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22화 (22/90)

< 괴물 배터리 -022- >

022.

“이걸 희망고문이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하네요.”

“네?”

“사실 최태웅 학생한테는 목표를 하향하자고 권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때마침 이렇게 등급이 올라버리니까 차마 그럴 수도 없고…….”

새로 모의고사를 치르고 난 뒤에, 상담에서 이런 코멘트를 얻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말이야 돼지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격려해주지는 못할망정, 희망고문이 어쩌고……. 그런데 뭔가 적절한 표현 같아서 자존심이 상하기는 한다. 젠장.

배팅볼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허비하게 됐는데도 성적은 오히려 조금 올랐다. 그걸 보면 머리 비우는 것도 공부의 일환이라는 말이 허황된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배팅볼 아르바이트는 4주 만에 끝났다.

기본적으로 이건 사회인의 취미생활이다. 내 보수도 결국은 팀원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 승격이 걸려 있어서 그렇지, 원래는 일주일에 한 번씩 훈련하는 것도 꽤 드문 경우였다.

대회가 다음 주로 닥쳐오자, 멤버 전원이 모여서 회식 자리를 가졌다.

“원래 뭐든지 삼세판 아니냐!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면서 한 달도 넘게 훈련했는데! 수준에 맞게 놀아야지?”

“이번에는 우리도 2부 올라가자!”

“날아오르라!”

“주작이여!”

처음에는 초대를 정중하게 사양했는데, 팀원들의 성화가 보통이 아니었다. 어쨌든 자기들 가르쳐준 선생님인데 그냥 보낼 수는 없다나 뭐라나.

수험생이라는 핑계를 못 댈 것도 없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지금까지 아르바이트한 것 자체가 억지라서 결국 순순히 참석했다. 한동안 친근하게 낯을 익혔는데, 일 끝났다고 외면하는 것도 매정해 보이기도 하고.

“그런데 너 원래 왼손잡이라고 했지? 오른손으로 야구 계속해볼 생각은 안 해봤어?”

“쓰는 손 바꾸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어떤 의미에서는 야구 처음 배우는 거하고도 비슷할 텐데.”

“그래도 어릴 때였잖아. LA에 그 유한진도 좌완투수인데 오른손잡이야. 공만 왼손으로 던지고 일상생활은 전부 오른손.”

“이승범도 있잖아, 이승범. 원래는 왼손잡인데, 유격수 하려고 우타자 했대. 유격수는 왼손잡이면 1루에 던지기 힘들잖아.”

“어? 유격수 하는데 왜 우타자를 서? 던지는 것만 오른손으로 하고, 타격은 좌타석에서 하면 되잖아.”

“그때는 옛날이잖아. 우투좌타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거지. 오른손으로 공을 던지니까, 당연히 우타석에 서야 된다. 뭐 이랬던 거야. 프로 된 다음에는 이미 익숙해져 버려서 좌타로 바꿀 엄두를 못 낸 거고.”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시도를 안 해봤다기보다, 그런 발상 자체를 못 해본 거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운동선수라는 게 또 일종의 진로잖아요? 괜히 죽도 밥도 안 되면 학창시절 날려 먹게 되기도 하고…….”

“하긴, 그것도 그렇다. 오른손을 왼손으로 바꾸는 거면 메리트가 있으니까 도전해볼 만도 한데, 왼손을 오른손으로 바꾸는 거는 좀…….”

리그에 따라서 규정이 천차만별이지만, 보통 3부에서는 선수 출신을 한두 명까지 허용한다. 선수 출신은 투수나 유격수를 할 수 없는 리그도 있지만, 그래도 있으면 든든할 수밖에 없는 전력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날아오르라’는 상위권 팀이면서도 선수 출신이 한 명도 없었다. 듣기로는 대부분 성인이 된 후에야 야구를 접한 사람들이라나?

그래선지 유일하게 정식 선수였던 나에 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뭐, 사회인 야구에서의 ‘선수 출신’은 고교대회 등록 여부로 따지는 거라서, 나도 엄밀히 말하자면 선수 출신이 아닌 셈이지만.

“그러고 보니 수능까지 한 달쯤 남았나?”

“네.”

“전공은 어떻게? 역시 야구 관련인가? 중고등학교 때 접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늦은 건 아니잖아?”

수재 형님이 맞은편 자리에서 젓가락질하며 담담하게 물었다. 수험생이라는 내 신분을 생각하면 한 번쯤 나올 화제라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여기에도 야구 얘기가 끼어들 줄은 몰랐다.

“상상도 안 해봤다면 그건 거짓말인데……. 솔직히 지금 와서 다시 야구한다는 건 오버죠.”

왼손잡이를 오른손잡이로 교정하는 게 애들 장난인가? 한두 달 사이에 뚝딱 바뀌게?

오른손을 왼손만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구속이 얼마나 나올지는 미지수다. 어깨는 타고나는 거라니까 웬만큼 되리라 생각하지만, 프로한테 씨알이 먹히려면 몸부터 만들어야지.

