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14화 (14/90)

< 괴물 배터리 -014- >

014.

[투구 수 테러 진압 : 15구 이상의 승부 끝에 아웃 카운트를 잡아낸다.]

[200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한순간 흠칫했지만, 당혹감은 크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무 일 없다가 왜 갑자기? 반사적인 의문이 드는 한편으로 저번과 이번의 공통점도 떠올랐다.

‘박진효.’

미션을 달성했다는 알림창이 나타난 것은 모두 저 아저씨를 상대했을 때뿐이었다.

‘저 아저씨는 뭐가 특별하기에?’

짚이는 거라면 역시 야구밖에 없었다.

상대가 프로여야만 미션으로 쳐준다거나? 아니면 실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하나?

“스트라이크 아웃! 경기 종료!”

나머지를 깔끔하게 틀어막은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사이버 지식방에 달려갔다. 전에 발견한 공략 블로그에서 오늘 달성한 미션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실해. 200포인트. 투구 수 테러 진압. 15구 이상의 승부 끝에 타자를 아웃시킨다.”

스페셜 미션인 ‘드라마틱한 승부’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짠 포인트다. 언제든지 반복할 수 있는 일반 미션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건 ‘드라마틱한 승부’보다도 어려운 미션이었다. 15구 이상의 승부상황 자체가 투수의 의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포인트 주는 밸런스가 똥망이구만.

하기야, 이건 이벤트 미션이니까. 실제로 게임 할 때는 ‘삼구 삼진’이나 ‘완투’나 ‘풀카운트 삼진’ 같은 걸로 포인트를 모았었지.

“이러면 지금 1,200포인트가 있는 건가…….”

특성창. 알림창. 스테이터스. 베이스볼 트레이너. 이것저것 다양한 명령어를 중얼거려봤지만 달라지는 부분은 없었다. 알림창을 내가 원하는 때에 자유롭게 볼 수는 없으려는 모양이었다. 귀찮게스리.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특성과 미션을 메모해서 막사로 돌아왔다.

이제 일병이 돼서 분대 후임만 둘씩 거느린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지금은 도무지 이런저런 잡일이나 할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정리하면…… 그거지? 미션 달성하면 포인트를 벌 수 있고, 포인트를 모으면 특성을 살 수 있어.’

지금 내가 가진 ‘매의 눈’만 해도 사실은 엄청난 특성이다. 타자의 정신상태나 컨디션까지 반영해서 실시간으로 약점을 볼 수 있다니? 피지컬 좋은 투수가 이걸 손에 넣는다면 사이영상도 우스울 일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특성 ‘스나이퍼’.

이걸 얻으면 최고 구속의 공을 센티미터 단위로 제구할 수 있고, 실투가 나올 확률도 사실상 사라진다.

컨트롤 아티스트라고 불린 수많은 투수도 한 경기에 3~15개가량의 실투를 한다. 이런 실투가 대부분 출루나 장타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아웃 카운트 대여섯 개는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특성 ‘닥터 K’.

게임에서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 투수 능력치가 경악스러울 만큼 수직상승한다. 상대에게 이 특성이 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방망이를 일찍 휘둘러야만 했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아니지. 포인트가 없으면 어차피 가지지도 못하는 것들인데.’

미션 대다수는 경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달성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미션 상대가 박진효 뿐이라면 얘기가 조금 복잡해진다.

완투 완봉처럼 ‘타선’을 상대로 하는 고액 미션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삼구 삼진(5포인트)’이나 ‘풀카운트 삼진(5포인트)’, ‘한 타자 3타석 연속 탈삼진(50포인트)’ 같은 것들인데…….

시발, 이게 될 일이야? 그 아저씨를 상대로?

“최태웅 일병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얼마 전에 들어온 막내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 왜?”

“최태웅 일병님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막사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잠깐 나와줄 수 없겠느냐고 물어봐 달라고 했습니다.”

“막사 밖에서? 누군데?”

“그게…… 죄송합니다. 화기중대였는데, 제가 얼굴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화기중대?”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화기중대 사람이 누군지야 뻔한 일이고. 안 그래도 그 아저씨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던지라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건 과민반응이었다.

