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27- >
027.
까앙!
“아웃!”
아무리 취미에 불과하다지만. 아니, 좋아서 하는 취미이기 때문에 ‘십팔사사’는 더욱 울컥했다.
범타로 물러난 6번 주위에 선수들이 씩씩대는 얼굴을 하고서 몰려왔다.
“어때?”
“집중하면 다들 맞출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변화구 없었지?”
“얼마든지 칠 수 있어. 까짓 거 밟아버리자고!”
상대가 자기들을 무시해도, 실력 차이가 너무 크면 어쩔 수 없다. 일방적으로 조롱당하면서 부들부들 떠는 수밖에.
하지만 저 최태웅이라는 투수의 오른손 공은 충분히 상대할 만해 보였다. 당연히 그들의 분노는 고스란히 투지로 치환되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무엇보다 ‘십팔사사’ 쪽에는 강력한 방패가 있었다.
강대만의 투구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아슬아슬하게 스칠 뿐. 이대로라면 점수를 떠나서 출루라도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덕분에 ‘십팔사사’의 야수들은 경기 승패는 잊은 채로 최태웅 투수 공략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까앙! 까앙!
“아웃!” “세이프!” “아웃!” “아웃!”
그들 생각대로 최태웅 투수의 공은 상대할 만 했다.
컨택도 어렵지 않았고, 맞았다 싶으면 그럭저럭 앞으로 날아갔다. 깔끔한 안타도 나왔고, 야수 실책에 기댄 출루도 한 번 해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홈 플레이트를 밟지는 못했다.
“아웃!”
“큭…….”
간발의 차이로 아웃당한 타자가 분한 얼굴로 벤치에 돌아왔다. 다른 선수들도 하나같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거 그냥 포심 아니야? 그런데 왜 이래?”
“잘 때리고 있어. 운이 나쁜 거야, 운이.”
“그런데 운이 나쁜 것도 종류가 있잖아. 잘 맞은 게 야수 쪽으로 날아간다기보다는……. 살짝 살짝씩 배트에 빗맞는다는 느낌인데.”
“어, 나도 그건 좀 느낀 거 같아.”
“포심이 아니고, 무빙볼? 막 이딴 거 아니야?”
“글쎄? 그런데 막상 보면 볼 끝은 평범해. 아니, 보통 직구보다도 오히려 밋밋해.”
“기다려 봐. 어쨌든 출루는 하고 있잖아. 이러다 아다리 맞으면 콩팥까지 탈탈 털 수 있어.”
4번 이홍진 타석이 되자 최태웅은 타임을 불렀다.
왼손잡이용 글러브로 바꾸고 올라오는 모습이 아니꼬웠으나 새삼스럽게 더 울컥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도 이미 있는 대로 표정을 구긴 채였기 때문이다.
까앙! 까앙! 까앙!
“파울!” “파울!” “파울!”
연달아 커트에 성공한 이홍진이 정색한 얼굴로 최태웅을 노려보았다.
첫 타석에 삼진을 먹었지만, 그건 어떤 공인가 탐색하다가 당했을 뿐이다. 이쪽은 탐색 중인데 저쪽은 앞뒤 안 가리고 스트라이크만 쑤셔 넣으니, 카운트가 불리해져서 그랬던 것이다.
‘아까는 변화구 있을까 봐서 신경 쓰다가 당한 거고. 지금은 그렇게 안 되지.’
지금까지 상대가 던진 공은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포심 패스트볼뿐. 게다가 일부러인지 실투인지, 가끔 어이없을 정도로 한가운데 몰린 공이 온다.
그렇다면 한가운데만 기다리면서, 나머지는 모조리 커트한다.
이제 와서 숨겨둔 변화구가 날아오면?
까짓 거, 버린다.
어차피 모든 공에 대응할 수는 없으니.
“볼.” “볼.” “볼.”
하지만 의외로 투 스트라이크 이후로 날아온 공은 크게 빠지는 볼이었다. 이전 타석의 박재형이 쓰리 볼에서 풀카운트가 되었다면, 자신은 투 스트라이크에서 풀카운트가 된 셈이다.
