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13- >
013.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경기는 유례가 없는 학살극으로 변질됐다.
선수들이 나름대로 승부욕을 품고 섰으나, 공 4개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야말로 벌집에 대고 살충제라도 뿌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양민학살도, 투수전도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양 팀 투수가 모두 폭주하는 게임은 전례가 없었다.
“이게 뭐지…….”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집에 갈래……. 엄마 보고 싶어…….”
완전히 들러리로 전락한 우리 타자들은 시무룩해져서 눈만 끔뻑거렸다. 화기중대야 나한테 몇 번 압살당한 경험이 있다지만, 우리 중대는 이런 게 처음이니까.
남들이 보기에야 나와 박진효의 투맨 쇼겠지만, 박빙은 아니었다. 3중대와 화기중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날려, 날려. 박진효!”
“승부 해라! 승부 해라!”
3중대는 내 타석에 지명타자를 내는데, 저기는 당연히 박진효가 직접 타석에 섰다. 출루 하나를 반쯤 맡아놓은 셈이니까, 우리 팀이 명백하게 불리한 셈이었다.
“볼!”
“볼!”
“볼!”
“우우우우!”
나는 여전히 승부를 피했다.
예전에 던졌던 고의사구는 경기 편하게 가고 싶었던 거라 얍실하다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승리를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이대로라면 우리 팀도 점수를 못 낼 텐데. 저런 강타자는 당연히 피해야 하는 거 아니야?
“베이스 온 볼스!”
박진효는 저번처럼 고의 헛스윙으로 도발하지 않고 순순히 1루에 걸어나갔다. 중간에 나를 가볍게 째려봤지만 뭐라고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조용히 몸으로 항의했다.
“어? 어어?”
“뭐해! 던져! 뛰잖아!”
“도루 잡아!”
포수가 어버버버 하는 사이에 박진효는 유유히 2루 베이스를 밟았다. 그 광경을 본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뭐, 도루 자체가 희귀한 건 아니다. 오히려 아마추어 레벨에서는 프로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도루가 쏟아지고, 또 성공한다.
하지만 암묵적인 룰이라는 것이 있다. 군대에서는 몸 다치면 서로서로 눈치가 보이기 때문에 다들 적당히 도루를 삼갔다. 누가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아저씨, 뭐예요? 막 뛰고 그러는 거 있어요?”
“뭐가 문젠데요? 그럼 뛰면 안 된다는 건 있었어요?”
“그런 건 아닌데, 지금까지는 다들 누가 시켜서 안 뛰었어요? 뛸 줄 몰라서 안 뛰었냐고요.”
“뭔 말인지는 아는데, 그렇다고 뛰지 말라고 누가 해놓은 것도 아니잖아요. 투수가 싸워주지를 않는데, 이렇게라도 해야지. 그럼 저렇게 대놓고 경원만 하는 거는 있어요?”
벤치 클리어링 같은 건 아니지만, 고참급 사이에서 미묘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도루 안 하기로 명백하게 합의한 것도 아니니, 결론은 정해진 싸움이었다. 특히나 저쪽에서 내 고의사구를 물고 늘어지면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기도 했다.
“꼬우면 거기도 도루 하세요. 우리는 안 말려요. 아, 일단 출루부터 해야겠지만.”
……시발.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저기서 왜 저 지랄인지는 알겠다. 고의사구 그만하라고 무언의 협상을 걸어오는 것이다. 프로에서도 선수가 대기록을 앞두고 있으면 언론 플레이 해서 상대가 피하기 어렵게 눈치를 주는 법이니까.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체인지!”
박진효가 3루까지 뛰었지만, 이번 이닝은 어찌어찌 후속 타자를 잡아내서 무실점으로 무마했다.
바짝 약오른 선임들이 ‘우리도 도루해주마!’라고 이를 악물었으나 헛된 몸부림이었다. 저쪽 팀에서 비꼰 대로 일단 출루 자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회.
타석에 들어온 박진효를 보면서 나는 고민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괜히 상대해주면 낚이는 것 같은데…….’
이대로 1루로 내보내면, 3루까지 연속 도루를 하리라는 것도 분명했다. 우리 포수와 내야수 실력으로는 그걸 못 막는다.
