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23- >
023.
사람들이 수험생에게 하는 말은 대개 거기서 거기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대학은 인생의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선이다. 어느 대학에 갈 것인지보다 어느 과에 갈지를 신경 써라.
그야 뭐 인생 선배들의 주옥같은 조언이지만, 세상에 방법을 몰라서 헤매는 일이 얼마나 되나.
설거지 안 쌓이게 그때그때 해라, 비 오는 날에는 차 막히니까 평소보다 일찍 나가라, 팬티는 하루에 한 번씩 갈아입어라….
근본적으로는 이런 잔소리랑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거다. 아주 주옥같지, 주옥.
아, 내가 사흘에 한 번 갈아입는다는 소리는 아니고.
‘이제 와서 무슨 깡으로 야구를 해?’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6년이다. 그 세월 동안 평범하게 대학 가는 것만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뭘 하라는 거야? 세상에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수재 형님의 말에 잠시 충격을 받았으나, 내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인생 건 도전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소시민이었으니까.
“거 참. 나 혼자서 가도 된다니까.”
“잔말 말고 차 타고 가. 괜히 헤매지 말고. 아빠 벌써 차 두고 나갔어. 아빠 오늘 전철 타고 출근했어.”
다람쥐 쳇바퀴 같은 시간이 흘러, D-Day 카운트는 기어이 제로가 되었다. 수험생 둔 집안의 D-Day가 다들 그렇듯이, 우리 집 분위기도 아침부터 경건하면서 부산스러웠다.
“수험표 꺼내 봐봐. 신분증도. 괜히 핸드폰 만지작거리다가 걸리지 말고. 반납 안 해서 쫓겨나기도 한다는 뉴스 봤지?”
“아오, 엄마. 나 재수생이거든? 수능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호들갑이야?”
“네가 좀 칠칠치 못해야지! 접때도 도대체 뭘 주워 처먹어가지고 식중독을 걸려가지고는…….”
“알았어, 알았어! 나 들어갈 테니까 집에나 가. 괜히 시험 끝날 때까지 추운 데서 기다리고 그러지 말고.”
내 참. 스물셋이나 먹어서 이러고 있으려니까 더럽게 쪽팔리네. 누가 보면 마마보이인 줄 알 거 아냐.
시험장에 대강 짐을 풀고 앉았더니, 진효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왠지 찜찜한 느낌이 들었지만, 응원 차 전화한 것일 텐데 무시하기도 뭐했다.
「싸부! 오늘 시험 날이지? 미역국 잘 먹었어?」
“……아주 그냥 고사를 지내라. 시험 미끄러지라고.”
방금 생각한 거 취소. 괜히 받았다, 시발.
「시험 몇 시부터야? 시험 중에 핸드폰 울리면 퇴실당하는 거지? 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어차피 시험 직전에 핸드폰 이름 써서 다 걷거든요? 괜히 뻘짓하지 마세요. 인간아.”
「아, 그래……. 그러면 있잖아. 듣기평가는 몇 시야? 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궁금해서.」
“시끄러워. 끊는다.”
「어? 야야야야! 알았어, 알았어! 장난이야! 끊지 마!」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지만, 의외로 이 인간이랑 몇 마디를 섞었더니 마음이 느긋해졌다. 어쩌면 수능 날이라니까 긴장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저랬을 지도 모른…… 다고 생각해줄 줄 알았냐? 시발. 용건이 뭐야?
「있잖아. 토요일에 수재 형 보러 안 갈래? 시험도 끝난 다음이니까.」
“수재 형님? 뭐, 좋기는 한데…….”
「그때가 결승전이래. 계속 엎치락뒤치락 해가지고, 아직도 승격될지 어떨지 모르겠다나 봐.」
“어이구야. 두 달도 전부터 트래직 넘버 세던 샤크즈하고는 끕이 다르네 끕이.”
「시발. 내가 늦게 올라와서 그래! 시즌 시작할 때부터 나 뛰었으면 우리 팀도 포시 올라갈 수 있었어!」
“우쭈쭈쭈. 그러셨쪄요. 그럼 내년에는 한 번 빡시게 굴러보시던가.”
「……시발. 됐어. 끊어.」
사실 토요일에 경기가 있는 것 자체는 알고 있었다. 수재 형님하고는 틈틈이 연락도 했기 때문이다. 보러 갈까 고민했는데, 마침 잘 됐네. 혼자 가기는 좀 뻘쭘했을 건데.
