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19- >
019.
“다이빙 캐치라는 게 말이야! 투지만 가지고서 되는 게 아니거든? 낙구 지점하고 타이밍 중에 하나만 삑사리 나도 안 하느니만 못한 게 된단 말이야! 화려한 다이빙 하나에 토 쏠리는 수백 번의 연습이 숨겨져 있다고!”
9회 말 2사 만루. 서커스 같은 다이빙 캐치로 승부를 지킨 진효 형이 아니꼬우리만큼 거들먹거렸다.
그날, 경기가 끝나자 선수단 가족석에 있는 나를 봤는지 진효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경기만 보고 슥 가버리는 것도 뭐한지라 ‘우리’는 고깃집에서 자리를 가지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야구 보면서 대충 얘기를 해봤는데.”
한수재 씨가 느릿느릿하게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최태웅 씨는 아무 얘기도 못 들은 것 같더라고. 내가 누군지도 못 들은 것 같고.”
“아, 맞다. 미안해요. 싸부가 꼴에 또 튕기는 맛이 있어가지고. 오늘 안 온다길래 말을 못 했죠.”
“그래서 뭐? 내 탓이라고?”
난 께름한 눈으로 진효 형을 쏘아보았다.
입안에 든 쌈을 꿀꺽 삼킨 진효 형이 가볍게 ‘흠흠’ 헛기침하고서 말했다.
“일단 소개부터 하자. 이쪽은 내가 전에 말했던 싸부. 최태웅이. 그리고 이쪽은 한수재. 우리 형 친구이기도 하고, 나하고도 어릴 때부터 자주 놀던 동네 형.”
“…….”
“이 형이 사회인 야구 뛰고 있는데, 형네 팀이 대대로 피처가 좀 후달리거든. 그래서 뭐 쓸 만한 피처 없냐고 그러길래 내가 너 추천했어.”
이미 통성명한 사이라 어색하게 묵례만 하다가 말고 내 몸이 딱 굳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곧바로 쏟아내면 모양이 안 살아서 일단 침묵했다.
뭐냐, 이 뽕 맞은 시츄에이션은?
“……그 얘기를 왜 이제야 하는데?”
“싸부가 존나 까칠한 도시 남자니까. 까놓고 말해서 미리 말하면 안 왔을 거잖아. 설득을 하려 해도 얼굴 맞대고 해야지. 전화로 말했는데 안 내키면 끊고서 잠수 탈 거 아니야?”
“…….”
이 인간,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어…… 가 아니라!
군대에서나 사회에서나 한결같은 4차원이다.
이 인간은 뭔 세상만사가 이렇게 다 지맘대로냐
“나 재수생이라는 소리는 콧구멍으로 들었냐, 똥구멍으로 들었냐? 수능까지 D-Day 세고 있다니까 뜬금없이 뭔 사회인 야구 타령이야?”
“에이, 재수생이니까 하는 소리지. 싸부 원래는 공부 좀 했다메? 그럼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한 번씩 머리 식히러 나오는 게 좋지.”
“땡초라면에 캡사이신 뿌려 먹는 소리 하고 있네. 회비는? 유니폼은? 장비값은? 땅 파면 솟아나와?”
“야야야, 싸부가 야구하겠다는데 아무렴 내가 멀뚱멀뚱 보고만 있을까 봐? 그딴 거 필요 없어! 싸부는 몸만 와, 몸만. 군대에서 해준 코치비라고 생각하고 내가 대신 내줄 테니까.”
“통 큰 척하지 마라. 그게 문제가…….”
“됐어요, 됐어. 딱 여기까지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가를 파르르 떨면서 따지는데, 한수재 씨가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뚱한 눈으로 쳐다보았더니 한수재 씨가 난처한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분위기 보니까 진효가 대뜸 머리부터 들이밀었네요. 자발적으로 하고 싶어서 나오는 거라면 몰라도, 수험생이라는데 들이대고 보면 안 되지. 이 새끼는 어떻게 이 나이가 되도록 철이 안 드나 몰라?”
“철이 안 들기는 내가 뭐가? 그리고 형은 지금 나랑 같이 권유해야 되는 타이밍이에요! 싸부는 형이 생각하는 그런 투수가 아니야! 싸부만 영입하면 2부 리그 승격은 똥 싸면서 방귀 뀌는 것보다 쉽다니까?”
“넌 닥치고. 아무튼, 오늘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하필이면 내가 이 또라이 새끼한테 투수 없냐고 물어봐가지고 엄한 사람한테 민폐를 끼쳤네.”
“……형님으로 모셔도 될까요?”
