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16- >
016.
한동안 군대 리그가 중단되었다. 우리 부대에서 난 사고는 아니지만, 원래 이런 일이 생기면 여기저기 들쑤시기 마련이다.
군기를 정비한다나 뭐라나 하는데,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점이 문제였다. 결국은 매사에 조심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아니, 시발. 전투 체육이 군기랑 사기 배양하는 거라고 할 때는 언제고. 군기 정비한다면서 시합은 뜬금없이 왜 짜르는데?”
“시합 짤린 게 문제가 아니야. 나는 포상 짤렸어. 정식으로 통제하는 것도 아닌데 인사과에서 지레 눈치 보느라 다 빠꾸먹이고 있대.”
“이게 뭔 날벼락이냐?”
당연히 병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지만, 불만은 어디까지나 불만일 뿐이다. 까놓고 말해서 나만큼 직접적으로 속이 타들어 가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포인트 모을 기회가 그렇게 많은 게 아닌데…….’
나는 그야말로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매주 경기를 해도 화기중대와 맞붙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박진효와 맞대결할 기회는 한 경기에 다섯 타석이나 될까 말까였다.
초조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연대장 찾아가서 어깃장을 놓겠어, 소원수리 설문지를 적겠어?
불시점검이니 뭐니 해서 부산스러웠지만, 한 달쯤 지나자 부대의 분위기도 많이 풀어졌다. 이제 슬슬 야구를 재개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는데,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신임 연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이등병 시절을 곱게 보내선지, 나는 군대 물정에 둔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연대장이 바뀐다는 말만 듣고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닥쳐서 보니 이건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 따로 없었다.
“여기는 뭐 이렇게 야구 장비가 많은가? 아, 전임 연대장이 사비로 기증한 거라고? 그런데 병사들 체력 기르기에는 축구가 낫지 않겠나?”
생각해보면 우리 부대의 야구 문화는 전임 연대장 한 사람의 작품이었다.
주말마다 야구 시키고 휴가증을 뿌리지 않았어 봐라. 이렇게까지 야구에 죽고 야구에 사는 부대가 되었겠나. 기껏해야 좋아하는 사람 몇몇이 모여서 즐기는 정도지.
주말 리그가 사라진 시점에서도 빈사상태였는데, 신임 연대장의 한마디에 완전히 사망 판정이 났다.
물론, 신임 연대장이 구태여 야구를 금지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종종 모여서 경기를 벌이기도 했으나…….
“태웅이 아저씨, 투수 내보내면 우린 안 해요.”
“네? 아니, 왜요?”
“왜는 뭐가 왜예요? 솔직히 아저씨가 던지면 게임이 안 되잖아요. 왜 양민학살을 하려고 그래?”
“아니, 그런 법이 어딨어! 이거 왕따야, 왕따! 마음의 편지에다가 확 긁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따돌린다고?”
“왕따는 뭔 얼어죽을. 그러면 투수 말고 빠따로 서시든가. 아무튼, 투수로는 절대 안 돼요.”
“…….”
경기 목적이 ‘휴가증’에서 ‘재미’로 바뀌다 보니, 내가 낀다고 하면 아무도 붙어주질 않았다. 왜 그런지 이해야 가지만, 나로서는 복장이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내무 생활에도 소소한 변화가 찾아왔다. 휴가증을 창조해내는 위대한 에이스에서 흔해 빠진 일병으로 전락한 셈이니, 이 또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최태웅 일병님. 교장 정비하는데 같이 가시랍니다.”
“야, 태웅이! 애들 데리고 가서 공구리 칠 거 가져와.”
“빨리빨리 안 움직이냐? 어!”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나요?
저는 그 시대가 끝난 것 같습니다. 시발.
선임들이 갑자기 안면 싹 바꾸고 나를 갈구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야구랑 휴가증 믿고 군 생활을 개판으로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다른 일병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을 뿐인데, 상대적으로 생활이 빡세어졌다. 암암리에 받던 에이스 혜택이 사라진 탓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모아놓은 휴가증이 있으니, 더러워서 못 해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힘든 이등병 시절을 날로 먹은 것만 해도 얼마나 큰 혜택인지는 알았으니까.
