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21- >
021.
까앙!
“방망이가 좀 허겁지겁 나오는데요? 마음의 준비 안 하고 계셨어요?”
까앙!
“너무 위축되셨어요. 못 쳐도 상관없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뻥뻥 휘두르세요.”
까앙!
“너무 패턴을 읽으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모든 코스가 커버 안 되면, 차라리 특정 코스는 버리세요. 확실히 잡을 수 있는 코스만 노려보세요.”
세 번째 세트가 끝나자, 이기훈의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지켜보던 한수재는 조금 의아해졌다. 고작 스윙 20번에 땀범벅이 될 만큼 이기훈의 체력이 저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건 지쳤다기보다도…… 정신을 못 차린다고 표현해야 하나?
“그러면 다음 분?”
“……내가 해본다.”
“아니, 나나나! 내가 먼저 해볼래!”
“잠깐만! 나도 나도!”
옆에서 구경하자니 신기해 보였던 걸까. 최태웅이 돌아보자마자 사람들이 티격태격하며 순서를 다투었다.
까앙! 까앙! 까앙!
하지만 누가 나오건 간에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세트를 신나게 두드리고 나면, 2세트는 느닷없이 찬물을 뒤집어썼다. 코멘트가 첨가된 3세트까지 치르고 나면 하나같이 뭐에 홀린 것처럼 휘청휘청 물러났다.
“아니. 진짜로 어떻게 저렇게 되는 거지?”
“던지기는 다 똑같이 던지는 것 같은데…….”
“일부러 맞춰주는 건가?”
“그게 말이 돼? 아까나 방금이나 똑같은 코스인데. 아까 던지면 아웃이고 지금 던지면 안타가 될 걸 어떻게 미리 알아?”
“시벌, 무슨 독심술이라도 하나?”
구경꾼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얼핏 보기에는 구질이나 속도도 변함없고, 상하 좌우 불규칙한 볼 배합이다. 그런데 왜 언제는 깡깡 맞아 나가고, 언제는 빗맞고 있는 걸까?
직접 타석에 선 사람들의 상태는 얼이 빠졌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이 안 되었다. 방망이를 내려놓고도 뭔가에 홀린 듯이 내내 멍하니 초점을 놓고 있었다.
“이거였구나. 신 내림인가 뭔가 하던 게.”
“신 내림이요? 저 말씀 하시는 거예요?”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최태웅이 반응했다.
한수재는 약간 머쓱해하면서 끄덕였다.
“진효가 그러더라고. 분명히 신 내림 받아서 던지는 거라고.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나 뭐라나.”
“……아이고, 유치하기는.”
최태웅이 뜨끔한 얼굴을 한 듯했지만 한수재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기막혀서 해본 소리였을 뿐이니.
“괜찮네. 배팅볼 투수를 돈 주고 쓴대서 오버한다 싶기도 했는데…….”
“응. 연습에 도움 될 것 같아. 감 잡기에 좋네.”
어쨌든 일당 15만 원짜리 배팅볼 투수 고용에 대한 팀원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최태웅의 어깨가 고무로 된 것도 아닌지라, 배팅볼을 던지는 건 상위타선 4명만 상대로 했다. 그래도 오늘 던진 공만 240개에 달하는 숫자였다.
실전에서 필사적으로 던지는 공과 불펜에서 연습 삼아 던지는 공은 소모도가 전혀 다르다. 프로 투수도 등판 전에 수십 개씩 던져서 어깨 푼다는 걸 생각하면 지나친 혹사는 아니었다.
“오늘 수고했다. 맛있는 거 사 먹고, 공부 열심히 하고, 다음 주에 보자. 쿨다운(정리운동) 충분히 하고, 집에서 자기 전에 스트레칭 하고.”
“감사합니다, 형님!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뒤풀이까지 끝나고, 한수재는 최태웅에게 일당 봉투를 건네주었다. 용돈 주는 셈 치고 5만 원짜리 한 장을 더 넣었다고 했더니, 최태웅은 입이 함지박만 해졌다.