내가 그 아저씨 만나면 뭐할 건데? 나한테 이런저런 초능력이 있다고 고백이라도 할 거야? 그 아저씨랑 붙은 것만 미션으로 인정되는 게 맞는다고 쳐도,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뭘 할 건데?

“어, 태웅이 아저씨. 바쁜데 부른 거 아니죠?”

막사 앞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예상대로 박진효였다.

그가 살짝 웃으면서 자판기 쪽에 턱짓했다.

“음료수 한잔할래요? 커피나 뭐 다른 것도 좋고. 내가 뽑아줄게요.”

“네. 사준다면야 고맙게 마시죠 뭐.”

이래저래 안면이 생겼지만, 사실 우리 관계가 친근한 것은 아니었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커피를 홀짝거리다 보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거기 중대는 지낼 만 하냐느니, 후임은 많이 들어왔냐느니. 시시한 잡담으로 말문을 조금씩 트다가 박진효가 가볍게 헛기침하며 용건을 꺼냈다.

“태웅이 아저씨. 사실 이건 전에 물어봤던 거랑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말인데요.”

“전에 물어봤던 거면…….”

답지 않게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니까 예전에 받았던 질문이 떠올랐다. 자기 약점이 보이지 않느냐고 했지?

“똑같은 거를 말만 바꿔서 물어보는 거기도 한데……. 혹시 내 폼에 쿠세 같은 게 있어요?”

“쿠세? 버릇이요?”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익숙하지도 않은 단어에 무심코 눈을 끔뻑거렸다.

“쿠세는 보통 투수한테 말하는 거 아니에요? 직구 던질 때 버릇, 변화구 던질 때 버릇, 견제할 때 버릇.”

“타자라고 쿠세가 없는 건 아니죠. 바깥쪽 노릴 때, 안쪽 노릴 때, 변화구 노릴 때, 직구 노릴 때, 타이밍이 안 맞는다고 생각할 때, 지켜보려고 할 때.”

“…….”

“메이저리그에 누구는 원래 말이 졸라게 많은데 작전만 나오면 갑자기 조용해진다잖아요. 그래서 상대 팀이 작전 나온 거 다 알아본다고. 그것도 일종의 쿠세죠.”

“아, 그래요?”

그런 것도 있었구나. 신경 쓴 적이 없어서 몰랐네.

솔직히 초딩 야구에서 뭐 그리 거창한 심리 싸움 같은 걸 했겠나. 직구 하나로도 충분히 무쌍 찍었는데. 포수인 찬희는 좀 그런 거 배웠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물어봐요?”

별 생각 없이 툭 튀어나온 말이다. 그러자 한순간 박진효의 눈썹이 꿈틀한 것처럼 보였다.

“왜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보니까 느낌이 그랬어요. 내 노림수가 뭔지 읽고서 던지는 것처럼.”

수를 간파당하는 것은 보통 투수 쪽이다. 타자는 기본적으로 투수가 던진 공에 대응하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수많은 타자들이 노림수를 갖고 타석에 선다. 모든 코스를 잘 때릴 수는 없으니, 특정한 코스는 아예 포기해서 타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초능력을 생각하면 분명히 ‘투수’가 ‘타자’의 수를 간파했다는 표현도 맞기는 했다.

“그런 말 해봤자, 찍어서 던진 것뿐인데요. 마침 거기가 빈 것 같아서. 감으로.”

“……찍었다고요? 감으로? 마침 빈 것 같아서?”

박진효의 눈썹이 꿈틀했다. 울컥하는 심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그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저씨, 마지막 타석에 나한테 던진 공이 22개인 건 알아요?”

“아아……. 그쯤 됐죠.”

“그거 내가, 가운데 하나만 와라, 하면서 나머지는 모조리 걷어내느라 그런 것도 알아요?”

“예에……. 뭐 기다리는 공이 있는 것 같긴 했어요.”

“그러면 내가 기다리다 지쳐서 그냥 평범하게 치기로 한 거는요? 공 21개 동안은 한복판 공만 기다리다가, 딱 22개째만 포기한 거요.”

