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11- >
011.
나는 눈초리를 파르르 떨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고, 고의사구도 엄연히 승리하기 위한 작전인데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우리 첫 경기 때는 3중대가 콜드 게임으로 이기면서도 고의사구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때는 고의사구 하는 척만 하다가 결국에 아웃 잡아냈던 것 같은데…….”
“두 번째 경기는? 중후반이야 박빙이라 그렇다 쳐도, 1회 첫 타석부터 고의사구 하는 건 아예 싸워볼 의지가 없다는 뜻 아닙니까?”
“그, 그건…….”
“어떻습니까, 연대장님? 고의사구 금지하면 게임이 더 재밌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힘 좀 써주십시오.”
시발, 누가 이 관심병사 새끼 좀 내 앞에서 치워줘!
취하지도 않은 주제에 저 지랄을 하는 박진효 이병 때문에, 농담 아니고 등골이 다 서늘했다. 근처에 있던 간부 몇몇의 아연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연대장이 동네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대해줘도 그렇지. 아주 맞먹어라, 맞먹어.
이런 건 연대장 본인보다도 아래 장교들 눈치를 봐야 한다는 거 모르나? 연대장이 신경 안 써도 아래 장교들이 ‘너 미쳤냐? 연대장님이 네 친구인 줄 알아?!’라면서 지레 설레발 치리라는 것도 몰라? 명색이 운동부잖아!
“박 이병이.”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킨 연대장이 다소 근엄한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거기까지는 좀 오바지. 연대장이 무슨 폭군도 아니고, 어떻게 규칙을 이래라저래라 하겠나. 빈볼처럼 사람 다치는 문제면 몰라도.”
차분히 타이르는 연대장의 목소리에 내 입꼬리가 웃음을 참느라고 씰룩거렸다.
그래, 그래.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말이 나와야지. 고의사구 금지가 말이나 돼?
하지만 연대장의 이어진 말에는 씰룩거리던 내 입가가 경직되었다.
“그리고 최 이병이도. 박 이병이 말도 아주 틀려먹은 건 아니야. 남자라면 패기가 있어야지.”
“……잘 못 들었습니다?”
“패기 말이야, 패기! 남자는 패기가 있어야 한다고!”
……이거 뭔가 좀 이상한데. 왜 지금 ‘둘 다 잘못했으니까 같이 반성해.’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는 거냐.
“이기는 게 목적인 프로야구가 아니잖나. 전략적인 선택도 좋지만, 본질을 봐야지. 아마추어 스포츠는 체력이나 팀 워크, 패기를 기르는 게 목적이란 말이야.”
“…….”
“고의사구 금지라는 말까지는 않겠지만, 저 말이 사실이라면 연대장은 조금 실망이야. 전쟁에서 유리한 싸움만 골라 할 수 있겠나? 상황에 따라서는 질 걸 알아도 들이받아야 할 때가 있어. 그걸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패기고, 군기고, 사기인 거야. 그런 걸 배양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전투체육이라고 이름 붙는 거고. 알아들어?”
“……예. 알아들었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런 거다. 권력으로 고의사구를 금지하지는 않겠지만, 알아서 자제하라는. 시발.
내 얼굴이 구겨졌고, 박진효 이병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 노골적으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그걸로 사고를 치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나는 이성적인 남자니까.
그리고 사소한 후일담.
간부들이 ‘요새 병력들이 군기가 빠졌어!’라면서 병사들을 들볶았다. 그것도 아침 구보나 식사 이동이나 조석 점호 같은 더럽게 쩨쩨한 것들로.
나는 간부들이 갑작스럽게 꼬장 부리는 이유가 막연히 짐작 갔으나, 불똥이 튈까 봐 꿋꿋하게 침묵했다.
아오, 그 새끼 지네 부대에서 분명히 고문관일 거야.
***
“아오, 저 얄미운 새끼.”
위력 시위하듯 방망이를 휘두르는 박진효의 모습에 난 이빨이 저절로 갈렸다.
벌써 4주일이나 지난 일이니 무시하려고 생각했지만, 연대장이 구경 나온 걸 보고 포기했다. 일부러 이 경기만 콕 찝어서 보려고 나온 모양인데, 까먹었을 리가 없지. 제기랄.
‘어쩔 수 없지. 들이대 보는 수밖에.’
