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24- >
024.
[일반 미션 ‘삼구 삼진’을 달성했습니다.]
[삼구 삼진 : 공 3개로 탈삼진을 잡아낸다.]
[5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어림잡아도 1년여 만에 다시 보는 알림창이었다.
당혹스러운 한편, 희열로 머리카락이 쭈뼛쭈뼛섰다.
‘프로한테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군대에도 사회인 야구에서 활약하다가 왔다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삼구 삼진으로 제압해도 포인트를 준 적은 없었다.
‘선수 출신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그딴 거랑 상관없고, 그냥 일정 실력 이상인 사람한테만 얻을 수 있나?’
상식적으로 유추하면 대강 그렇게 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장담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초능력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판국에 상식적인 유추는 무슨.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첫 타자와 마찬가지로, 이 타자도 스트라이크존 대부분이 사이렌처럼 온통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저쪽 팀에 선수 출신이 두 명 있다고 했던가? 그 두 명이 연달아 나오도록 타순을 짠 모양이다.
‘시험해보자.’
난 그렇게 마음먹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선수 출신’은 내가 벌레처럼 가지고 놀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까앙!
“아웃!”
첫 타자가 나한테 삼구 삼진을 먹은 것은, 바뀐 투수의 구질을 파악하려고 2스트라이크를 허비한 탓이었다. 용케 외야 플라이를 만들었지만, 이건 미션과 상관없는 평범한 아웃카운트였다.
“잘했어, 잘했어.”
“모자 깊게 눌러 써. 혹시라도 얼굴 들키지 않게.”
“어차피 저쪽에서도 사람 얼굴 다 못 알아봐. 너랑 형재는 몸집도 비슷한 편이니까. 얼굴만 가리면 알아보는 사람 없을 거야.”
“들키지만 않으면 돼.”
‘날아오르라’ 팀의 공격.
미안하게도 난 팀의 역전 따위 안중에 없었다. 빨리 마운드에 올라가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 공수가 바뀌고, 나는 괴력투를 쏟아냈다.
‘3타자 연속 삼진. 분명히 일반 미션 중에 그런 것도 있었는데…….’
알림창이 안 떠서 아쉬웠으나, 한편으로는 그러려니 했다. 혹시나 싶어서 기대한 거지, 평범한 사회인 야구선수를 제압해봤자 포인트가 없다는 것은 군대에서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짐작이 맞다면, 포인트를 줄 가능성이 있는 상대는 선수 출신인 두 명 뿐이었다.
우리 팀의 공격 차례나 다른 타자들을 상대하는 동안에는 그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말년병장일 때보다도 시간이 10배는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까앙!
“……아, 씨발.”
피 말리는 기다림 끝에 다시 ‘선수 출신’과의 맞대결이 성사됐지만, 내 입에서는 무심결에 욕설이 나왔다.
아까 삼구 삼진을 당한 게 굴욕적이어서였나? 무섭게 나를 노려보던 타자한테서 큼지막한 타구를 얻어맞았다.
중견수가 가뿐히 잡아냈지만, 이번에도 역시 미션 포인트와는 상관없는 평범한 아웃카운트였다.
‘왼손으로 던지면 좀 나을 텐데…….’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상황이라고 이성이 완전히 날아간 것은 아니었다. 부정선수로 뛰고 있는 판국에 그딴 짓거리를 해봐라. 관심 좀 가져주세요, 하고 발악하는 꼴이지.
까아앙!
“파울!”
다음 타자도 까다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스페셜 미션인 ‘투구 수 테러 진압’이나 ‘드라마틱한 승부’는 내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고의사구로 상황을 세팅하기에는 너무 경기 후반이기도 했다.
까앙!
“파울!”
‘삼구 삼진’을 노렸던 3구째가 커트되자, 난 거의 반사적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아직 물 건너간 건 아니지.
“볼!” “볼!”
공 2개가 크게 빠지자, 우리 선수들의 표정이 조금 당혹스러워졌다. 내 제구가 엄청나게 흔들리는 거라고 생각할 테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볼!”
이걸로 3볼 2스트라이크.
풀 카운트.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가상 스트라이크존도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쿨존에 공을 던져도, 헛스윙일지 범타일지 루킹일지는 뚜껑을 열어봐야만 안다. 심지어는 무조건 아웃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후…….”
나는 신중한 몸짓으로 투수판을 밟았다.
퍼억!
3구 연속으로 실투성 공이 왔기 때문일까?
타자는 눈에 힘만 빡 주고 있다가,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공을 그냥 보내버렸다.
