 저 표정을 해석하자면 ‘다친 팔로 던진 공이 그 정도였다고?’ 쯤 되겠지. 민망해서 내 입으로 떠들기는 뭐하지만.

“미리 말씀드릴 수도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이런 것도 데이터인 거니까요. 최선을 다하려고 그랬던 거니까 양해 좀 부탁드릴게요.”

“아, 아니 뭐. 양해는 무슨……. 어느 손으로 던지든 그거야 투수 마음인데…….”

“아이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과장스럽게 허리를 숙였고, 상대 팀에서는 얼떨떨하게 끄덕거리기만 했다.

까놓고 말해서 내가 잘못한 일은 없지. 오른손으로 던진 게 진짜로 상대를 얕본 거래도, 자기들한테는 유리한 일이잖아? 꼬우면 능력껏 안타를 쳤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지금처럼 굽실거리듯이 말한 것은 괜한 앙금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다시 볼지는 모르겠지만, 얼굴 붉힐 일 만들어 놔서 뭐하나.

“도루 저지를 했으면 당연히 포수가 잘한 거지! 투수가 뭘 한다고 그래?”

염원하던 2부 리그로 승격한 우리는 근처 한우집에서 거하게 뒤풀이를 했다. 듣자하니 다들 오늘 경기를 위해 몸 관리한답시고 일주일 넘게 금주를 했다는 모양이다.

그까짓 게 몸 관리 축에 들어가느냐 싶지만, 생각해보면 다들 나랑은 입장이 다르지. 직장인인데, 금주로 체력관리 해온 게 어디냐. 이겼으니까 됐지.

“내가 그거 못 잡았으면 게임이 어떻게 됐을지 몰라?”

“행님! 아무리 세상이 삭막해도 그렇지! 끝내기 안타가 MVP 아니면 도대체 누가 MVP란 겁니까!”

“내가 도루 잡아서 찬물을 끼얹었으니까 투수가 흔들린 거지! 그때 못 잡아서 실점했으면 애초에 그게 결승타 될 일도 없었어!”

“꼴값들 떨고 있네. 완봉한 태웅이도 가만히 있는데, 뭔 끝내기랑 도루저지 가지고 니가 MVP네 내가 MVP네 타령하고 있냐?”

한참동안 자리에서 떠들고 놀던 나는 잠깐 바람이라도 쐴 겸 해서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는 수재 형님이 먼저 나와서 불그스름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수재 형님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맙다, 태웅아. 덕분에 나도 살아생전에 2부 리그를 다 밟아보네.”

“아이고, 형님. 누가 들으면 월드 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줄 알겠네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나는 이 정도면 감개무량이야. 어디 가서 2부 리그 뛴다고 하면 얼마나 뽀대가 나는데.”

“기왕이면 아예 1부까지 노려보시죠?”

“아. 거기는 좀 빡세서 싫어. 예전에 깍두기 비슷한 식으로 연습게임에 끼어봤는데, 분위기가 다르더라. 에러 하나 냈다고 죄다 정색하는데, 무슨 군대 다시 온 줄 알았다 야.”

“오호라. 무작정 위로 올라가겠다는 게 아니라,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즐기는 게 우선이라는 거네요.”

“말하자면 그렇지. 일방적으로 털거나 털리는 게 뭔 재미냐? 치고받고 하는 게 짜릿하니까 즐거운 거지.”

“…….”

얼큰하게 취해서 히죽거리는 수재 형님을 보았더니 난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쿡쿡 쑤셨다.

어떤 의미에서 수재 형님은 나 같은 것보다 훨씬 순수하게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프라이드나 장래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이기고 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즐길 뿐이니까.

‘괜히 조금 미안한데…….’

이번에는 다처서 그랬다지만, 2부 리그에서는 나한테 선발 자리를 빼앗길 공산이 크다. 실력으로 결정하는 거라고 해도 그렇지. 박힌 돌을 빼는 것은 굴러온 돌 입장에서도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내가 매번 완투할 건 아니고, 팀 입장에서도 이기면 좋은 거니까. 서로서로 기브 앤 테이크잖아.’

뒤풀이가 길게 이어졌지만, 난 그래도 버스가 끊기기 전에 일찌감치 자리를 빠져나왔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TV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부모님은 아직 깨어계신 듯했다. 나는 간단하게 샤워만 하고 나와서 안방의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아버지. 어머니. 잠깐 괜찮으세요?”

“……이 자식이 불안하게 왜 이래? 존댓말을 다하고. 뭐 잘못 먹었냐?”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 들어갑니다?”

뭔가 시작부터 분위기가 깨지고 말았지만, 우리 집구석이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는데 어쩌랴.

아버지 어머니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면서 일어나 앉았다. 확실히 나답지 않은 분위기이기는 했던지라, 두 분의 눈빛에 노골적인 불안함이 묻어나 있었다.

“형사냐, 민사냐?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야? 6개월 안쪽이면 그냥 들어가서 살고 나와라. 요새는 시설도 좋고 먹을 것도 잘 나온다던데.”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들을 도대체 뭘로 보고!”

“법적인 거 아니면 윤리적인 거냐? 혹시 우리 다음 달에 할아버지 할머니 된다, 이딴 통보 하려는 건 아니지?”

“당신도 참.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지. 속도위반은 혼자 해요?”

“그것도 그러네. 역시 당신은 예리해.”

“…….”

남자는 원래 나이 먹어도 철이 안 드는 법이라지만, 엄마까지 그러면 나는 이 집에서 누굴 믿고 사나.

나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기본적으로 돈 나가는 일은 아니니까, 그쪽으로는 걱정 마요. 오히려 원래보다 돈이 덜 나갈 얘기니까.”

“오, 그러면 좋은 소식이잖아. 그런데 표정이 왜 그따위야? 설마 로또 됐으니까 몇 푼 줄게 먹고 떨어져라, 나는 앞으로 독립해서 혼자 산다, 이러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니까, 진지하게 좀 들어봐요.”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는 계속 농담 따먹기나 하게 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딱딱하게 정색했다.

“진로 얘기 하려는 거예요. 올해 시험 본 거 말인데요. 원서 아무 데도 안 냈으면 좋겠어요.”

“……뭐?”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지금’ 도전해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고 살 것 같아서 그래요.”

그제야 화제의 무게를 느낀 걸까? 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굳었고, 어머니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조금 얼떨떨하다는 반응이었다.

하기야. 장래희망도 없이 물 흐르듯이 살아온 아들내미가 난생 처음 ‘진로’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나쁘지 않게 본 수능 성적표까지 쓰레기통에 처박겠다고 하고 있으니 말문이 막히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두 분이 정신차리기 전에 폭탄을 던졌다.

“저, 야구하고 싶어요.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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