박진효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일부러 위압하려고 한다기보다는, 무심결에 몸이 움직이고 만 느낌이었다.

“뭐가 이상한지 이해가 돼요? 공이 스무 개가 넘도록 가운데만 노렸다고요. 그러다가 딱 한 번 마음 바꿨는데, 하필 딱 그때 가운데가 들어왔어요. 하필 딱 그때! 20개가 넘는 공 중에서 딱 하나인데! 하필 딱 그때!”

“아, 아저씨?”

“여기가 프로면 나도 안 이래요. 전력분석을 잘했구나 하고 말죠. 그런데 여기는 아니잖아요? 아저씨가 나랑 붙은 게 얼마나 된다고? 그런데 어떻게요?”

“그냥 감이라니까요? 척 보니까, 하필 그때, 마침 딱 거기 던지면 될 것 같았다고요.”

“……!”

시벌. 갑자기 바둑기사 이세돌 어록이 생각나네.

불리해서 대충 뒀는데 이겼네요. 질 자신이 없어요. 수가 보이는데 어쩌라고요.

박진효는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다는 얼굴로 콧김을 거칠게 뿜었다.

솔직히 저 아저씨가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져도 좀 말이 되게 져야지. 게다가 느린 공에 속은 것은 강속구에 짓밟힌 것보다도 부아가 치미는 법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도 있는 거지. 초능력을 다 털어놓고서 미친놈 취급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증명도 못하고.

“……음. 미안해요. 내가 뭐 따지려는 게 아니라, 조언 좀 얻으려고 그러는 건데.”

박진효가 뒤늦게 거친 숨을 가라앉혔다. 애써 웃는 낯을 띄우려는 모습에 나는 약간 어이가 없어졌다.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아저씨. 지금 이거 되게 이상한 거 알아요? 나 야구 마지막으로 한 게 초딩 때예요. 아저씬 프로라메요? 그런데 나한테 무슨 조언을 구한다고 그래요?”

“프로라고 용가리 통뼈인 거 아닙니다. 우리 팀, 친선경기지만 고삐리 팀한테 발린 적도 있어요. 2군이지만.”

“…….”

“아저씨가 초등학교 때 야구 관뒀다고 해서, 내가 무조건 아저씨보다 야구 잘 아는 것도 아니에요. 거기다가 아저씨는 투수고 난 타자잖아요. 내가 생각도 못 해본 걸 아저씨가 알 수도 있죠.”

무슨 공자 왈이냐? 불치하문(不恥下問).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말뜻이야 진즉 알아들었지만 나는 꽤 난처했다.

내 초능력은 말하자면 풀이과정 다 건너뛰고 문제를 보는 순간 답부터 떠오르는 거다. 왜 이런 답이 나오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 무턱대고 ‘아저씨는 어느 어느 코스에 대한 반응이 허술해요.’라고 조언하는 게 옳을까? 오히려 지금까지 해온 훈련에 상반되는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장기적으로 폼이나 뭐가 어긋날 수도 있는데?

“혹시 쓸데없는 소리해서 괜히 방해될까 싶은 거면 괜찮아요. 걸러 들을 테니까. 난 그냥 의견 차원에서 조언 받고 싶은 거예요.”

“…….”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한 말에 괜히 뜨끔했다.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마추어라면 모를까, 프로라서 문제였다. 프로라면 내가 엉뚱한 조언을 한 것이 나비효과처럼 인생 전체에 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헛소리일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충분히 걸러 듣겠다고 약속하면 조언해줄게요.”

고민 끝에 대답하자, 박진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내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대신에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네, 말해봐요.”

애초에 공짜로 부탁할 생각은 아니었는지, 내가 먼저 꺼낸 조건 얘기에 박진효의 목소리가 더욱 들떴다. 사람이 좀 됐구만.

“오늘은 이미 늦었고. 내일 일과 끝나고 봐요.”

“내일요?”

“네. 몸으로 가르쳐 줄게요.”

나는 의미심장하게 히쭉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