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25화 (25/90)

< 괴물 배터리 -025- >

025.

사회인 야구단에 등록하면 길게는 한 달, 짧게는 10일 정도 뒤부터 경기에 나갈 수가 있다.

등록 과정에서 가장 시간을 잡아먹는 일은 협회 직원이 ‘선수 출신’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바꿔서 말해서 이것만 해결하면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일단, 생활기록부부터 떼어 와봐. 내가 어떻게든 다음 경기에 나갈 수 있게 쇼부쳐 볼 테니까.”

수재 형님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실 이것은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안 되면 포기하고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지 뭐.

아니다. 여차하면 또 유니폼 몰래 입고 뛰어볼까? 걸리면 징계 내용이 정확히 뭐지? 좀 알아봐야겠는데.

“그런데 웬일이야? 태웅이 너, 겨울이나 지나고 나면 들어올 줄 알았더니만?”

“아……. 오랜만에 경기 뛰었더니, 괜히 몸이 근질거려져가지고요. 중요한 경기 앞뒀는데, 나쁠 거 없잖아요.”

의아해하는 선수들에게 대강 그렇게 둘러댔더니 다들 납득했다. 이 상황에 내가 입단해서 나쁠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제때 등록이 될지 어떨지는 모른다. 하지만 안 되면 하는 수 없는 거고. 일단은 된다는 가정 하에 움직이기로 했다.

“웬일이야, 아들? 깨우지도 않았는데 이 시간에 다 일어나고?”

“시험도 끝났으니까, 운동 좀 하려고. 요새 하도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더니 몸이 찌뿌드드하네.”

“어이구, 진짜로 웬일이야? 철드는 소리 들리네?”

……글쎄요, 어마마마. 어쩌면 오히려 철딱서니를 엿 바꿔 먹은 짓거리를 하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스포츠가 됐건, 가장 간단하게 실력을 올리는 방법은 근육 단련이다. 힘이 세지면 대부분의 것을 더 잘할 수 있게 된다.

원래부터 꾸준히 운동하던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처럼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수험생이라면 며칠만 운동해도 급격한 상승효과를 볼 수 있다.

물론, 당장 이런 식으로 구속이 몇 km씩 쑥쑥 오를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다. 똑같은 공을 던지고도 덜 지치는 정도만 되면 일단은 충분하다.

‘문제는 미션 포인트 쌓는 건데…….’

우리 팀이 속한 3부 리그에서는 선수 출신을 최대 두 명까지 낄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세운 가설에 따르면, 포인트를 주는 것은 ‘선수 출신’ 이상의 실력자뿐. 그러므로 지금 할 일은 선출을 세 명까지 낄 수 있는 2부 리그로 승격하는 일이었다.

여차하면 또 부정 선수로 출전하는 수밖에── 그런 생각까지 하면서 초조하게 운동을 하고 있으려니, 마침내 수재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태웅아, 됐다! 이름 올라갔어!”

“진짜요?”

“홈페이지 확인해봐! 내일 바로 나오면 돼!”

오케이. 이걸로 1차 진입 장벽은 통과.

어차피 출전이 된다는 전제로 몸 관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컨디션은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꾸준히 운동한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온몸의 근육이 꽉 조여지는 듯한 느낌이, 갑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든든했다.

뻐억! 뻐억!

다음 날.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기분으로 경기장에 도착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운드에서 상대 팀 투수로 보이는 40대 아저씨가 연습 피칭을 하고 있었다. 실외인데도 미트에 박히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거야 뭐 별일이 아닌데, 개미집 쑤시고 노는 초딩들마냥 쪼그리고 앉은 우리 팀 선수들이 문제였다.

“아따, 저 소리 좀 봐라. 쥑여주네.”

“나잇값 좀 하지. 왜 우리처럼 연약한 애들한테 이렇게 행패여.”

“형. 나 그냥 집에 가면 안 되나? 게임 하고 싶어.”

“진짜 선수 출신 아닌 거 맞아?”

“…….”

저번 경기에서는 ‘이번만 이기면 2부 승격이다!’라면서 눈빛부터 이글거리더니만. 오늘은 다들 도살장에 끌려나온 소처럼 시무룩하기 짝이 없었다.

어쩐지. 저번 주 회식 자리에서 내가 말 꺼내기 전에 오늘 경기 나와달라고 옆구리 찌르는 사람이 없더니만. 내가 나와도 자기들이 점수 낼 자신이 없었다는 건가?

“누구 마음대로?”