내가 손을 덥석 잡자, 한수재 씨가 흠칫 놀랐다.
하지만 시발. 나는 지금 맹렬하게 감동하고 있다고. 세상에, 저 인간이랑 아는 사이면서 정상인이라니! 드디어 저 인간을 같이 씹을 동지가 생겼다!
“말씀 편하게 해주십쇼. 제가 형님한테 한 잔 올리겠습니다.”
“어? 아, 아니. 내가 차를 가져와서…….”
“그러면 음료수라도 한 잔!”
“…….”
대충 ‘용건’이 일단락되자, 이러쿵저러쿵 진효 형을 씹으면서 잡다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듣자하니 수재 형님은 제법 잘 나가는 인테리어 회사의 대표였고, 야구팀도 수준이 있었다. 3부 리그 꼭대기에서 2부 승격을 노리다가 한 번씩 물먹고 떨어지는 정도 같았다.
진효 형도 내일 시합 때문에 술은 안 시켰지만, 야구라는 공통 관심사가 있는지라 새벽까지 제법 흥에 겨워서 수다를 떨었다. 버스나 전철은 한참 전에 끊겼기에 집까지 수재 형님의 차를 얻어탔다.
“오늘 아무튼 재밌었다. 공부 잘하고.”
“예. 저도 오늘 오랜만에 머리 잘 식혔습니다, 형님.”
“수능 잘 보고 나면은 연락 한 번 해라. 시험 끝나면 한 번쯤 팀 구경하러 올 수도 있잖아?”
“예, 물론입니다! 들어가십쇼, 형님!”
다 큰아들인데다가 술 냄새를 풍긴 것도 아닌지라 새벽에 들어왔다고 잔소리를 듣지는 않았다.
간만에 바람을 쐬어서 그런가? 아침에 일어났더니 머릿속이 개운했다. 이래서 공부만 하지 말고 종종 머리를 식힐 필요도 있다고들 하는 거겠지. 막상 자발적으로 쉬려고 하면 D-Day가 신경 쓰여서 안 되지만.
***
“아, 혹시 이 댁에 사시나요? 최진석 씨?”
“네? 아, 최진석 씨면 저희 아버지인데요.”
다음 날, 도서관에 갔다가 오는데 집배원 아저씨가 문앞에 서성이고 있었다. 부재중 딱지를 붙이고 가려는 길이라기에, 내가 사인하고 등기를 받았다.
“……압류 경고? 뭐야, 이게?”
등기라고는 입대 영장밖에 받아본 적이 없는지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흠칫했다. 불빛에 비춰봤더니 그런 찝찝한 글자가 읽어졌던 것이다.
“엄마. 이거 뭐야? 우리 집에 무슨 큰 빚 있어? 누구 보증 같은 거라도 섰었어?”
“어, 어어?”
시장에서 돌아온 엄마한테 보여주며 묻자,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엄마는 이미 알고 있는 문제 같았다.
“별거 아니야. 너는 신경 안 써도 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뭘! 뭐냐니까 이거?”
“요즘 세상에 빚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딨어? 차 사고 집 사고 할 때, 대출 끼고서 조금씩 갚고 그러는 거지.”
“이거 그런 독촉이 아닌데 뭘! 2년 동안 꾸준히 연체돼서 압류하겠다는데! 몰라도 된다는 게 말이나 돼?”
엄마가 난처한 표정으로 얼버무리려고 했으나, 놀란 가슴이 있는데 적당히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끈질기게 다그치자 엄마가 결국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아버지가 회사에 사고가 생겨서 권고사직 당했어. 너 군대 가고서 거의 바로.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되니까 퇴직금이랑 이거저거 보태서 가게 한 번 차렸었고.”
“가게를 냈었다고? 아빠가? 나 군대 간 사이에?”
“한 1년 하다가 말았어. 장사가 안 돼가지고. 지금은 아버지 다시 취직해서 조금씩 갚는 중이야. 등기 온 거는 덜 급한 빚이라서 미뤄둬서 그런 거고. 당장에 딱지 붙고 그러는 거 아니야. 중간에라도 한 번 납입하면 압류 한참 미룰 수 있어.”
“…….”
토닥토닥, 달래고 타이르는 듯한 엄마의 말투에 괜히 머리가 멍해졌다.
이것저것 빚 갚고 있는 영수증까지 보고 났더니 둘러대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모르는 사이에 집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더니 기가 막히고 울화가 치밀었다.
“왜 나한테는 그런 얘기를 하지도 않아? 나는 이 집에서 무슨 가축이야? 식구 아니야? 집에 뭔 일이 있으면 당연히 같이 걱정도 하고 그래야지!”