……그나저나 이 인간. 기어이 시험 잘 보라는 말 한마디를 안 했네.
***
「……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교육부에서는 작년과 비슷한 수준의 난이도로 변별력을 유지하겠다고 발표했으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달랐습니다. 김재석 기자가…….」
시험 끝나고 가채점을 해봤더니, 모의고사 때보다도 괜찮은 점수가 나왔다. 하지만 문제가 쉬워서 그랬던 거지, 딱히 내가 시험을 잘 본 것은 아니었다.
“미묘한데요……. 분위기 좀 살피다가 원서 넣는 게 좋겠어요.”
수능이 끝났는데도 긴장을 풀기는 조금 어려워졌다. 원서 접수로 눈치 게임을 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마감까지 날짜는 한참 남았고,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라, 시험 전처럼 시간 가는 거에 피 말리지는 않아도 되었다.
“아오, 뭐 이렇게 추울 때 야구를 하고 그러냐?”
“사회인 야구는 아무래도 구장 스케줄 짜기가 빠듯하니까. 보통은 거의 안 그러는데, 12월이나 1월에 경기하는 데도 있기는 해.”
“내 참, 그 날씨에 야구가 돼? 까딱하면 강우 콜드가 아니라 강설 콜드 나오겠네.”
토요일. 진효 형과 함께 야구를 보러 나온 나는 옷깃을 여미면서 투덜거렸다.
대충 둘러봤더니, 사회인야구를 잘 모르는 내 감각으로는 꽤 많은 구경꾼이 몰려 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선수 가족일 테지만.
“어이, 최태웅이! 오랜만이야!”
“시험은 잘 봤어?”
“약속한 거 기억하지? 너, 이제 우리 팀 들어와야 된다. 2부 리그 승격하면 빡세질 거란 말이야.”
내가 얼굴을 비추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알은 체하며 인사를 건네 왔다. 듣자하니 오늘 경기에서 이기면 승격이 결정될 거라나? 그 때문인지 다들 취미생활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눈빛이 진지했다.
“그나저나 형은 아직 멀었나 보다. 명색이 프로인데 우째 알아보는 사람이 없냐.”
“난 원래 저기 팀 사람들이랑 안 친해.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못 알아보는구만, 뭘.”
“……시발, 내가 신인왕을 탔어야 하는데. 한재진 개새끼. 뭔 고졸 나부랭이가 데뷔하자마자 10연승을 하고 지랄이야?”
우리 둘이 자리 잡고 킬킬거리는 사이에 수재 형님의 1회 초 투구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연습할 때 봐서 알고 있었지만, 수재 형님은 사회인야구 수준에서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막 0점대 방어율을 찍을 정도로 압도적이지는 않아도, 커브와 슬라이더를 섞어서 능숙하게 아웃 카운트를 쌓아갔다.
까아앙!
“마이 볼! 마이 볼!”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오랜만에 맨눈으로 야구경기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설레었다. 듣자하니 타이트하게 움직이면 일주일 안에도 선수등록이 된다던데…….
“왜? 싸부도 같이 뛰고 싶어?”
“……!”
진효 형이 불쑥 꺼낸 말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마치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한 타이밍이어서였다.
“실은 내가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거든. 야구를 좋아한다고도 하고, 재능도 있는데. 달리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야구를 안 하려고 할까.”
“……뭔 소리를 하려고 또 지랄이야?”
“들어 봐. 내가 볼 때는 이거야. 싸부는 프라이드가 존나게 높은 거지.”
“뭐?”
“솔직히 말해 봐. 초딩 때는 대충 던져도 다 이겼지? 연습 같은 거 안 하고도.”
“그거야 뭐…….”
당시에야 천재니 뭐니 추켜세워줘서 으쓱했지만 만, 지금은 대강 안다. 그 나이대에는 돌연변이 하나 튀어나와서 또래들을 학살하는 경우가 몇 년에 한 번쯤 있다는 걸.
어쩌면 프로에서 톱스타가 될 법한 자질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 왼팔 다친 시점에서 물 건너간 얘기 아닌가?
“그런데 이제는 열심히 연습해도 왼팔이 쌩쌩하던 때만은 못해. 그걸 꼴사납다고 생각하는 거지. 지금 이대로라면 비운의 천재로 남을 수 있으니까.”
“……!”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얼음송곳으로 심장을 푹 쑤신 듯한 기분이다.
모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인데, 한편으로는 가슴이 덜컥했다. 감춰둔 일기장을 들킨 것처럼 얼굴에 피가 확 쓸렸다.
