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17화 (17/90)

< 괴물 배터리 -017- >

017.

‘똥 밟았다.’

타석에 선 박진효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전에 붙었을 때와는 반대로, 박진효의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이 짙은 빛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원래 약점이었던 코스가 강점으로, 강점이었던 코스가 약점으로 변했다. 단순히 한가운데 공을 기다리는 것과는 명백하게 달랐다.

‘폼을 바꾼 건가? 설마 내 조언 때문에?’

짚이는 데가 있는지라 가슴이 철렁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초등야구 경력이 전부인 사람 말 때문에 폼까지 고쳐? 명색이 프로가? 폼이 얼마나 민감하고 중요한 건데! 이게 말이나 돼?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프로인 박진효가 아마추어인 내 조언을 무척이나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

문제는 그 조언의 출처가 초능력이라는 점이었다.

중간과정이나 이론을 무시한 채로 ‘정답’만 도출해내는 약점 지적이 박진효에게 도움이 될까?

도움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오히려 심각한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나로서는 이 조언이 좋은 쪽으로 작용할지 나쁜 쪽으로 작용할지 완전히 판단 불가였다.

그게 문제였다.

‘나 때문에 앞길 창창한 선수가 방향을 잘못 드는 거 아니야?’

그건 곤란하다. 내 양심이 감당을 못한다. 나로서는 도저히 뒷일을 책임질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스트라이크존의 전반적인 색깔 농도는 비슷했다. 즉, 타격 능력 자체에는 큰 저하가 없다는 말이었다.

‘지금 내가 약점 코스를 찌르면, 그거 보완한답시고 또 폼을 건드릴지도 몰라.’

세상에 모든 코스에 강한 타자가 어딨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는 한 마리도 못 잡게 되는 법이다.

난 내가 박진효의 야구에 뭔가 영향을 줬다는 사실이 급격하게 부담스러워졌다.

까앙! 까앙! 까앙!

다행히도 내게는 상대의 강점과 약점을 알아보는 초능력이 있었다.

박진효가 괜한 짓을 하지 않게 하려면, 지금의 타격에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심어줘야겠지. 그래서 불규칙한 척하면서 가장 치기 좋은 코스에 공을 뿌려주었다.

박진효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장타를 뻥뻥 때려냈다.

“똑바로 안 던져요? 아저씨가 뭔데 날 봐줘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계략은 금세 들통 났다.

아오 씨, 쓸데없이 감만 좋아가지고서는.

“내, 내가 뭘 봐줘요? 열심히 던지고 있구만.”

“열심히 던지는 게 이래요? 내가 아저씨랑 한두 번 붙어봤어요? 이게 말이 돼요?”

“아니. 아저씨가 잘 때려놓고서 나한테 왜 그래요? 내가 뭘 봐줘요? 느리게 던지길 했나, 계속 같은데다가 던지길 했나.”

“…….”

뭐, 어쩌라고? 배 째. 증거 있어? 영장 가져와.

박진효의 얼굴이 짜증스럽게 일그러졌으나, 당장에 말문은 막혔다. 하기야. 이렇게 변화무쌍한 코스로 공을 던지면서 일부러 맞아준다는 게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

배짱 튕기기로 그 자리는 어떻게든 면했다. 하지만 박진효의 집요함과 군대라는 환경의 폐쇄성은 내 생각을 훌쩍 뛰어넘었다.

“아저씨, 지금 안 바쁘죠? 에이, 한가해 보이네.”

“태웅이 아저씨, 오늘 근무 없죠?”

“한 판 붙을래요?”

“저녁 먹었어요? 배불러 보이네. 소화 좀 시켜야죠?”

박진효는 그날 이후로 틈날 때마다 나를 찾아와서 들볶았다. 오죽하면 분대 막내가 저 아저씨를 같은 부대 선임이라고 착각까지 했을까.

정색하고 짜증도 내봤지만, 저 인간의 똘끼에 어디 씨알이나 먹힐 일인가. 무엇보다 내가 박진효의 야구 인생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부담감 때문에 마냥 매몰차게 굴기도 어려웠다.

“아저씨! 나 공부해야 된다니까요? 재수생이야! 하나도 안 한가해요! 제대하고 금방 수능 봐야 돼!”

“누가 종일 하재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만 기분전환 삼아서 놀자 이거예요. 몸도 움직이고 그래야 공부도 잘되지. 요새 짬 찼다고 일과도 삐댈 거면서.”

“나 이렇게 들볶는 이유가 뭔데요, 도대체?”

“그러는 아저씨는 싫은 이유가 뭔데요?”

“싫은 거에 이유가 어딨어! 그냥 귀찮다니까! 내가 아저씨랑 놀아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의무가 없긴 왜 없어요? 사람을 이런 몸으로 만들어 놓고서.”

“…….”

헐, 시발. 나 지금 소름 돋았어. 나도 모르게 죽빵 갈길 뻔했다. 이 미친 새끼가 뭐래는 거야!

나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박진효가 피식 웃으면서 팔짱을 끼었다.