‘역시 제구력이 나쁜 건가? 무슨 노림수가 있다기에는 너무 밑도 끝도 없잖아. 아슬아슬하면 그냥 보내볼까?’
하지만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투수가 독촉이라도 하듯이 빠른 템포로 다리를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까앙!
“이런, 씨ㅍ…….”
치는 순간,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슬아슬한 코스에 무심코 반응했는데, 빗맞은 타구가 머리 위로 높이 솟구쳤던 것이다.
내심 파울이 되기를 바랐지만, 헛된 기대였다. 포수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느릿느릿 걸어가 플라이 타구를 받아냈다.
“아웃!”
“젠장…….”
개인적으로 그는 파울 플라이를 삼구 삼진보다도 굴욕적으로 여겼다. 삼구 삼진은 낫아웃이나 주자 도루의 가능성이라도 있지. 파울 플라이는 게임에 아무런 영향도 못 주는 최악의 아웃 카운트였기 때문이다.
‘……어?’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벤치로 돌아가던 그가 흠칫했다.
깔끔한 아웃카운트였는데도, 마운드 위의 최태웅이 바닥을 차면서 구시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진 못 잡아서 분하기라도 하다는 거야, 뭐야?’
이홍진은 어이가 없어서 그를 한동안 떫은 눈빛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
까앙!
“아웃!”
굴러 오는 땅볼을 깔끔하게 직접 처리한 강대만은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희한하게도 자꾸 톡톡 건드리네.’
강대만의 피칭은 얼핏 보기에, 아니, 꼼꼼하게 뜯어봐도 위력적이었다. 건드리는 것도 힘겨워하고 있으니, 큰 사고만 터지지 않으면 실점 걱정은 없다고 봐도 됐다.
‘아까도 분명히 1, 2, 3번이었지?’
건드리고 난 뒤의 반응을 보면 안다.
얼떨떨해하는 걸 보면 실력으로 맞춘 건 아니다. 구속이 빠르다 보니까 톡 갖다 대기만 해도 빠른 타구가 나왔을 뿐이고, 그나마도 깔끔하게 처리되었다.
하지만 이런 우연이 특정 타자들한테서만 반복된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막상 뭐가 이상하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답할 말은 없겠지만.
까앙! 까앙!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한편, ‘날아오르라’의 선수들은 최태웅이 지키는 마운드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봐도 봐도 용하네.”
“도대체 어떻게 저러는 거지…….”
리그 수준을 생각하면, 최태웅의 구위는 그렇게 압도적인 게 아니었다. 투수와 타자의 컨디션에 따라서 적당히 맞고 적당히 아웃당할, 그런 공이었다.
물론, 비슷한 수준의 투수와 타자가 붙으면 투수가 더 많이 이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경기로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투수가 이긴 장면만 편집해놓은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십팔사사’의 투수만큼 믿음직스럽지는 못했다. 언제든지 실점할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실점하지 않고 있을 뿐이니까.
“어떻게든 점수를 내야 하는데…….”
“무승부면 어떻게 되지?”
“우리 리그는 승부치기일 걸? 1, 2루에다가 주자 놓고 시작하는 거.”
“그러면 우리가 불리할 것 같은데. 태웅이 공은 일단 빠따에는 다 맞고 있고…….”
출루조차 고역스러운 투수전답게 순식간에 이닝이 휙휙 흘러갔다. 경기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에는 드물게도 정규 이닝인 9회가 통째로 끝나 있었다.
“태웅아, 괜찮냐? 바꿔줄까?”
“아뇨. 쌩쌩하다면 거짓말이기는 한데…… 견딜 만해요. 저쪽 아저씨보다는. 그리고 사실 투수 할 수 있는 분도 없다면서요?”
그러면서 최태웅은 상대 팀 투수를 힐끗 보았다.
사회인 야구가 괜히 이닝이나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먹고 살기 바쁜 사회인이 정규 이닝을 풀로 소화하는 것은 상당한 혹사였다.