초등학교 때 야구를 그만둔 지라, 던질 수 있는 공도 기껏해야 직구 하나뿐이다. 성장기에 관절 다친다고 초딩들한테는 변화구를 안 가르치기 때문이다. 프로야구를 보면 변화구 하나 장착하는 데만도 반 시즌씩 걸리고 그러지?

주자 견제처럼 자잘한 기술도 처음부터 익혀야 한다. 초등학교 때는 리드 한계선 때문에 도루를 크게 신경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숙제를 풀면 20대 중반은 되어 있지 않을까?

게다가 결정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이 모든 걸 해결해도 비로소 출발선에 선 것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서른에 처음 야구를 시작해서 메이저리거가 된 신화의 주인공도 있다지만……. 그러한 얘기가 ‘신화’라고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대충 그런 이유를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았더니, 수재 형님이 피식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고, 내 반응을 재밌어하는 아빠 미소에 가까웠다.

“왜 그러세요?”

“미안. 야구 쪽으로 가볼 생각 없느냐는 말을, 넌 당연하다는 듯이 프로선수 얘기라고 생각하는구나 싶어서.”

“……네?”

“아니, 개인 차이일 수도 있기는 한데. 나라면 당연히 전력분석원이나, 스카우트나, 심판이나……. 뭐 그런 쪽을 먼저 생각했을 거거든. 프로는 솔직히 언감생심이지.”

아, 그게 또 그렇게 되나? 하지만 내가 특이한 거야? 보통 야구를 진로로 어쩌고 하면 프로선수부터 떠올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고?

“어렵게 듣지 마. 그냥 좀 별나다 싶어서 그래. 이만큼 뚜렷하게 관심사가 있는데도 진로는 없다는 게.”

“…….”

명치를 쿡 찌르는 듯한 말에 나는 좀처럼 표정관리가 안 되었다.

사실 뭐 이건 고3 진로 상담 때 지겹도록 들어온 잔소리였다. 그래도 어쩌나?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는 모르겠고, 그때는 야구를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군대에서 다시 야구를 해볼까 하는 충동도 느꼈으나, 제대한 뒤로는 반쯤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이성적으로 내 장래를 생각하면 당연한 판단이었다.

거기서 누린 영광은 도깨비 방망이 같은 초능력 덕분이지 내 힘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애초에 왜 입단을 거절하고 배팅볼 투수 아르바이트 같은 해괴한 짓거리를 했겠나. 배팅볼 투수라면 갑자기 초능력이 사라져도 크게 상관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싫어도 선수 경력 때문에 억지로 마운드에 떠밀려 올라간 군대에서와는 사정이 다르다. 모두의 믿음을 짊어지고 마운드에 올랐는데, 갑자기 초능력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혹시 진효 형한테 무슨 말 들었어요?”

“……응?”

내가 불시에 내지른 잽에 수재 형님이 움찔했다.

이거 봐. 딱 걸렸어.

“그 인간이 툭하면 그러거든요. 저는 야구해야 되는 사람이라고. 지금 시작하기에도 늦은 거 아니라고.”

“…….”

진효 형이 어떤 생각으로 나를 부추기는 건지는 대강 상상이 간다. 아마추어 수준의 공으로 프로인 자기를 간단히 제압하는 ‘센스’가 있으니, 훈련으로 스펙만 쌓으면 성공은 보장된 거라는 거겠지.

생각해보니 ‘야구를 하는 최태웅’에 대한 미련은, 어째 항상 남들이 더욱 강하게 느끼는 것 같다.

“만약에 형님은 말이에요.”

“응?”

“어느 날 갑자기 야구하는 능력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래도 지금 야구 계속하실 거예요?”

“……무슨 소리야? 시한부야? 아니면 부상?”

“그냥 액면 그대로 생각하세요. 뭐가 됐건, 그냥 대뜸 야구하는 능력이 없어져요. 프로에서 통할만한 실력은 되는데, 언제 갑자기 그렇게 될지 몰라요. 그래도 ‘지금’ 야구하느라 시간 낭비하실 거예요?”

“……?”

수재 형님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하기야. 감상적이 돼서 무심코 지껄였는데, 내가 생각해도 뭐 이런 선문답 같은 소리가 있나 싶었다.

그래도 일단 입 밖에 냈더니, 꼭 대답이 듣고 싶어졌다. 내 판단은 이성적이었다는 걸, 다른 사람한테도 확인받고 싶어졌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야구 할 마음 자체는 있는 거야? 그 사람한테?”

“네. 야구는 좋아해요.”

“그러면 당연히 하겠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역시 그렇…… 예? 한다고요?”

나는 한순간 당황해서 눈을 끔뻑거렸다.

수재 형님은 그런 나를 조금 이해가 안 된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부상으로 선수생활 언제 쫑날지 모르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잖아. 언제 갑자기 야구하는 능력이 사라질지 모른다면 더더욱. 야구 할 능력이 있을 때 실컷 해둬야 하는 거 아냐? 야구 좋아한다며.”

“…….”

당연한 거 아니냐는 그 말에, 난 심장을 뭔가로 푹 찔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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