“아저씨가 왜 그렇게 빼는지 대충 짐작하는데요. 나도 그렇게 병신 아니에요. 남한테 몇 마디 들었다고 바로바로 폼 바꾸고 그러지 않는다고요.”

“그러면…….”

“원래부터 종종 지적받던 걸 고친 거예요. 아저씨 조언이 계기가 된 거기는 한데, 아저씨 조언 하나 때문에 고친 건 아니라고요. 알아들어요?”

“그런 게 있으면 진작 고칠 것이지…….”

입안으로 구시렁거린 말일 뿐인데, 박진효가 용케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맺혔다.

“야구에는 정답 없어요. 코치 10명한테 상담하면 10가지 조언이 나와요. 사공이 많으면 배로 산이 간다고, 그거 다 주워들으면 죽도 밥도 안 되고요.”

“…….”

“왜 진작 안 고쳤냐고요? 지적을 받아도 납득이 안 가서 그랬어요. 아무리 잘난 사람한테 조언을 받았어도, 결국은 본인이 설득력 느낀 길을 가게 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왜…….”

“그 설득력을 아저씨한테서 느꼈거든요. 아저씨 얘기를 들어보면, 똑같은 내용이라도 뭔가가 달라요. 도대체 왜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건지, 머리보다 먼저 몸이 막 설득된단 말이에요. 알아듣겠어요?”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존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부탁이니까 조금만 어울려줘요. 나 지금 뭔가가 잡힐 듯 말 듯한데, 아저씨 공을 다시 봐야만 막힌 게 뚫릴 것 같단 말이에요.”

“……아, 진짜.”

나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진지한 눈빛을 보았더니 근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하나만 약속해요.”

“알았어요. 뭔데요?”

“나중에 뭔 지랄이 나도 절대로 내 탓 하기 없깁니다. 만약에 뭐 잘못돼서 야구 인생 몇 년씩 씹어 먹게 돼도, 아저씨 혼자서 병신 짓 한 겁니다.”

“그야 당연하죠! 어디 그걸 말이라고!”

박진효는 화색이 돈 얼굴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박진효와 붙으면서 스트라이크존에 보이는 대로 코멘트 해주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 썩 대단한 중노동은 아니었다. 많아도 6~8타석이었으니, 오른손으로 던지면 기분전환 삼기에 딱 좋은 정도였다.

까앙!

“또 이러네. 코스가 아슬아슬하면 볼이나 스트라이크나 반응이 비슷하잖아. 이건 선구안 문제 아닌가?”

까앙!

“풀 카운트랍시고, 스트라이크 생각하고 스윙하려는 게 뻔히 보여. 살짝 빼니까 딱 걸려드네.”

퍼억!

“형, 내가 방금 그 소리 했다고 이번에는 지켜보려고 했지? 이제 보니까 볼 카운트에 따라서 집중력이 많이 바뀌네.”

생각해보면 참 웃긴 상황이었다. 내가 무슨 은거고수라고, 프로선수 데리고서 뭐하는 건지, 원.

우리 둘은 이등병 때부터 봤으면서도 데면데면했지만, 이러고 노는 사이에 말도 트게 되었다. 알고 봤더니 박진효는 나보다 나이도 세 살이나 많았다.

난 평소에 틈틈이 시험공부를 했고, 진효 형은 혼자서 짬날 때마다 스윙 연습을 했다. 본인 말로는 나와 붙을 때마다 어렴풋하게 느낀 것을 자기 걸로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여튼 지루한 말년병장 시기를 때우기에는 적당한 여흥 거리였다. 여전히 내 조언이 프로선수한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부담스러웠지만서도.

“……부로 전역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그러는 사이에도 국방부 시계는 굴러갔고, 마침내 개구리 마크를 모자에 박게 되었다.

누군들 안 그렇겠느냐마는, 위병소를 나서는 순간에 만감이 교차했다. 처음에는 상상도 못 했지. 6년도 넘게 버렸던 글러브를 여기서 다시 끼게 될 거라고는…….

집에 와서 딱 사흘 동안 빈둥거리다가 학원 등록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심한 사람은 사회에 적응할 때까지 반년씩 걸리기도 한다던데. 상병 꺾인 뒤부터 틈틈이 수험공부를 한 덕분인지 금세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었다.

한 달쯤 돼서 모의고사를 봤더니 고3 때보다도 훨씬 괜찮은 등급이 나왔다. 성적표를 받아들고서 나도 놀랐다. 이 악물고 달리면 인 서울 턱걸이가 아니라 SKY 턱걸이도 사정권에 들어갈 정도였다.

보통 아들내미가 전역하면 한동안 가축 취급을 하기 마련이라는데, 갑자기 신분이 상승했다. 고3 때처럼 보약도 얻어먹고, 식구들이 내 눈치를 살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군대에 가서 그런가?

완전히 군대에 가기 전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아니, 군대에서 겪은 일들이 나라는 인간의 역사에서 깨끗하게 지워져 버린 것 같았다.

“……재미없다.”

나는 문득 중얼거렸다.

정말로 신기했다.

6년 동안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하얀 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야구하고 싶다.”

절대로 공부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다.

기분이 센치해져서 그런 거야.

나, 가을 타는 남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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