나는 공을 쥐면서 가볍게 한숨 쉬었다.
사실 박진효와 정면으로 붙는다고 해서 우리 팀이 크게 불리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왼손으로 던지면 다른 타자들은 스치지도 못하는 편이니까. 1번 타자인 박진효가 전 타석 홈런을 친다고 해도 4실점에 불과하다.
저번처럼 우리 타선이 빈타에 허덕이지만 않으면 감당 못할 점수는 아니다. 뭣보다 내 공이 전부 다 홈런이 될 거라는 보장도 없는 거고.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에이스 노릇을 해온 게 있는데, 한 게임 말아먹었다고 구박하겠어?
퍼억!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벼락같이 팔을 휘둘렀다.
초구는 안쪽 높은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지만, 박진효가 홈 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있었기 때문에 데드볼이 될 수도 있는 코스였다.
악감정이 아니라, 저번처럼 스트라이크존을 흔들어 보기 위한 사소한 책략이다. 악감정이 담겼다고 생각해준다면 데드볼을 더욱 경계할 테니 오히려 좋지만…….
‘꿈쩍도 안 하네. 한 번 구경한 수법이다, 이거지?’
생각해보면 저 양반도 어지간한 인물이었다.
위협구는 결국 타자가 공에 맞을까 봐 반응을 제대로 못하게 만드는 수법이었다. 맞아도 상관없다는 독기를 품는다면 쉽게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독기 좀 품는다고 몸이 곧바로 따라주면, 누군들 금메달 못 따겠냐.’
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저번에는 ‘위험 코스’의 크기가 그대로라서 못 알아차렸지만, 존 전체의 색깔이 옅어졌다. 위협구가 전혀 효과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까앙!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가장 색깔이 옅은 코스로 던졌더니 벼락같이 방망이가 뻗었다.
좌측 스탠드로 날아가는 강렬한 파울 타구.
궤적을 정확히 따라간 것치고는 허술한 타이밍이었다. 내가 또 꼼수를 쓸 거라는 생각에 경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것도 페어에 들어갔으면 장탄데…….’
풋내기들 상대로 양민학살이나 하고 놀아서 그런가. 간만에 살얼음 같은 피칭을 하게 됐더니 괜히 뚱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명색이 신동 소리 듣던 사람인데. 아무리 저쪽은 프로고, 나는 7년 공백이 있다지만…… 이렇게까지 씨알도 안 먹히니까 속 쓰리네.
‘다음은…… 한복판?’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특정 코스에 집중하다가 오히려 가장 치기 쉬운 한가운데를 놓치는 경우는 심심찮게 있으니까.
‘그래. 치려면 쳐라.’
한복판에 던지는 것도 상당한 배짱이 필요한 일이지만, 마음을 놔버린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포수의 사인에 따르기만 하던 그 시절처럼,
나는 무심하게 팔을 휘둘렀다.
***
퍼억!
박진효는 얼이 빠져서 눈만 끔뻑거렸다.
상대의 잔머리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았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온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빈 볼, 2스트라이크 이후에 경원, 지금까지 한 번도 던진 적이 없는 변화구, 고의적인 폭투, 승부하는 척하면서 볼넷, 이퓨스, 코너 워크, 부정 투구, 심지어는 자기 방망이에 몰래 뭔 짓을 해놨을 가능성도 생각해 봤다.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에…… 직구.’
이것도 물론 염두에 뒀던 경우의 수다.
던질 공이 없을 때에 ‘에라, 모르겠다.’라며 한복판에 직구를 던지는 경우는 프로에도 있으니까. 일부러 던지는 한가운데 직구는 어중간하게 코너를 노리는 것보다 효과적이라고 말하는 선수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박진효의 머릿속에서 이 공은 우선순위가 낮았다.
가능성은 있지만, 이 공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봐온 최태웅은 그런 놈이었으니까.
‘……운 좋은 놈.’
박진효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프로로서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원래 타자와 투수의 대결은 타자가 불리한 법이다. 다음 타석에는 갚아주겠다고,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다짐했다.
퍼억!
“스트라이크!”
두 번째 타석에서, 박진효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초구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에 포심 패스트볼.
아까는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었기에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이번에는 초구일 뿐이다. 고작해야 원 스트라이크. 문제 될 것은 없다. 다음 공을 치면 되니까.