‘결국 포인트는 물 건너간 건가…….’
나는 예전에 적어놓은 메모를 심란한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미션이 성립하는 조건은 나도 정확히 모른다. 상대가 프로이거나 실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할 거라고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전자라면 어떨까? 앞으로 나한테 프로선수가 포함된 ‘팀’과 경기할 기회가 생길까? 생긴다 쳐도, 그 기회 안에 필요한 만큼 미션 포인트를 모을 수 있을까? 박진효처럼 정식 경기에서 짜고 치기에 응해줄 사람을 내 인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왼팔은 어차피 안 되는 거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오른팔로 전향해서 프로 지망하는 건 오버 같고.’
사실 하려고 들면 못할 일까지는 아니었다.
오른팔로 전향해서 죽어라 2년쯤 훈련하면 연습생에 턱걸이할 정도는 될 것이다. 시합에 나가서 조금씩 포인트를 모으면, 한국프로야구의 톱스타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잘하면 전성기 안에 메이저리그에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프로 야구선수가 되고 싶은 마음은 또 없었다. 이 정체불명의 초능력이 언제까지 유지될 건지도 모르는 일이고.
내 마음을 곱씹어보니 결국은 이거였다.
-입 안에 떨어진 감을 먹을 생각은 있지만, 감을 따러 나무에 오를 의지는 없다는 것.-
노력 없이도 돈 많이 버는 프로가 될 것 같으니까 순간적으로 혹했던 거지. 땀 흘려 연습해야 한다면 딱히 야구 선수가 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다.
간사한 것 같아도 어쩌겠어. 나는 무려 6년 동안이나 평범한 수험생으로 살았는데. 어릴 때에는 연습 안 해도 이기기만 할 만큼 재능이 넘쳤으니까 즐겼던 거고.
“그냥 꿈 한 번 거하게 꿨다고 치지, 뭐.”
나는 시원섭섭한 얼굴로 메모지를 짝짝 찢어버렸다.
***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
주말 리그가 없어진 데에도 적응했고, 날짜에 비례해서 짬도 차곡차곡 쌓였다. 군번이 풀린 박진효는 상병 말호봉에 이미 분대 투고를 꿰어차고 있었다.
“어? 아저씨, 오랜만이네요.”
“아, 태웅이 아저씨.”
일과가 끝난 뒤. 연병장 구석에서 배팅 연습을 하던 박진효는 우연찮게 최태웅과 마주쳤다.
건물이 떨어져 있는지라,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서로 마주치는 적이 없었다. 오다가다 본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느긋하게 대화를 나눈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저씨는 싸지방에도 한 번을 안 오는 것 같더니만, 일과 끝나면 맨날 이것만 하나 봐요?”
“일이니까요. 최대한 감이 안 떨어지게 발버둥쳐야죠.”
“하기사. 아저씨도 주말 야구 쫑나서 아쉽겠네요.”
“아뇨. 나는 딱히? 여기 투수들 상대해봐야 별로 도움 안 돼요. 솔직히 휴가증이 목적이었죠, 나도.”
“아하,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박진효는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도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였다. 치열하게 몸에 새긴 폼은 딴짓을 하는 와중에도 한 치의 오차조차 없는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방망이 들고 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심심하면 한 판 붙어볼래요? 저번처럼.”
“저번처럼? 또 그거요? 1대 1? 그래요 뭐, 까짓 거. 마침 심심했는데.”
최태웅이 흔쾌하게 끄덕이자, 박진효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연한 얼굴로 꺼낸 말이지만, 내심 최태웅이 거절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최태웅에게야 심심풀이지만, 자신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족집게 과외’였다. 그때 이후로 자신은 타격 폼을 조금씩 수정해 왔기 때문이다.
직접 공을 가져온 최태웅이 느릿느릿 옛날 마운드 자리에 가서 섰다. 그때, 마운드에서 자신을 본 최태웅의 어깨가 한순간 흠칫 떨렸다.
