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15- >
015.
“아저씨는 한가운데가 종종 비어 보여요.”
“가운데가 빈다고요?”
“억지로 갖다 붙여서 말하자면, 한가운데 공은 안 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가끔 일부러 한가운데 기다릴 때만 빼면.”
“……내 폼에서 그런 게 티가 나요? 아니면 눈? 표정? 아니면 다른 쿠세가 있어요?”
“그렇게 물어보면 난 모르죠. 그냥 딱 보니까 그래 보여서 말하는 것뿐인데.”
“…….”
박진효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폼에 중심이 없다, 노림수를 가져라, 스윙이 산만하다, 망설임이 있다, 대처능력이 떨어진다….
지금까지 코치들이 해준 조언은 대강 이런 식이었다.
뉘앙스만 놓고 보면 최태웅의 조언도 맥락은 비슷한 듯했다. 단지 앞뒤가 바뀐 듯한 느낌이 있을 뿐이었다.
“보통 타자들이 한가운데를 제일 잘 치는 상태에서 코너로 오는 공에 그때그때 대처한다면, 아저씨는 반대로 처음부터 어려운 코스만 노리는 것 같아요.”
“그게 문제가 돼요? 가끔 역발상으로 허를 찌르거나 실투할 때 빼면, 일부러 가운데 주는 투수는 없잖아요.”
“실투만 잡아도 3할이라고들 하잖아요. 그리고 코너에 오는 공은 똑같은 양의 연습을 해도 안타가 덜 나오는 편이기도 하고.”
“…….”
“시험으로 치면 이런 느낌이죠. 5점짜리 문제 10개 나오는 단원이랑 3점짜리 문제 2개 나오는 단원을 똑같이 2시간 공부하는? 어차피 10할 칠 거 아니면 5점짜리 10개 나오는 단원만 4시간 공부하는 게 훨씬 점수 잘 나오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최태웅은 ‘헛소리일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걸러 들어라.’라고 못 박았다. 아마추어가 느낀 대로 지껄이는 것뿐이니, 괜히 곧이곧대로 들었다가 폼 망가졌다고 탓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가운데를 버리는 경향이 좀 있기는 하지, 내가.’
실투만 쳐도 3할이라지만, 박진효는 그건 결국 상대의 실수에 편승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동점 만루 상황에 상대 투수가 실투를 안 하면? 결국에는 잘 던진 공을 안타로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물론 누군가는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프로가 한두 경기만 하는 것도 아닌데, 전반적으로 많이 출루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동점 만루 상황이라고 투수 실투가 특별히 확 줄어들기라도 하느냐고.
요컨대, 이건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었다.
개인적인 야구관일 뿐.
아니, 현실적으로 자신의 2군 성적을 생각하면…….
“그럼 몇 판 몸으로 해보죠.”
다음 날, 박진효와 최태웅은 방망이와 글러브를 들고 연병장 구석에서 만났다. 말로만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몸으로 직접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
박진효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내심 이를 악물었다.
지금까지 최태웅과의 승부는 무척 감질났다. 몇 타석 붙지도 않는데, 툭하면 고의사구로 도망을 다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조언해달라고 귀찮게 군 것은 이쪽이지만,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두들겨서 ‘내 야구도 틀린 게 아니다!’라고 어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까앙! 까앙! 부우웅! 까앙!
주자도 점수도 없는 1대 1의 맞대결이기에 최태웅은 빠른 템포로 공을 뿌렸다.
“방금 거는 스트라이크. 맞죠?”
“……맞아요. 쓰리 투. 풀 카운트.”
심판도 없었기 때문에 볼 판정은 서로 간에 말로 합의했다. 애초에 승부가 목적이 아닌지라, 자잘한 판정으로 얼굴을 붉히는 일은 없었다.
까아앙!
“오케이. 저건 평범하게 경기했으면 라이트 플라이. 인정하죠?”
퍼억!
“한복판이 비었다고 하니까 오히려 거기만 신경 썼죠? 딱 그래 보여서 모서리 한 번 찔러본 거예요.”