까아앙!
무릎 근처로 뻗은 공을 건드려서 기어이 안타로 만들었지만 1루밖에 가지 못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미묘하게 거북한 타이밍에 거북한 코스였다. 주자도 없었기에 고의사구로 걸어나온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왜? 어째서?’
그토록 원하던 안타를 쳐냈음에도, 박진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짜증에 사로잡혔다. 두 번째 타석의 초구, 한가운데 직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던 것이다.
‘왜 하필 그 타이밍이지?’
던진 것 자체는 이해가 간다. 파격적인 짓거리로 허를 찌르는 것밖에 머릿속에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왜 ‘하필’ ‘그때’인지 이해가 안 갔다.
상식적으로 그럴 수가 있나?
바로 전 타석에 한가운데 직구로 허를 찔러서 삼진 따냈잖아. 그런데 다음 타석에 초구를 똑같은 한가운데 직구로 던져야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지?
현실적으로 그 공에 허를 찔러서 원 스트라이크를 헌납했으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 상황에 그 공을 던지면 자신의 허를 찌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실투가 아니야. 분명히 노리고 던진 거야.’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걸까? 전 타석에 홈런 맞아도 4실점쯤이니까, 잔머리 굴리기 포기하고 그냥 아무렇게나 던지기로? 그러다 보니 우연히 가운데 왔을 뿐?
퍼억!
“스트라이크!”
박진효는 뭔가 떨떠름하다는 얼굴로 스탠드에서 신중하게 최태웅의 피칭을 관찰했다.
구종은 역시 직구뿐. 직구 자체에 뭔가 패턴을 주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눈여겨볼 것은 코스인데, 이쪽에는 마땅히 이렇다 할 습관이 안 보였다.
‘그래도 기본이 돼 있기는 한데…….’
팔이 긴 선수에게는 몸 쪽 공.
팔이 짧은 선수에게는 바깥쪽 공.
키가 큰 선수에게는 낮은 공.
키가 작은 선수에게는 높은 공.
그 외에도 선수들의 자잘한 신체 조건이나 방망이를 잡은 길이, 타석에 선 위치 등에 따라 적절하게 코스가 변화한다. 교과서적인 볼 배합인데, 가끔 이해가 안 되는 코스의 공도 한 번씩 던졌다.
결론적으로 도움은 안 되었다. 이해가 가는 공이나, 이해가 안 가는 공이나, 타자가 못 치는 것은 똑같았기 때문이다.
‘자기 패턴을 가진 게 아니라, 타자에 맞춰서 볼 배합을 바꾸는 건가? 그게 말이 돼? 여기 타자들한테 무슨 데이터가 있다고?’
데이터라는 것도 기본적으로 자기 색깔을 가진 선수한테나 건질 수 있는 것이다. 10번 스윙하면 10번 다 폼이 달라지는 사람들한테 무슨 약점이 따로 있겠는가.
경기는 원 사이드로 흘러갔다.
장타를 또 치기야 했지만, 그래 봤자 1점.
상대 팀은 5회에만 5득점을 했다.
여느 때와 같은 패턴이었다.
‘애초에 이기는 건 기대도 안 했지만.’
야구는 투수놀음.
타자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그는 밉살맞은 놈 공을 두들겨 패고 싶었을 뿐이다.
“또 이겼다!”
“17연승이다!”
경기가 끝나고, 3중대원들은 신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이 승리 하나하나가 휴가증과 직결되니, 아무리 많이 이겨도 지겨울 리가 없었다.
시무룩해진 화기중대원들이 주섬주섬 야구장비를 정리하는 가운데, 박진효가 터벅터벅 마운드로 향했다.
“이봐요, 태웅이 아저씨.”
“네? 저, 저요?”
이겨서 좋다고 킬킬거리던 최태웅이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회식 자리를 제외하고는 대화 한마디 나눠본 적이 없는 사이다. 더군다나 야구를 하면서 쌓인 관계는 악연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박진효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묘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갑자기 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요…….”
박진효는 괜히 착잡한 듯이 입맛을 다셨다. 뭔가 어려운 말을 꺼내려고 한다기보다, 어떤 단어로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혹시 아저씨 눈에 내 약점이 보여요?”
최태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