“오늘은 나부터 좀 하자.”
“뭐야? 했던 사람만 계속하기 있나? 돌아가면서 해야 할 거 아니야!”
“형은 천천히 해도 되잖아요. 우리 당장 시합이 코앞인데, 클린업부터 벼락치기를 해야지.”
다음 주 훈련 날이 되자, 사람들이 자기 먼저 배팅볼을 치겠다며 티격태격했다.
그 다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한수재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순서에 밀린 사람들의 표정이 제법 뚱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정색한 건 아니지만, 장난스럽게 삐친 수준도 아니었다.
“뭘 또 그렇게……. 나라도 배팅볼 몇 개 던져줘?”
“아뇨. 저게요, 형님이 던지는 공이랑은 느낌이 완전히 달라요.”
“뭐가 어떻게 다른데?”
“아, 그게 뭐라고 해야 하나……. 사실 공 자체는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거든요? 그런데 훅 들어온단 말이에요. 딱 그 순간에 방심한 코스만 골라서.”
“뭔 소리야, 그게?”
“그러니까 외출할 때 뭘 깜빡하고 나왔다고 쳐봐요. 그런데 문 나선 직후에 ‘핸드폰 챙겼어?’하고 말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아!’하고 정신이 번쩍 들잖아요. 공 하나 볼 때마다 그런 느낌이 반복된단 말이에요.”
“……뭔 소리야, 도대체?”
‘미경험자’들은 그나마 나았다. 신기하다며, 자기도 한번 해보고 싶다며 기웃거리고 있었을 뿐이니.
그러나 ‘경험자’들은 첫 타자의 배팅볼 타격이 끝나자마자 눈에 핏발까지 세우고서 달려들었다.
“아, 왜요! 저라고 했잖아요!”
“발부터 들이밀면 다야? 그러라고 한 적 없잖아!”
“다음은 나라니까!”
한수재는 금단증상 시달리는 약쟁이 같은 그들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저까짓 배팅볼이 뭐라고. 배팅볼 때린다고 타격 실력이 쑥쑥 오르면 누가 고생을 하나.
다음 주에는 가볍게 몸만 풀고서 청백전을 했다.
사회인 야구는 어디까지나 취미활동. 프로나 학생처럼 이 악물고 하는 연습만 해서는 당연히 즐거울 리 없었던 것이다.
까아앙!
“어어? 어? 어어? 가나요? 가나요?”
“우와아아아! 이런 미친!”
“넘어갔다!”
1회 초. 이기훈이 느닷없이 홈런을 때렸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굉장히 드문 일이지만, 한 번도 없었던 일은 또 아니기 때문이다.
마운드를 밟기도 전에 득점지원부터 받은 한수재는 기분이 좋아서 실실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힘껏 던진 직구가 경쾌한 금속음을 토해내기 전까지였다.
까아앙!
“뛰어! 뛰어! 계속 돌아!”
“스톱! 스톱! 좋았어!”
“3루타! 바로 따라가자! 아자자!”
마운드에 올라가자마자 회심의 결정구가 큼지막한 장타를 얻어맞았다.
벌써 동점이 된 것처럼 들썩이는 백팀의 모습에 한수재는 입안이 텁텁해졌다.
‘방금 기막히게 코너 걸쳤는데……. 기왕 때릴 거면 2구를 때리지. 아깝게스리.’
아쉬웠지만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야구가 다 이런 거지. 투수가 공 던지다가 장타 하나 맞은 건데, 그게 무슨 희한한 일이라도 된다고.
2번 타자에게도 안타를 맞아서 기어이 1실점 했지만, 그 이상으로는 무너지지 않고 잘 틀어막았다. 오늘 자기 공이 안 좋은가 싶었지만, 이어지는 2회는 평소보다도 압도적으로 삼자범퇴를 뽑아냈다.
문제는 3회였다.
까아앙!
“……!”