‘……설마?’
박진효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최태웅이 자신의 폼에 일어난 변화를 알아봤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 인간은 진짜로 천재인가…….’
초등야구 경력이 전부인 사람의 조언으로 타격 폼을 임의수정했다? 선배들한테 이딴 소리를 했다간 미쳤느냐고 욕을 바가지로 처먹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저 친구의 ‘교습’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코치가 아무리 훌륭한 조언을 해줘도 결국은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A란 타자에게 이상적인 타격 논리가 B에게도 이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최태웅의 조언에는 몸이 ‘정답’을 강제로 느끼게 만드는 마력 같은 것이 있었다.
그걸 한 번 주입당하고 나면, 좀이 쑤셔서 그대로는 견딜 수가 없게 된다. 박진효는 ‘그것’을 다시 한 번 경험해보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했다.
“저기요……. 진효 아저씨…….”
“아, 뭐해요? 빨리 던져요. 빨리빨리.”
“아니, 저기요. 아저씨, 그러니까…….”
“아, 됐고요. 빨리 던지라니까?”
떨떠름해하는 최태웅의 표정에 박진효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생각할 시간을 줬다간 물리자고 할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기어이 포기했는지, 최태웅이 느릿한 몸짓으로 투수판을 밟았다. 박진효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까아앙!
경쾌한 금속음과 동시에 타구가 뻗는다.
잠실구장이었어도 담장을 넘겼을 장타에 박진효의 입꼬리가 반사적으로 씰룩거렸다.
‘좋았어!’
장타가 나온 적은 있지만, 최태웅의 공을 이만큼 확실하게 때린 적은 처음이다. 타격 폼을 바꾸려는 노력은 헛된 게 아니었다. 그런 생각에 호흡이 조금 거칠어졌다.
까앙! 까앙! 까아앙!
스윙할 때마다 경쾌한 타격음이 연달아 터졌다.
언젠가와 비교하자면 참혹할 정도의 난타다. 스윙할 때마다 최태웅의 공은 자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방망이에 처박혀 튕겨 나갔다.
3타석, 4타석, 5타석.
연달아 뻗는 타구에 박진효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가 쏟아져 나오는 안타에 희열을 느끼는 것도 잠시였다.
7타석, 8타석, 10타석…….
그리고 9안타.
“…….”
이쯤 되자, 박진효는 서서히 위화감을 느꼈다.
‘너무 잘 맞는 거 아닌가?’
느리고 밋밋한 공이 쉬운 코스로 날아오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속은 거의 예전 그대로다.
볼 배합도 여전히 상하 좌우, 들쑥날쑥.
투구는 예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휘두르는 족족 타구가 뻗는다. 일부러 던져주는 배팅볼도 이렇게까지 잘 맞아 나가지는 않을 텐데.
‘……설마? 일부러 안타 맞아주는 건가?’
퍼뜩 뇌리를 스친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똑같은 구속에 여전히 상하 좌우 불규칙적인 볼 배합인데, 일부러 안타를 맞아준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아니. 저 아저씨라면…….’
논리도 이론도 없이, 그냥 척 보기만 해도 타자의 약점이 보인다는 괴물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척 보기만 해도 그 타자의 강점을 알아본다는 말일 수도 있다.
일부러 타자가 노리는 코스에 공을 던져준다면, 불규칙적인 볼 배합을 하는 척하면서도 안타를 ‘맞아줄’ 수 있지 않을까?
까아앙!
11안타. 정말로 ‘아무렇게나’ 휘두른 스윙에 타구가 거침없이 하늘을 날았다.
박진효는 묘한 오한을 느꼈다. 어느 순간엔가 그는 방망이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최태웅이 찔끔하며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걸 본 박진효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진짜로 일부러 맞아줬다고?’
실로 경악스러웠지만, 박진효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어떻게?’라는 의문이 아니었다.
박진효의 눈빛에 희미한 분노가 섞였다.
“똑바로 안 던져요? 아저씨가 뭔데 날 봐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