진효 형을 바라보는 내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형이 도대체 뭘 안다고 그딴…….”
빠아악!
그때였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반사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뒤쫓은 나와 진효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재 형!”
“……!”
놀란 관중 몇몇이 벌떡 일어선 가운데, 선수들이 마운드로 달려갔다. 왼손으로 감싸 쥔 수재 형의 이마에서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경기장이 펜스로 둘러싸여 있다지만, 일부분은 허리 높이밖에 안 된다. 나와 진효 형은 당황해서 펜스를 뛰어넘어 더그아웃으로 갔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강습타구 맞은 거지.”
“아이고, 이거 왕창 꿰매야겠는데……?”
“눈 괜찮아? 눈 다친 거 아냐?”
의료진이 거즈로 지혈을 시도했지만, 피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응급차를 불러야 한다느니, 자기 차로 병원 가는 게 빠르다느니, 주위가 부산스러워졌다.
“형재 형은? 형재 형이 던지면 안 되나?”
“제수씨 양수 터졌다고 병원 갔어. 아까 연습 시작하기 전에.”
“아, 그럼 어떡해? 야수 아무나 올려?”
“씨발. 안 그래도 지고 있는데……. 이거 빠따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판이 아니라서 마운드 지켜야 되는데…….”
한쪽에서는 몇몇 선수가 경기 걱정을 했다.
매정하게도 보이지만, 사실 탓할 만한 일은 아니다. 취미 생활인 사회인 야구라도 이 정도 부상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편이었으니까.
“태웅아. 너 잠깐만 이리 와봐.”
“네? 아니, 저, 어? 어어?”
위험하지는 않다는 의료진 말에 안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버둥거리면서 돌아봤더니 이기훈이 굳은 표정으로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갑자기…….”
“쉿! 목소리 낮춰!”
이기훈이 손가락을 코에 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가 나한테 속삭이듯이 말했다.
“너 잠깐 투수 좀 뛰어주면 안 되냐?”
“……네?”
“형재 형이 유니폼 두고 간 거 있거든. 그거 입고 한 번만 뛰어주라. 제발!”
“아니, 무슨…….”
처음에는 얼떨떨했다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거 부정선수잖아!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한 번만! 지금 우리 던질 만한 사람이 없단 말이야. 너 어차피 우리 팀에 들어올 거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요…….”
“우리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너도 알잖아. 여기서 지면 우리 또 잔류라니까? 들키지만 않으면 돼. 거기다가 부정선수가 문제되는 건, 상금 타먹으려고 선수 출신인 거 속이니까 그런 거지. 넌 어차피 선수 출신도 아니고, 당장 다음 주 안에 입단할 거잖아. 안 그래?”
“…….”
“거기다가 저기는 선수 출신만 둘이라니까? 이게 오히려 비겁한 거 아니냐? 아, 제발…….”
등 뒤에 식은땀이 다 흘렸다. 다 큰 어른이 울상 짓고 애원하는 걸 면전에서 보니까 이만저만 난처한 게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규정 위반인데, 저렇게 구구절절 얘기하니까 뭔가 그럴 듯하게 들리기도 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결국, 나는 반쯤 분위기에 떠밀려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게 되었다. 정말로 ‘어어어어’ 하는 사이에 이렇게 된 거라서 마운드에 오르고도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깨도 못 풀었는데……. 타자는 또 뭐가 저렇게 쎈 거야…….’
설상가상으로, 정면을 보았더니 스트라이크존이 온통 붉게 빛나고 있었다. 선수 출신이 두 명 있다더니, 시작부터 맞붙게 된 모양이었다.
‘……모르겠다. 어차피 점수도 뒤지고 있는데 뭐. 진다고 내 책임이라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팀원도 아닌 나한테 던져달라고 한 시점에서, 사실은 보너스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마음속에서 자기합리화를 해낸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천천히 다리를 들었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선수 출신답게 핫존이 상당히 넓었지만, 군대에서 지겹게 상대한 진효 형만은 못했다.
바뀐 투수의 공을 최대한 많이 보려는 것이, 스트라이크존을 다루는데 익숙해진 내 눈에는 훤히 보였다. 투 스트라이크를 공짜로 갖다 바친 끝에, 타자의 방망이가 허무하게 바람을 갈랐다.
그때였다.
[일반 미션 ‘삼구 삼진’을 달성했습니다.]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땀을 닦다가 말고,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