나도 견제에는 익숙지 않다. 초등학교 야구는 부상의 위험 때문에 도루를 많이 못 하도록 주자리드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흠. 생각해보니 답이 정해진 고민이었네.
100퍼센트 확률로 3루를 주는 것보다는, 홈런 맞을 가능성을 감안해도 타석에서 잡아내는 게 덜 위험하지.
퍼억!
낮게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살짝 걸쳤다.
볼이 되기는 했지만, 첫 타석과 다르게 명백히 승부하는 공이었다.
“…….”
만족스럽게 씨익 웃어 보인 박진효가 방망이를 고쳐 잡았다.
까앙! 퍼억! 까앙!
손끝에서 뿌려진 공이 스트라이크존 안팎을 넘나들고, 박진효의 방망이가 벼락같이 뻗는다. 총알 같은 타구 몇 개가 머리 뒤나 스탠드 쪽으로 맹렬하게 튀어 나갔다.
‘풀 카운트……. 이런 건 또 처음이네.’
언뜻 치열하게 보이는 승부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손에 땀을 쥐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의 헛스윙 때문에 풀 카운트가 나왔던 적은 있지. 2스트라이크를 먼저 줬는데도 내가 무시하고 볼만 던졌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승부 도중에 3볼 2스트라이크가 나오는 상황은 여기서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박진효의 스윙은 신중하고 집요했다.
까앙!
“파울!”
공을 여러 개 던지다 보니까, 어떤 공을 던질지 고민할 필요 없다는 게 오히려 마음 편했다. 던질 줄 아는 변화구가 하나만 있어도 조금쯤 머리가 아팠을 것이다.
‘충분히 잡을 수 있어.’
스트라이크존을 들여다보던 나는 미묘한 긴장감에 입맛을 다셨다.
모든 코스가 핫존으로 분류되던 상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평소보다 명백하게 색깔이 옅었다. 주황색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다.
컨디션이 나쁜 건지, 귀신같이 허를 찌르는 나의 볼 배합에 긴장한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오늘의 박진효가 평소보다 약하다는 점이었다.
까앙!
“마이 볼! 마이 볼!”
“앞으로! 앞으로! 두 걸음 더!”
10구에 이르는 승부 끝에서야 상대를 누르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서 데뷔한 이래로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승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땀을 닦으면서 내려온 내 눈썹이 휘어졌다.
“어, 뭐야?”
“투수 교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서 돌아봤더니, 박진효 말고 다른 사람이 마운드에 서 있었다. 원래 화기중대에서 투수를 맡던 그 사람이었다.
‘진짜로 어디 아픈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었다. 박진효는 1루수 와 포지션을 교환한 것뿐이었다. 마운드에서는 내려가지만, 타자로서는 계속 뛴다는 말이었다.
아니, 포지션을 바꿨을 뿐이니까 규정상 중간에 다시 마운드에 설 수도 있다.
‘……설마.’
뇌리를 스친 어떤 생각에 어이가 없어졌다. 박진효의 똘끼를 생각하니,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아졌기 때문이다.
-자꾸 고의사구 하면, 나도 계속 마운드에 올라간다. 내가 투수하는 거 싫으면, 너도 고의사구 하지 마라.
아니, 그런데 박진효야 그렇다 치고. 다른 선임들은 그걸 내버려 둬? 저렇게 잘 던지는 놈이 내려오도록? 짬이 엄청나면 모르겠지만 꼴랑 물일병밖에 안 되는데?
까앙! 퍼억! 퍼억!
“세이프!”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세이프!”
이해가 되건 말건, 저쪽 팀에서 선수 포지션을 저렇게 짜겠다는데 우리가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투수가 바뀌자, 우리 타선의 방망이에서 불이 났다. 유감스럽게도 무득점이었지만, 2안타에 볼넷까지 더해서 만루 상황을 만들어 냈다.
저쪽 생각을 모르겠지만, 예상대로 그 뒤부터 경기는 우리 팀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흘러갔다.
나는 간단히 타자들을 압살했고, 우리 타선은 마운드를 압박해서 8회에 기어이 1점을 뽑아냈다.