40세가 넘은 강대만은 선선한 날씨임에도 땀투성이가 되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명백하게 구속이 떨어졌고, 9회에는 삼진 하나 없이 안타까지 얻어맞았다.
‘저 상태로는 승부치기 못 막아. 한 명만 들어오면 그대로 끝내기니까.’
후공이 유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회 초에 한두 점쯤 빼앗겨도 아직 10회 말이라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야 상관없는 문제지만, 이 차이가 선수의 심리적 안정감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 그런데 저 새끼…….”
“왼손이네.”
‘십팔사사’ 선수들의 표정이 재삼 일그러졌다.
연장 승부치기 마운드에 올라가는 최태웅이 처음부터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왼팔, 엄청 쌩쌩할 텐데…….’
‘혹시 이런 상황까지 계산에 넣고 아꼈나? 투수전으로 연장전 올 것까지? 아니, 이 생각은 좀 오버겠지?’
배알이 뒤틀렸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1, 2루에 주자를 놓고 시작하는 승부치기에서는 투수 앞 땅볼조차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퍼억!
“스트라이크!”
3번 타자의 방망이가 거세게 바람을 갈랐다.
조금 전까지 오른손 공만 봐온 탓일까? 상대도 지쳤을 게 분명한데, 체감상으로는 1회 때보다도 구속이 오른 것만 같았다.
‘작전 좀 써야겠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가 주자들에게 이래저래 사인을 보낸 뒤에 번트 자세로 바꾸었다.
그 모습에 포수 박광석이 가볍게 혀를 찼다.
‘보내기 번트.’
마음에 안 들었지만, 승부치기라는 걸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작전이었다. 오히려 초구에 스윙을 시도해본 것이야말로 어쭙잖고 비상식적인 짓거리였다.
박광석의 사인에 1루수와 3루수가 서너 걸음씩 앞으로 나왔다.
최태웅은 그 전진 시프트를 무심하게 지켜보다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저건?’
사실, 최태웅은 번트 시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핫존과 쿨존이 바뀌는 걸 보면 상대가 번트 시도하려는 걸 한눈에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변화는 다소 독특했다. 스트라이크존 전체가 약간의 명암도 없이 짙은 푸른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이다.
‘군대에서도 이런 적은 없는데. 아무리 번트를 못 친다고 해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최태웅이 눈을 번쩍 떴다. 지금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하나 떠올랐던 것이다.
‘응? 전진수비 하지 말라고? 그리고…….’
박광석은 갑작스러운 최태웅의 사인에 의아했지만 토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라면 최태웅이 자신보다 잘 알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 2구.
최태웅의 다리가 올라가는 순간, 번트 자세로 있던 타자의 방망이가 휙 젖혀졌다. 그리고 1, 2루에 있던 주자들이 다음 루를 향해 일제히 질주했다.
‘번트인 줄 알았지?! 훼이크다, 병…… 어?’
고의 헛스윙으로 더블 스틸을 지원하려던 타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터 박스 안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을 만큼 멀찌감치 빠진 공이 날아왔던 것이다.
‘피치 아웃(Pitch Out)!’
애초에 일어서서 받은 공이다 보니, 포수로서는 송구하려고 따로 폼을 잡을 것도 없었다. 박광석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자세로 3루에 공을 뿌렸다.
“아웃!”
“……!”
아무리 사회인 야구의 도루가 ‘자동문’이라지만, 거기에도 정도라는 게 있다.
강속구.
기다렸다는 듯한 피치 아웃.
물 흐르듯이 매끄러운 송구.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세 박자가 들어맞으면 프로라도 도루 타이틀 상위 랭커가 아닌 다음에야 장담할 수 없다. 태그아웃을 당한 주자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는 듯이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역시. 스트라이크존이 너무 약했어. 아예 칠 마음이 없으니까 그랬겠지.’
자기 생각이 맞아떨어진 게 기분 좋았던 최태웅은 피식 웃으며 마운드의 흙을 발로 꾹꾹 다졌다.
‘저 새끼는 무슨 독심술이라도 하나…….’
그런 최태웅을 바라보는 ‘십팔사사’ 선수들의 눈빛은 지독한 불신감과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