포수와 타자가 황급히 돌아본 순간, 심판이 격렬한 몸짓으로 팔을 휘둘렀다.
“스트라이크! 아웃!”
[일반 미션 ‘풀 카운트 삼진’을 달성했습니다.]
[풀 카운트 삼진 : 풀 카운트에서 탈삼진을 잡아낸다.]
[5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됐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다.
***
“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개새끼들. 진짜 더럽게 구네.”
경기가 끝난 뒤. ‘날아오르라’의 선수들은 뒷정리를 하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사회인 야구의 진행방식은 여러 종류다. 7회까지 경기를 꽉꽉 채우는 데가 있는가 하면, 2시간이나 2시간 30분을 시간제한으로 잡는 곳이 있다.
우리 리그는 시간제한이 있는 쪽.
즉, 자기들이 2점을 앞서고 있으니까 역전 기회 자체를 안 주려고 후반에 시간을 질질 끌었던 것이다.
아니, 그런데 저기는 규정 내에서 꼼수를 부린 거지. 인간적으로 부정행위는 오히려 우리가 했잖아. 등록도 안 된 사람을 유니폼 입혀서 내보내 놓고는 무슨.
미안한 말인데,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이런다고 부정행위가 사라지지는 않지만, 부정행위로 이긴 것보다는 양심에 덜 찔리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지금 내 머릿속은 승패 따위를 신경쓸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선수 출신인지, 상대 실력 나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인 야구에서도 포인트를 모을 수 있어.’
내가 초능력에 눈 뜨고도 야구선수가 될 생각을 않는 이유에는 포인트 수집 문제도 있었다. 프로와 정식으로 시합해야만 포인트를 벌 수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프로와 경기를 하려면 나 또한 프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타자의 강점과 약점을 간파하는 ‘매의 눈’은 오로지 실전에서만 빛을 발하는 초능력이다. 어떤 스카우트도 이 능력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결국, 연습생이 되려면 초능력 없이 순수한 실력으로 입단 테스트에 붙어야 한다는 말이다. 난 그게 얼토당토않은 일이라고 여겨서 꿈도 꾸지 않았던 거고.
하지만 포인트를 얻는 조건이 ‘프로와의 대결’이 아니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눈은 좀 제대로 떠지냐? 괜찮아?”
“괜찮아. 흉터 좀 남을 거기는 한데, 좀 지나면 거의 안 보일 거래.”
6바늘을 꿰매고 온 수재 형님이 뒤풀이에 참가했다.
그때까지 상대 팀의 비열함을 까대던 선수돌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무래도 그런 게 있지. 투수들이 호투했는데도 경기에서 지면, 야수들은 아무래도 미안함을 느끼게 되는 법이다.
“그나저나 이제 진짜로 벼랑 끝이네……. 다음 주 게임 이기면 올라가고, 지면 잔류인 거 아녀.”
“그런데 다음 상대가 또 ‘십팔사사’라 가지고.”
“아, 진짜 노답이네. 나 거기 얼굴 큰 투수 아저씨 공 진짜 죽어도 못 치겠던데. 1부 리그 가도 되겠구만, 왜 여기서 양민학살 하고 지랄인지.”
“형재는…… 좀 무리겠지? 제수씨 애기도 낳았고.”
“오려면 올 수는 있지. 평생 두고두고 바가지 긁힐 거 각오하면.”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가장 센 상대를 만나게 됐는데, 이쪽은 원투 펀치가 리타이어한 셈이다. 이번에도 승격은 물 건너간 건가, 싶었는지 선수들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형. 나 아무래도 형 말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응?”
회식에 꼽사리 껴 있던 내가 옆자리에 앉은 진효 형에게 말했다. 진효 형은 입안 가득히 상추쌈을 씹으면서 의아하게 나를 보았다.
“노력해서 어중간한 것보다, 비운의 천재로 남고 싶어서 안 하는 거랬잖아. 맞아. 나 존나 개새끼라서, 천재 소리 들으면서 잘난 척할 수 있을 때에만 야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날로 먹을 수 있을 때에만.”
“야, 아니. 그, 내가 했던 말은 말이야…….”
진효 형이 쭈뼛거리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난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을 느낀 수재 형님이 ‘뭐 할 말이라도 있어?’ 라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투수가 쎈 게 뭐 대수라고들 그러세요. 우리도 점수 안 주면 결국에는 다 똑같은 걸 가지고.”
“……뭐?”
“최대한 빨리 등록하면, 저 언제부터 뛸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나는, 지금 다시 야구가 하고 싶어졌다.
아니, 해도 될 것 같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