“싸우자! 이기자!”
“아자, 아자!”
하이라이트는 9회 초.
선두타자인 박진효를 보고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퍼억! 까앙! 까앙! 까앙!
2점만 됐어도 걸렀겠지만, 1점 리드밖에 안 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승부를 하게 되었다. 9회 말이 남았으나, 만약 내가 여기서 거른다면 9회에는 또 박진효가 마운드에 올라올 거란 생각이 들었다.
까앙! 까앙!
핫존의 색깔만 보면 틀림없이 약해졌는데, 박진효의 컨택은 정말로 집요해졌다. 안타 칠 생각이 없나 싶을 정도로 모든 공을 철저하게 걷어내고 있었다.
‘아오, 씨발. 벌써 또 10개 넘었어. 오늘따라 진짜 왜 저 지랄이야?’
아무리 왼팔을 쉬게 했다고 해도, 투구수가 이쯤 되면 슬슬 신호가 온다. 하다 보니까 그런 거면 모르겠는데, 작정하고 파울을 남발하는 느낌이라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또 한복판으로 던지기에는 그렇고.’
지금까지 박진효의 스트라이크존은 한복판의 색깔이 가장 옅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비정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정상이었다. 한가운데는 모든 타자가 가장 잘 치는 코스이면서 모든 투수가 가장 피하는 코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가운데 공은 머릿속에서 배제했던 거겠지.
그런데 오늘은 예외적으로 존 한복판의 색깔이 가장 짙고 주변이 옅었다. 의식적으로 한가운데 공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저번에 했던 그 대화 때문인가?’
왜 하필 한복판이냐고 묻기에 그냥 찍어서 던진 거라고 대답했지. 그것 때문에 나를 ‘가끔 한가운데 직구를 던지는 투수’라고 인식했다면 대강 이해된다. 계속해서 파울을 내다 보면, 반드시 한가운데 직구가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달라는 거 안 줘서 미안하다!’
까앙! 까앙! 까앙!
하지만 타자가 어딜 노리는지 보이는데, 순순히 원하는 요리를 내어줄 리 없었다. 실투가 나와서 원치 않게 한복판으로 들어간다면 모를까.
까앙! 까앙!
지랄 같은 파울 승부가 이어졌다. 그야말로 누가 먼저 삑사리 나나 끝까지 한 번 해보자는 심보였다.
15개까지 세고서는 헤아리는 것도 포기했다. 어림짐작하건대 KBO 신기록은 이미 넘은 것도 같았다. 시발.
“……어?”
헐떡거리면서 반쯤 무아지경으로 투수판을 밟았던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박진효가 그립을 고쳐 잡는 순간에 스트라이크존의 형태가 확 바꾸었기 때문이다.
‘가운데가 비었네?’
갑자기 뭐지? 라는 의문은 한순간이었다.
나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저 새끼 인내심이 먼저 끊어졌구나!’
투구 수 테러는 투수에게 고문과도 같은 일이지만, 타자에게도 스트레스를 준다. 2스트라이크는 예 저녁에 지난 상태라 스윙이 조금만 삐끗해도 삼진을 먹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노리던 한가운데 직구가 안 오니까, 평범하게 다른 공을 노리기로 한 거겠지.
어쩌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난 지금 20개 가까운 공을 코너에만 뿌렸으니까.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상대 투수가 자기 노림수 바뀐 걸 초능력으로 한눈에 알아본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아자!”
약 올리듯 한복판에 쏘아낸 공이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미트에 꽂혔다.
박진효의 표정은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돌이 된 것처럼 움찔하지도 못한 채로 한가운데 꽂히는 공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말소리가 들린 건 아니지만, 뻐금거리는 입모양을 보니 그렇게 중얼거린 것 같았다.
박진효는 그야말로 귀신이라도 맞닥뜨린 듯한 얼굴로 마운드 위의 나를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일반 미션 ‘투구 수 테러 진압’을 달성했습니다.]
그때였다.
홀로그램 알림창이 내 시야를 가로막고 나타난 것은.
[투구 수 테러 진압 : 15구 이상의 승부 끝에 아웃 카운트를 잡아낸다.]
[200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내 눈도 박진효 못지않게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