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12화 (12/90)

< 괴물 배터리 -012- >

012.

“뭐, 뭔 소리예요? 보이긴 뭐가 보여요?”

나는 한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꾸벅꾸벅 졸다가 느닷없이 물벼락이라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가만히 봤는데, 구속만 믿고 뿌리는 공 같지는 않아서 그래요. 혹시 전력분석 공부 같은 거라도 따로 하고 있었나 싶어서…….”

아, 그런 얘기였나.

상대의 말이 어떤 뉘앙스인지 이해하고 나서야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해야 하나? 하필이면 자기 약점이 ‘보이느냐’고 물어봐서 놀랐잖아.

“그런 거 없어요. 저, 작년까지만 해도 수험공부했단 말이에요. 야구 관둔 지가 몇 년인데…….”

당연히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는 없어서 잡아뗐는데 박진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럼 나한테 던진 그 공은 어떤 판단에서 나온 거예요?”

“그런 공이라뇨?”

“한 번씩 한복판에다가 던졌잖아요. 그거 뿌리면서 나름대로 무슨 계산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

박진효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짜증을 억누르는 기색이 미묘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건…… 아마도 그거다. 답답함과 기막힘, 의문이 뒤섞인 무언가. 보통은 찬스볼이라고 할 만한 게 연달아 날아왔는데 못 쳤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필’ ‘딱’ ‘방심하던 그때만’ 골라서 그런 찬스볼을 던졌는지 이해가 안 돼서 속이 터지는 거겠지.

“어따 던져도 맞을 거 같아서 아무렇게나 막 던진 건데요. 왜, 그 있잖아요. 시험 풀다가 모르겠으면 연필 굴리는 것처럼.”

“그냥 찍어서 던진 거라고요?”

“아니면 뭐겠어요? 내가 이 안에서 아저씨 타격이라도 분석하고 앉았겠어요?”

나는 일부러 피식거리면서 말했고, 박진효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여기는 프로리그가 아니다. 영상자료도 없고, 코스별 타율을 기록해놓은 것도 없다. 있다고 해도, 동네야구 똥볼을 상대로 나온 거라서 우리 둘의 승부에는 아무런 참고가 안 된다.

“아무튼 할 얘기 더 없으면 갈게요. 막내 근무라서 내가 청소준비 해야 돼요.”

“아…….”

박진효가 뭔가 개운치 않다는 얼굴로 우물거렸으나, 나는 더 상대하지 않고 등 돌렸다. 사실 내가 ‘아닌데요.’라고 하면 그로서는 할 말이 없을 상황이기도 했다.

“이런 문제가 또 있을 줄은 몰랐네…….”

태연한 체하면서 자리를 피한 나는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오, 괜히 식겁했네.

이런 상황을 미처 고려해보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생길 법한 일이었다.

스트라이크존이 타자의 심리 상태까지 반영해서 실시간으로 변화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타자 입장에서는 투수가 자기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독심술이지.

다른 사람들이야 상관없다.

왼손으로 던질 때는 당연하고, 오른손으로 던질 때도 ‘역시 선수 출신은 다르네.’라며 자기들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네야구 수준의 아마추어니까, 어째서 못 치는지 큰 의문을 품지도 않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 2군인 박진효는 달랐다.

그에게는 어떤 볼 배합을 봤을 때 ‘이런 계산으로 던진 공이겠구나.’라고 파악할 만한 소양이 있다.

물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타석에서 실력 발휘하는 건 다른 문제지. 훌륭한 평론가가 반드시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지는 않은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내 볼 배합에서 어떤 ‘위화감’이나 ‘비범함’을 감지하고, 궁금증을 품은 것이다.

퍼억!

“스트라이크!”

그날 일이 다소 인상에 남았지만, 나는 오래지 않아 잊어버렸다. 신경 자체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향상심 있는 선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따지듯이 물어보는 태도가 조금 띠꺼웠을 뿐. 일반 수험생으로 치면 시험 끝나고 오답 노트를 차원의 노력이다.

까앙!

“마이 볼! 마이 볼!”

“중견수! 중견수가 잡게 냅둬! 건드리지 마!”

하지만 나는 그날 일을 2주 만에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고 있노라면, 유달리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쟤, 화기중대 걔 아니냐?”

“박진효였나? 또 왔네.”

“최태웅이 때문에 그러지 뭘. 존나 의식하네.”

여기 야구는 리그전 몇 판과 토너먼트 몇 판으로 이뤄진다. 우리 중대는 내 덕분에 무패라서 거의 매주 경기가 있지만, 다른 부대는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면 종종 쉬기도 한다.