부우웅!
“방금은 그냥 스텝 밟는 게 낫지 않았어요? 타석에서 자리는 그대로 지키면서 노리는 코스만 바꾸니까 괜히 폼이 일그러진 느낌이던데.”
퍼억!
“오케이. 삼구 삼진.”
까앙!
“배드 볼을 너무 의식하는 것 같아요. 공이 가운데로 쏠리면 보통은 더 잘 때리는데, 아저씨는 지금 삑사리가 났잖아요.”
한 타석이 끝날 때마다 최태웅은 공을 주우러 다니면서 담담하게 코멘트했다.
조언이라기보다는 단순한 감상. 영화평론가의 전문적인 칼럼이 아니라, 일반 관객이 취미 삼아서 적은 리뷰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일반 팬의 리뷰가 전문가의 평론보다 날카로운 경우도 있는 법이다.
‘저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13타수 4안타. 3할 7리.
이만하면 타자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으나, 박진효는 그저 입맛이 썼다. 타자의 승리라는 건 어디까지나 동급인 투수와 붙었을 경우이기 때문이다.
왼손으로 던지기야 했지만, 전력투구는 4개뿐.
2군에 불과하지만, 명색이 프로인 자신이 시속 100km를 살짝 넘는 직구에 3할 턱걸이를 했다? 과연 이걸 타자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3중대 에이스? 아, 걔가 던지는 거 좀 신기하더라.
지난 몇 주 동안, 박진효는 최태웅의 투구를 집요하게 관찰했다.
단순한 승리욕이 아니다. 그의 투구 패턴에서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수 읽기 개쩔어. 미친놈이, 내가 기습 번트 한 번 해보려고 하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땅에다가 꼬라박더라.
-선수 출신이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장난이 아니던데. 바깥쪽 공만 작정하고 기다리는데, 공 3개가 연속으로 몸 쪽으로 오는 거예요.
-확실히 선수는 다르더라고요. 우리가 뭐 기다리는지 그렇게 티가 나나?
상대한 타자들로부터 받아본 코멘트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박진효 자신도 느낀 바였지만, 결국 최태웅의 투구에 대한 감상은 한마디로 귀결되었다.
-마치 타자가 기다리는 공을 알고, 그 반대로 던지는 것 같다.
수학 영재들은 문제를 보면 답부터 떠오른다고 한다. 풀이과정을 물으면 ‘1+1이 왜 2냐?’라는 당연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오히려 쩔쩔맨다는 것이다.
대화를 나눠보면 최태웅도 타격 이론에 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늘어놓은 코멘트도 풀이과정을 적당히 갖다 붙인 것에 불과했다. 타자의 허점쯤은 척 보기만 하면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처럼.
‘저런 게 천재라는 건가…….’
초등학교 때 야구를 그만뒀다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6년의 공백. 그런데도 시속 100km 남짓한 포심과 직감적인 배합만으로 2군 프로를 대적했다고 하면 누가 순순히 믿어줄 수 있겠나.
팔이 멀쩡해서 계속 훈련을 했다면? 아니, 지금 이 상태에서 적당한 변화구라도 하나 장착한다면?
“쳇, 역시 정식 경기가 아니면 포인트는 안 주나.”
“네? 뭔 소리예요?”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린 최태웅이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았다.
경기가 아니라서 부담은 덜했겠지만, 14타석의 승부는 투수에게 있어서 상당한 중노동이다. 박진효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도움 좀 됐어요?”
“그게…….”
“하여튼 앞으로도 나한테 조언해달라 그러면 이렇게 몸으로 때워야 돼요. 나도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순전히 감이라서, 직접 봐야만 알거든요.”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투에 박진효는 무슨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최태웅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어쨌든 난 먼저 부탁 들어줬으니까 아저씨 차례인 거 알죠? 떼어먹기 없깁니다?”
***
까앙!
날카로운 파울 타구가 3루 쪽 스탠드에 처박힌다.
양 진영에서 일제히 탄식이 터졌다.
이걸로 벌써 12구째.
