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20화 (20/90)

< 괴물 배터리 -020- >

020.

실제 투수를 상대하는 훈련과 배팅 머신을 상대하는 훈련은 효율이 전혀 다르다. 애초에 타격이란 공이 날아오는 타이밍을 몸에 익혀서 받아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나기 같은 펀치를 모조리 피하는 복서도 반사신경 자체는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다. 경험적 예측과 익숙함으로 대응하는 거지, 눈으로 보고 반응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한 마디로 배팅볼 투수가 있으면 실력 향상에는 큰 도움이 된다는 거지.

하지만 사회인 야구라면 ‘꼭 돈 주고 고용해야 하나?’ 싶은 보직이기도 하다. 훈련 따위는 하지 않고, 시합 날에만 모이는 중상위권 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어. 그런데 좀 갑작스럽기도 하고, 내가 그쪽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니까. 알아보고 따로 전화해줄게.」

수재 형님은 잠시 침묵했다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도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는 자각쯤은 있기에 딱히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전화가 온 것은 다음 날 점심 무렵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좀 어리둥절하기는 해. 우리도 회비 모아서 전문가 초빙해가지고 레슨받을 때가 있기는 하거든. 그런데 이때는 주루나 수비나, 이것저것 전반적으로 다 봐주시지.」

“…….”

「토스 배팅이나, 배팅 머신 때리는 것보다는 배팅볼 투수가 좋다는 거 당연히 알지. 시합 나갈 투수가 어깨 써가면서 던져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일부러 그것만 따로 고용해서 훈련할 정도냐고 묻는다면 좀…….」

“역시 안 될까요?”

내가 좀 오버를 한 걸까? 2부 리그 승격 코앞에서 자꾸 물먹었다고, 요새 일주일에 한 번씩 훈련한대서 찔러본 건데…….

말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움츠러 들었더니, 전화 너머에서 수재 형님이 피식 웃었다.

「또 그렇지는 않고. 진효가 그렇게 침 튀기면서 빨아대는데, 뻘소리 하는 건 당연히 아니겠지. 그냥 페이를 얼마나 맞춰줘야 할지가 감이 전혀 안 와서.」

“아, 페이라면 제가…….”

「15만 원이면 어때? 주에 한 번 나와서 훈련 준비나 뒷정리 거들어주는 것도 다 포함해서.」

한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뭘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서였다.

“15만 원이라고요……?”

「어. 적당한 코치 한 분 모셔오면 우리가 보통 20에서 30쯤 쓰거든. 그런데 배팅볼 투수면 그분들만큼 전문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잖아. 그래서 그 이상은 조금 힘들 것 같은데……. 모자란가?」

“아, 아닙니다! 모자라기는요!”

일본에는 연봉 1천만 엔짜리 ‘타격투수’도 있다지만, 우리나라에서 ‘배팅볼 투수’에 대한 인식은 아르바이트 수준이다. 프로 구단에서도 연봉 5백만에서 1천만 원 정도라나.

일당 5만 원 정도를 생각한 나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얘기였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실망하시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아이고, 뭘 또 그렇게까지야. 쓸모없으면 확 잘라버리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

“걱정하지 마십쇼! 한 주만 더 나와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세상은 아직 썩은 게 아니었어! 유유상종이라는데, 왜 이런 분이 박진효 같은 인간과 어울린단 말인가!

“처음 뵙겠습니다. 최태웅이라고 합니다.”

“오, 이 친구가 박진효가 말했던?”

주말이 되자, 훈련 목적으로 대절한 중학교 운동장에서 팀 ‘날아오르라’의 멤버들과 만났다.

40대로 보이는 두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 수재 형님과 비슷한 또래였다. 원래는 5명이 더 있는데,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훈련에만 못 나왔다고 했다.

“우리 훈련이 언제부터 이렇게 고급져진 거야? 배팅볼 투수 같은 걸 다 굴리고?”

“간지 쩌는데? 완전 전문적이야.”

“승격 물먹으면 존나 갈구려고 떡밥 까는 거 아니야? 마누라 바가지도 지겨워 죽겠구만.”

“아, 형님. 부정 타는 소리 좀 하지 마십쇼. 이번에는 올라가야죠.”

“아무튼 반갑다. 이름이 최태웅이라고?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다행히도 ‘쓸데없이 무슨 배팅볼 투수?’하면서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신기하거나 별나다는 얼굴로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정도였다.

그런 걸 떠나서도 사람들이 하나같이 인상이 좋았다. 내가 받는 페이에는 잡일 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누구 하나 구경만 하는 사람이 없었다. 10여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다 보니 몇 분도 안 돼서 훈련 준비가 뚝딱 끝나버렸다.

“오오오!”

“야, 이거 좀 웬만한데?”

준비를 마치고, 내가 연습 삼아서 던져본 공에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군대에서의 경험 덕분인지, 오른손으로 던지는 것도 제법 익숙해져서 구속이 올랐다. 3부 리그 최상위권인 이 사람들 표현에 따르면 ‘못 칠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신경 써야 할 수준’이라고 했다.

“전 대충 풀었는데, 누구부터 하시겠어요?”

“나부터! 나부터 하자!”