그렇게 경기가 없을 때마다 박진효는 꼬박꼬박 우리 3중대 경기를 관전하러 왔다. 노트와 펜까지 가져와서 끼적거리는 걸 보면, 단순히 경기 관람이 목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저 아저씨는 군번이 얼마나 풀렸길래 이등병이 벌써 한가하게 쏘다니냐. 나는 막내가 근무 서면 아직도 청소준비 해야 되는데.’

당연히 신경이 쓰였지만, 스트라이크존 사용을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내 볼 배합을 수상하게 생각해도 상관없다. 저번에는 갑자기 ‘약점이 보이느냐.’고 물어왔기 때문에 지레 찔끔했을 뿐이다.

죽어라 스토킹 해봐라. 초능력으로 타자 약점이 눈에 보인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

기껏해야 천부적인 감각이 있다거나, 전력분석 공부 안 했다는 말이 뻥이라고 생각하는 정도겠지.

“연승 끊어버리자!”

“최강 화기!”

“태웅아! 살살 좀 해줘라! 쟤네 울겠다!”

“오늘도 연승 간다!”

화기중대와 재대결이 잡힌 것은 박진효가 스토킹을 시작한 지 3주쯤 지나서였다.

나는 마운드에 서는 것이 오랜만에 흥겨웠다. 어제 드디어 일병으로 진급한 것도 있고, 박진효가 그동안 뭘 어떻게 연구했는지 궁금한 것도 있어서였다.

선공은 화기중대.

여느 때처럼 박진효가 1번 타자로 나와서 붕붕 스윙연습을 하고 있었다.

“볼!” “볼!” “볼!”

오늘 경기에는 연대장도 없었기에 구태여 귀찮게 승부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완전한 경원은 아니고, 존에서 주먹 2개쯤 빠지는 볼이었다. 정 치고 싶으면 나쁜 공이라도 건드려 보라는 정도의 심보였다.

“베이스 온 볼스! 1루로!”

“…….”

박진효가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지만, 이전처럼 아니꼽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혀를 차는 정도의 리액션도 없이 털레털레 1루 베이스로 걸어갔다.

음, 사람 됐군. 아니면 자포자기인가?

이렇게 되면 우리 팀에게 위기는 없었다.

저번에 고전한 것은 우리 타선이 점수를 도통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야구의 특성을 생각하면 그건 정말로 이례적인 경우였다.

박진효만 경계하면 아무리 심각해도 2실점 이내로 틀어막을 수 있다. 저번처럼 말도 안 되는 빈타만 아니면 된다. 오랫동안 왼손을 쉬게 했으니, 여차하면 중간에 왼손으로 바꿔 꺼내도 되고.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 현실을 머리로 이해하고 있기에, 우리 팀 선수들의 표정은 느슨했다. 하지만 그 여유는 화기중대의 선발투수가 1회 말 마운드에 오르기 전까지였다.

“……박진효?”

“뭐냐, 쟤? 투수 아니었잖아.”

마운드에 오른 것은 다름 아닌 박진효였다.

오른손으로 가볍게 연습투구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선수들이 웅성거렸다.

‘뭐,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닌데…….’

야수와 투수의 어깨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비교 대상이 같은 선수일 경우다. 일반인과 견준다면 대개 야수의 어깨가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박진효가 투수를 안 한 지금까지가 이상했던 거다. 저쪽 투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났던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박진효가 투수를 안 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있었다.

야구선수라고 무조건 일반인보다 어깨가 강하리라는 법도 없고, 부상일 수도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퍼억!

“……스, 스트라이크!”

박진효의 초구가 미트에 꽂힌 순간, 주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내 왼손 투구에는 조금 못 미친다. 하지만 명백하게 여기 사람들 수준을 뛰어넘는 강속구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코너를 노릴 정도로 뛰어난 제구는 아니다. 하지만 보아하니 스트라이크존에 자유롭게 넣고 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어, 씨발…….”

“뭐냐, 이거 갑자기?”

공 자체도 빨랐지만, 생각지 못한 강투수의 등장이 가져다주는 충격도 컸다. 타자들은 꼼짝없이 선풍기질만 하다가 3타자 연속 삼진으로 나가떨어졌다.

“저 인간은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나…….”

내 입에서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이렇게 되면 또 저번처럼 무득점을 각오해야 한다.

이기려면 나 역시 무실점을 찍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바닥에 침을 퉤 뱉은 나는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끼고서 2회 초의 마운드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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