투 스트라이크 이후부터 10개나 되는 파울이 쏟아진 셈이니 손에 땀을 쥐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오오, 역시 클라스가 있네. 여기 다른 인간들은 시켜도 못할 텐데.’
하지만 정작 가장 피가 말라야 하는 나는 오히려 씰룩거리는 입가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진효가 타석에서 그런 나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일부러 파울을 내달라고요?
-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5구까지만. 그런 다음에 적당히 삼진 먹고 들어가 줘요.
조언을 요구하는 박진효에게, 나는 며칠 전에 그러한 조건을 제시했다. 내가 생각해도 보통 뜬금없는 소리가 아니었기에 박진효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승부 조작을 하자는 소리예요?
-에이, 동네 야구에서 승부 조작은 무슨. 그리고 그런 건 말 그대로 승부를 모르는 게임에나 통하는 말이죠. 사실 내가 다 쌩까고 이기려고 들면 끝나잖아요.
-도대체 왜 그런 걸…….
-이유는 말 못하고요. 어차피 기브 앤 테이크잖아요. 해줄 거죠? 해줄 거죠?
-…….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추론하자면 미션 포인트는 박진효를 상대로만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특성을 활성화 시키려면 800포인트가 필요하다. 삼구 삼진이나 풀카운트 삼진 같은 5포인트짜리 미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유감스럽게도 박진효와 1대 1로 대결할 때는 스트라이크존은 보였지만 미션 포인트는 얻어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기회는 썩 많은 편이 아니었다. 야구 자체는 매주 하지만 화기중대와 붙을 기회는 몇 안 되니까. 그중에서도 박진효와 붙을 기회는 많아 봤자 한 달에 5타석이었다.
박진효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었으나 결국 수락했다. 그로서는 내가 더 아쉬운 입장이라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까아앙!
“파울!”
“으아아악! 또야!”
주위에서 비명을 지르건 말건, 나는 흐뭇한 얼굴로 마운드를 꾹꾹 밟았다.
이걸로 14구. 여기서 파울 하나만 더 낸 다음에 아웃 잡아내면 200포인트다.
까앙!
신중하게 던진 15구에 방망이가 따라왔다.
페어 라인 밖으로 휘어져 나가는 타구를 본 나는 주먹을 불끈──
“오오오!”
“잡았다!”
“……!”
한순간 다리에 힘이 빠질 뻔했다.
개구리처럼 풀쩍 뛰어오른 3루수의 글러브로 타구가 진공청소기처럼 쏙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시발! 똥식이가 한 건 했다!”
“멋있다! 잘 생겼다!”
“으아악! 이게 말이 돼? 저 똥구멍 새끼가!”
화기중대는 절규하듯 머리를 감싸 쥐었고, 우리 중대는 월드컵 4강 진출이라도 한 것마냥 환호로 들썩였다.
3루수는 자기가 잡아내고도 안 믿어졌는지 시뻘게진 얼굴로 들떠서 발광했다.
“봤냐, 시발! 형이 이런 사람이야! 반했냐?!”
“……예. 아주 그냥 제 눈깔이 돌아가서 청혼할 뻔했습니다.”
“최태웅이! 너 혼자 게임 하는 거 아니란 말이야! 뒤에 인마, 형들이 있어! 믿고 팍팍 던지라고!”
“……예. 든든해서 아주 그냥 복장이 터져버릴 것 같습니다. 든든해서.”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새끼들 같으니라고.
공들인 15구가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나는 괜스레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박진효가 ‘난 잘못 없슈.’라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뭘 어쩌겠어. 다음 타석에 다시 해봐야지. 이 지랄을 또 하려니까 벌써 진이 빠지긴 하지만…….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웅!
-5대기 비상. 5대기 비상. 실제 상황. 실제 상황. 102연대에서 총기 피탈 발생. 총기를 피탈한 자가 함봉리 방향으로 도주 정. 검문소 인력 즉시 출동할 것. 반복한다. 102연대에서 총기 피탈…….
아, 씨발. 세상아, 나한테 뭐 꼬운 거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