이기훈이라고 소개했던 남자가 들뜬 얼굴로 타석에 들어왔다. 처음 하는 배팅볼 훈련이라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도 훈련은 않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둘러서 있었다.

‘저거는 아직도 보이는구나.’

타석에 사람이 서자마자 반투명한 스트라이크존이 시야에 나타났다.

오른팔 구속이 올랐는데도 핫존이 넓은 걸 보면 수준이 다르긴 하네. 하기야, 군대에서는 운동신경 되는 사람들 모아서 야구를 한 거고. 여기는 처음부터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니까.

초능력의 건재함을 확인하자 안도감이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초능력이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배팅볼 투수일 뿐이라 스트라이크존이 안 보인대도 큰일 날 거야 없다.

그래도 초능력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천지 차이다.

짐작대로라면, 진효 형이 프로에서 날뛰는 게 초능력을 이용한 ‘족집게 과외’ 덕분일 테니까. 초능력이 사라졌다면 오늘 나는 ‘정말로’ ‘단순한’ 배팅볼 투수밖에 할 수 없었을 거다.

‘첫 단추가 중요하지. 만약에 진효 형 포텐 터진 게 우연이 아니라면…….’

까앙! 까앙! 까앙!

투구를 시작하자, 경쾌한 금속음이 운동장 구석구석에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 퍼졌다.

스윙할 때마다 공이 자석이라도 된 것처럼 방망이에 달라붙는다. 빨랫줄 같은 타구가 쭉쭉 뻗을 때마다 구경꾼들이 ‘오오오!’하고 탄성을 냈다.

“이야, 이거 진짜 연습 좀 되겠는데?”

“때리는 족족 맞아 나가네. 신기하게.”

“우리 이걸로 저녁 내기나 할까?”

“말도 안 돼. 기훈이가 저렇게 잘 때린다고? 왜 치는 족족 날아가냐? 이거 무슨 트릭 있는 거 아냐?”

“트릭 같은 소리 한다. 형님이 인마, 지금 대오각성하고 있는 중인 거야!”

공 20개 중에서 19개의 장타를 뽑아낸 이기훈은 의기양양해서 으쓱거렸다.

사람이 던지는 거라고 생각하면 만만찮은 구속. 그런 공이 상하 좌우 무작위로 꽂히는데도 깡깡 맞아 나가니, 타자로서 신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진효 형한테 이거 했을 때는 일부러 맞아주는 거 아니냐고 바로 알아차리던데. 뭐, 이런 게 수준 차이인가?

“그러면 이번에는 치기 어려운 공으로 스무 개 가볼게요. 괜찮으시죠?”

“뭐?”

내가 불쑥 꺼낸 말에 이기훈이 눈을 끔뻑거렸다.

한순간 어리둥절한 구경꾼들이 뒤늦게 말뜻을 이해하고는 킬킬거렸다.

“야, 거봐. 봐준 거였다잖아.”

“어쩐지. 지금 이거는 말이 안 됐다니까.”

“넌 이제 뒤진 거다. 안 봐준단다.”

“어쭈구리? 해보자 이거지?”

어쩌면 도발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인데, 다행히도 이기훈에게서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어디 한 번 붙어보자, 라면서 승부욕 넘치는 눈빛으로 방망이를 고쳐 잡았을 뿐이다.

나는 살짝 웃으면서 와인드업했다.

까앙!

“……큭!”

이기훈이 의기양양하게 쳐낸 타구는 땅에 처박혀 투수 보호용 그물망 앞으로 굴러 왔다.

정식 시합이었다면 투수 앞 땅볼.

“거봐! 봐준 거였네!”

“허접 쉐키. 쟤가 19개를 연속으로 때렸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라니까?”

킬킬거리는 구경꾼들 때문인지 이기훈의 표정이 살짝 벌게졌다. 이기훈은 방망이를 고쳐 잡고서 진지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까앙!

“오예! 서드 플라이!”

까앙!

“오, 떴다, 떴다! 꽤 멀리 가는데?”

“에이, 저건 센터 플라이지. 멀리 나가면 뭐해?”

까앙!

“유격수 땅볼! 병살 코스요!”

까앙!

“오오, 또 떴다. 피처 플라인가?”

까앙!

“오오오, 또 땅볼!”

까앙!

“오오오…….”

까앙!

“오…….”

까앙!

“…….”

투구 수가 하나하나 늘어날 때마다,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이기훈이 헛칠 때마다 쏟아지던 야유와 놀림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까앙!

“……또?”

“……뭐야, 이거?”

마지막 20구째.

데굴데굴 굴러가는 1루 땅볼성 타구를 보면서 사람들이 무심코 숨을 죽였다. 배트를 직접 휘두른 이기훈에 이르러서는 묘하게 안색이 핼쑥해져 있기까지 했다.

“2개밖에 못 친 거야? 20개 중에서?”

“기훈이가?”

“…….”

사람들이 멀뚱멀뚱하게 서로 마주 보았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로서는 진효 형한테서 종종 봐온 반응이었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자, 그럼 다음에는 공 하나 던질 때마다 코멘트 한마디씩 해드릴게요. 진효 형하고도 그런 식으로 연습했거든요. 아마도 도움이 될 거예요.”

새로운 공 박스를 옆에다 놓으면서 내가 말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기훈이 괜히 찔끔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