“아우, 그런 소리 하지 말어. 다른 상황 같으면 말해주겠는데 하필 네가 군대에 있었잖아.”
“그러면 지금은? 제대한 다음에는 왜 말 안 했는데?”
“수능공부 하고 있잖아. 네가 안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괜히 공부 방해되고 스트레스 쌓이게 이런 얘기를 뭐 하러 하겠어?”
“…….”
“아버지한테는 내색하지 마. 네 마음은 알겠는데, 그게 아버지 체면 세워드리는 방법이야.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새끼가 그런 일로 눈치 보고 신경 써주고 그러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야. 무슨 얘긴지 알지?”
“……알았어.”
모처럼 바람까지 쐬고 왔는데, 느닷없이 이런 얘기를 들었더니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이미 반쯤 끝난 일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집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뒹굴었다 생각하니 자괴감이 밀려왔다. 진작 이런 얘기를 했으면 학원이라도 좀 저렴한 데로 끊었을 거 아냐! 한 달에 40만 원이 뉘 집 개새끼 이름도 아니고.
“왜 그렇게 보냐? 아빠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니. 그냥 좀…….”
식구들이 둘러앉아서 저녁을 먹는데 식욕이 생기지 않아서 깨작거리기만 했다. 내색하지 않는 ‘척’을 하려고 했는데 자꾸 아빠 얼굴에 시선이 갔다.
“아빠. 우리 같이 목욕탕이나 갈까?”
“목욕탕? 뜬금없이 웬?”
“아니, 뭐 그냥. 오랜만에 아빠 등이나 밀어줄까 해서.”
“속 보이는 새끼. 넌 누굴 닮았기에 그렇게 치밀하지가 못하냐?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어?”
“용돈 달라는 거잖아, 인마. 얼마 필요해? 무슨 사고 쳐서 돈 필요하다는 건 아니지?”
“아, 아니야! 됐어, 됐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는 모습에 나는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 치며 방으로 도망쳤다. 괜히 긁어 부스럼만 낼 뻔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다 나왔다.
“…….”
보통 이런 경우면 부모님 고생에 보답하자는 생각으로 더욱 열심히 하게 된다는데, 나는 정반대였다. 답답하고 초조해서 공부가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도서관에서는 그나마 나은데, 학원 수업을 듣고 있을 때가 문제였다.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려놓고 나온 것처럼 매 순간순간에 숨이 턱턱 막혔다. 이 공간에 있는 시간 자체가 돈을 콸콸 쏟아 붓는 것 같아서였다.
‘아르바이트라도 해볼까…….’
지금까지 용돈이 아쉬운 적은 없었던지라 아르바이트라는 개념이 낯설었다. 갑자기 진효 형을 철없다고 씹어댔던 것이 쪽팔리게 느껴졌다.
‘어? 이런 것도 있네. 야구장 볼 보이? 배팅센터 관리?’
서투르게 알바 사이트를 뒤적거리다 보니까 그런 일자리가 눈에 띄었다. 딱히 의식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야구 쪽 일자리를 먼저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수능 공부를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주말 알바 이외에는 생각할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야구 관련 일자리 중에서는 조건을 충족하는 게…….
“……!”
그때, 뇌리에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거 되려나? 들어본 적도 없는 얘기지만, 솔직히 성립될 만도 하지 않나? 허황된 건 아닌 듯도 한데.
“…….”
한동안 컴퓨터로 이것저것 검색을 하던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저번에 교환한 수재 형님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형님, 안녕하세요. 저 최태웅입니다. 그날은 잘 들어가셨죠?”
「어, 태웅이! 반갑게 바로 또 전화를 주네. 너도 잘 들어갔고?」
“아우, 그럼요. 형님이 집 앞까지 바래다주셨잖아요.”
하루 식사자리에서 친해졌다지만, 진효 형이라는 접점을 빼면 별다른 관계도 없는 사이다. 그래선지 전화를 받는 수재 형님의 목소리에는 의아함과 반가움이 뒤섞여 있었다.
적당한 안부인사 뒤, 나는 조그맣게 심호흡을 했다.
“실은 그날 했던 얘기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전화드리게 됐습니다.”
「그날 얘기? 혹시 우리 팀에 투수 들어오는 거 말하는 건가?」
“예. 비슷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수험생이라 선수로 들어가기에는 부담이 있어서요.”
비슷하다는 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지 수재 형님이 잠시 침묵했다.
나는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훈련용 배팅 볼 투수 고용해보실 생각 없나요? 못해도 거기 선수분들 타율 3푼은 올려드릴 자신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