오늘 승격 결정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신참인 나다. ‘경험치 몹’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꼭 2부 리그로 승격을 해야겠거든.

선수 출신의 타자가 두 명이나 있으면 나로서도 무실점은 장담 못한다. 아니, 그걸 떠나도 우리 팀 타자들이 점수를 내지 못하면 이겨서 승격할 수가 없었다.

“기훈이 형님. 호진이 형님. 승배 형님. 잠깐만 이리로 와주세요.”

“……응?”

“시작할 때까지 아직 한참 남았는데, 우리도 몸 풀어야죠. 입단 기념으로 오늘은 공짭니다. 배트 들고 한 분씩 오세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그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 박자 늦게야 내가 뭘 하겠다는 건지 알아들은 것이다.

“야. 조금 이따가 시합인데 무슨 배팅볼을 던진 다고 그래? 그것도 선발투수가?”

“제가 바봅니까? 당연히 생각이 있으니까, 빨리 배트 들고 이쪽으로 오기나 하세요.”

“……어?”

“저하고 배팅볼 한 거는 꾸준히 복기하지 않으면 반짝 효과밖에 없어요. 그런데 솔직히 제 배팅볼 치고 난 다음에 그만큼 복습 안 하셨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벼락치기 다시 해야죠. 빨리들 오세요.”

냉담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내뱉었더니 세 사람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는 내 눈치라도 살피듯이 눈동자를 굴리면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쟤, 쟤, 왜 저래? 무서워…….”

“우리 지금 기합받는 분위기인 거야?”

“헐……. 우리 엄마아빠도 나 혼낸 적 없는데…….”

“제수씨한테 쌍욕 먹는 거 내가 한 번 봤는데.”

“그래서 내가 결혼한 거잖아. 날 그렇게 거칠게 대한 여자는 처음이었거든. 하악하악.”

“…….”

완벽하게 틀어막을 자신이 없다면, 타자들이 점수를 내도록 만들면 된다.

상대 투수가 속구파라서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손 놓고 있는 것보다야 낫겠지.

까앙!

“엉거주춤하지 마세요! 방금 거는 차라리 헛스윙하는 게 나았어요!”

까앙!

“바깥쪽 때릴 때 자세가 무너집니다! 차라리 스텝을 하세요! 처음부터 바짝 붙어서 서시거나요!”

까앙!

“그렇다고 붙는 게 너무 노골적이에요! 훼이크를 한 번씩 섞어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우리 팀이 저쪽 피칭을 구경하던 것과 달리, 저쪽은 우리의 훈련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기껏해야 눈에 보이니까 봐준다, 라는 식으로 한 번씩 힐끔거릴 따름이었다.

하기야. 저쪽 투수 공에 비하면 지금 내가 던지는 공은 변변한 속도도 안 나오니까. 어쩌면 우리 팀 투수가 나라는 것도 모를지도.

***

“오늘 상대는 이번 시즌에 전승한 강팀입니다. 하지만 야구는 꼴찌도 1등을 이기는 거 다들 알잖아요?”

“2부 리그로 가는 문은 아직 안 닫혔다! 끝까지 한 번 해보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거 보여주자!”

“날아오르라!”

“주작이여!”

양 팀 선수들이 모두 모이고, 마침내 최종전이 시작되었다.

‘십팔사사’의 1번 타자는 상대 선수들이 기합 넣는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니? 승리욕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구호가 아닌가.

‘어? 그런데 저 사람은…….’

야수들이 각자 포지션으로 이동하자, 그는 한순간 갸웃거렸다. 마운드에 남은 것이 아까 타자들에게 배팅볼 던져주던 사람이라는 걸 알아봤기 때문이다.

‘어림잡아도 2백 개는 던져준 것 같은데……. 그러고 나서 선발투수도 한다고?’

다소 의아했지만 금세 신경을 껐다. 남의 팀 사정을 알 게 뭐라고. 힘 빠진 공 날아와서 타율 올라가면 나야 좋은…….

‘어? 왼손?’

느릿느릿 와인드업하는 투수의 모습에 그가 살짝 갸웃거렸다. 아까 배팅볼 던질 때는 분명히 오른…….

뻐어억!

“……!”

고막을 때리는 요란한 파열음에 심장이 덜컥했다.

우직할 정도로 곧게 뻗은 한복판 코스.

하지만…….

‘……빨라.’

기분 탓일까? 자신을 보는 투수의 입가에 가소로워하는 미소가 맺혀 있는 것만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