경쾌한 타격음에 고개가 뒤로 홱 돌아갔다.
중계 플레이로 용케 2루타로 막았지만, 바람 타기에 따라서는 담장을 넘어갔을 수도 있는 타구였다. 한수재는 가슴이 다 철렁했다.
“이것들이 오늘 왜 이래? 도핑한 거 아니야?”
“왜, 뭐? 검사해볼래? 보는 앞에서 쉬하면 돼? 내 흑산도 지렁이 보고 기 안 죽을 자신 있어?”
“아이씨! 벨트 풀면 뒤진다!”
수비보다 타격을 먹고 사는 팀이지만, 그렇다고 타격이 날고뛰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벌써 이런 타구가 두 번이나 나오니, 한수재로서는 얼떨떨할 법도 했다.
이때부터 피칭이 조금씩 흔들렸다. 승부하기가 께름칙해서 슬금슬금 피했더니 볼넷이 연달아 두 개나 튀어나왔던 것이다.
까아앙!
“우와! 이런 미친!”
“또 넘겼어!”
“저 새끼 저거 도핑 테스트 해봐야 돼!”
다행인 것은 다음 이닝에 올라온 백팀 투수도 비슷한 패턴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뒤로는 점수 차이가 벌어지면 따라가고, 따라가면 벌어지는 난타전이 이어졌다. 투수들에게는 가장 피가 마르는 패턴이었다.
“어떡해? 6대 6인데. 끝장 볼까? 아니면 무승부 해?”
“아, 몰라, 몰라. 무승부 해요. 팔 아파.”
“하기 싫어.”
경기 전개를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벌레 씹은 얼굴의 투수진과 달리 야수들은 싱글벙글했다. 특히나 난생처음으로 한 경기 2홈런을 때린 이기훈은 표정관리가 안 돼서 입꼬리가 녹아내렸다.
“나, 아무래도 대오각성한 거 같아. 타격에 막 깨달음이 얻어진 것 같아.”
“이 새끼는 허구한 날 각성했대.”
“타격을 깨달은 게 아니라, 술이 깬 거겠지.”
“아니라니까! 태웅이 공 받아치면서 파바밧! 하고 딱 꽂히는 게 있었다고. 그 뭐냐, 무릎으로 공을 보는 느낌? 예상하는 게 아니라 공의 기척을 느껴서 때리는 거야! 빠악! 이렇게, 빠악!”
“아, 정신 사나워! 가만히 있어!”
짜증 부리는 투수들 사이에서 이기훈이 약 올리듯이 킬킬거렸다. 한수재도 그 모습을 뚱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태웅이랑 배팅볼 한 사람들. 오늘 재형이 빼고 다 3안타씩 때렸네? 재형이도 2안타……. 어?’
한순간,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야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피식 비웃을 법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한 거야. 세례받는 것도 아니고. 그까짓 배팅볼 때려봤다고 타격이 는다는 게…….’
스스로 돌이켜봐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 번 떠오른 그 생각은 진드기처럼 뇌리에 들러붙어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형, 걔를 우리랑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천재니 뭐니 하는 수준이 아니라, 종족이 달라요. 걔가 그렇다면 무조건 그런 거야. 이해하려고 하면 안 돼. 걔 눈에는 그냥 우리 같은 지구인 눈에는 안 보이는 뭐가 보이는 거라고.
투수를 소개해달라고 했을 때. 자기 ‘싸부’에 대해서 침 튀기며 떠들던 박진효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약장수 허풍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보여서 반쯤 흘려들은 말들이었다.
-수험생을 선수랍시고 추천하면 어떡하냐고? 형은 싸부를 아직 잘 몰라서 그래.
-솔직히 한 사람의 야구인으로서. 그런 괴물이 야구 말고 딴짓하는 거…… 나는 눈 뜨고 못 봐.
-뭣보다…… 싸부도 분명히 야구 좋아한단 말이야.
-멍석만 깔아주면, 싸부도 알아서 다시 야구하고 싶어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